근본불교에서 본 涅槃

특집. 열반이란 무엇인가

2008-01-14     관리자

      ㅡ근본불교 경전을 중심으로ㅡ

 1 우선 하나의 경(南傳. 相應部經典 二, 三, 一. 魔. 한역. 잡아함경 六,一O魔)부터 읽어 주길 바란다.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었다. 그때 장노 라다(羅陀)는 세존 계신 곳에 이르러 세존 앞에 예배드리고 그 곁에 앉았다. 그리고 라다는 이와같이 여쭈었다.

 『대덕이여, 악마라 말씀하시오나 어떤 것이 악마이옵니까?』

 라다야, 만약 색(色ㅡ육체)이 있으면 거기에는 악마가 있고 죽이는 자도 있으며 죽는 자도 있을 것이다. 라다여, 그렇기 때문에 색을 악마라고 관(觀)하며 죽이는 자라고 관하며, 죽는자라고 관하고 혹은 병. 종기. 가시. 아픔의 종자라고 관하도록 하라. 그와 같이 관하면 그것을 올바른 관찰이라 할 것이니라.』

 그리고 세존은 다시 수(受ㅡ감각). 상(想ㅡ표상). 행(行ㅡ의지). 식(識ㅡ의식)에 대해서도 똑같이 관찰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라다는 다시 물었다.

 『대덕이여, 그러면 무엇 때문에 바른 관찰을 하는 것입니까?』

 『라다여, 싫어하고 멀리하기 위하여 바른 관찰을 하는 것이니라.』『대덕이여, 그러면 무엇때문에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입니까?』『라다여, 탐하는 것을 여의기 위하여 싫어하고 여의는 것이니라.』『대덕이여, 그러면 무엇 때문에 탐하는 것을 여의고자 하십니까?』『라다여, 해탈하기 위하여 탐하는 것을 여의고자 하는 것이니라.』『대덕이여,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해탈하고자 하는 것입니까?』『라다여, 그것은 열반을 위하여 해탈하는 것이니라.』『대덕이여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열반하고자 하는 것입니까?』『라다여, 그와 같이 묻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그대는 묻는데 한계가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같구나. 라다여, 열반에 들어서 청정(淸淨)이 행해지는 것이며, 열반은 그 목표이고 그 마지막(終極)이니라.』

 여기서 세존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던 라다라는 비구에 대하여 살펴본 바로는 사위성에 살던 바라문 출신으로써 이미 늙어서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인물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오히려 청년과 같은 솔직한 심정을 갖고 있는 듯하여 종종 세존에게 극히 솔직한 질문을 제출하여 그에 대한 명백한 설명을 받았었다. 그러한 문답을 담긴 경은 남전에는 「라다상응」이라는 경으로 모아지고 그 속에는 실로 46경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인용한 것은 그 제1경으로써 맨 처음에 있는 것이다. 이 경의 내용은 우선 전반과 후반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에서는 라다가 『악마, 악마라고 하나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세존은 이른바 오온(五縕), 즉 색. 수. 상. 행. 식을 들어서 그것들을 악마라고 관하는 것을 좋다고 가르치고 『그와 같이 관하면 그것이 올바른 관찰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와 같은 취지보다 여기서는 오히려 그 후반에 주목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후반은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런 올바른관찰을 하는 것입니까?』라는 라다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세존은 『그것은 싫어하고 여의기 위하여』라고 대답한다. 다시라다는 『무엇 때문에 싫어하고 여의는 것인가?』라고 물으니 세존은 『그것은 탐을 여의기 위하여.』라고 대답한다. 다시 『그러면 무엇 때문에 탐을 여위는 것인가?』라고 물으니 『해탈을 위하여』라고 대답한다. 다시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해탈하는가?』라고 물으니 『그것은 열반을 위하여.』라고 대답하신다. 그러나 다시 『그러면 무엇 때문에 열반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을 때 세존은 거기서 라다의 질문을 막으면서 말씀하였다 말씀하시는 방식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라다여, 그것은 묻는데 심히 지나쳤다고 하는 것이다. 그대는 묻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하구나.』하였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열반에 들어서 청정이 행히지는 것이고 열반이야말로 그 목표이며 그 마지막이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열반이야말로 궁극의 목표라는 것이고, 거기에 이르렀을 때 청정행, 즉 불도의 수행은 성취된다는 것이 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열반이라느것은 어떤 경지일까?

 2 열반이라는 말은 원어를 찾아보면 파리어로는 「닛바아나」(nibbāna), 법어로는 「닐바아나」(nirvāna)이다. 중국의 역경자들은 그것을 의역하여 「멸도(滅道)」. 「적멸(寂滅)」. 「원적(圓寂)」, 어떤 때는 「멸(滅)」등의 역어를 대보았지만 아직 충분하게 그 원 뜻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인지 그 음사인 「열반」이라는 말이 가장 널리 쓰여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구태어 그 원의를 더듬어보면 「불이꺼진 모양」즉 「연소(燃燒)」의 괴멸(壞滅)」이라고나 하리라 이에 대하여도 또한 하나의 경(남전 상응부경전 38,1, 열반. 한역 잡아함경 18, 1, 難等)을 읽어주기 바란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장노 사리불이 마갈타국 나라가 마을에 머물어 있었다. 그때 염부차라는 외도의 유행자가 장노 사리불을 찾아와서 친절히 인사하고 친애와 예절에 넘친 담화를 나눈 다음 그 곁에 앉았다. 그리고 곁에 앉은 염부차라는 외도의 유행자는 장노 사리불에게 말하였따.

 『친구 사리불이여, 열반, 열반이라고 말들하는데 도대체 어떤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일까요?』『친구여, 탐욕과 어리석음이 모두 괴 소멸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염부차라는 외도 유행자의 물음은 어쩌면 이 열반이라는 개념이 세존에 의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개념으로서 그 당시에는 아직 반드시 일반적인 것은 아니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한 사리불의 설명은 참으로 극히 명쾌한 것으로써 저 외도의 유행자도 그에 의하여 우선 그 개념의 내용을 알아듣는 듯하였다. 거기서 그는 다시 그 실현의 방법을 물었다.

 『그러면 친구여, 그 열반을 실현하는 길이 있는가요?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 있읍니까?』『친구여, 그 열반을 실현하는 길이 있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 있지요.』『그러면 친구여, 그 열반을 실현하는 길은 어떤 것일까요? 거기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친구여,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이 열반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 정정(正定)입니다. 친구여, 이것이 열반을 실현하는 길이고 그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친구여, 그 열반을 실현하는 길은 훌륭합니다.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훌륭합니다. 친구 사리불이여, 그것은 또한 노력해볼만합니다.』

 여기 나라가 마을이라는 것은 왕사성에서 동쪽으로 하루 길쯤 되는 곳에 있는 마을로서 사리불은 거기에 종종 들린 일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에 나온 염부차라는 외도의 유행자도 또한 그 마을에 있어서 종종 사리불을 찾아와서는 질문을 하고 또한 답을 얻었다. 그 사이의 소식은 오늘날에는 상응부경전 38 염부차상응이라는 경들로서 모아져 있는데 거기에는 16경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 인용한 것은 거기의 첫번째 경이다.

 그런데 이경이 기술하는 바로서 앞서의 경 즉 세존이 라다의 물음에 답하면서 보이신 가르침과 비교할 때 거기에는 약간의 주목할만한 하나의 상위점이 있다. 그것은 딴 것이 아니라 이 경에서는 사리불은 염부차를 위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길, 열반에 이르는 방법에 대하여 팔정도, 즉 거룩한 여덟가지 길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의 경에서는 세존이 라다에게 보이신바 길은 염리(厭離)ㅡ이탐(離貪)ㅡ해탈(解脫)ㅡ열반의 체계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상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도 또한 하등의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에 대하여도 또한 하나의 경을 읽어주기 바란다.

 3 하나의경(남전, 상응부경전 45,101,海6)은 한, 때 세존께서 그의 제자 비구들을 위하여 말씀하신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여러 대하(大河)가 있다. 이른바 항하(恒河).야마나하. 아이라발제하. 사로부하. 마기하등이다. 그것들은 바다를 향하고 바다에 기울어져 바다에 흘러 들어간다. 비구들이요, 그와 같이 비구가 능히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을 익히고 닦으며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을 열심히 수행한다면 그는 열반을 향하고 열반에 기울어져 열반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하면 비구가  능히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을 열심히 수행하면 그는 열반을 향하고 열반에 기울어지며 열반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서 그는 원리와 이참과 멸진으로써 된 정견을 수습하여 장차 편안한 심경으로 바귀어 간다. 또한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수습하여 그것이 점점 편안한 심경으로 바뀌어간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하여 비구는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을 익히고 닦아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을 열심히 수습하면 열반을 향하고 열반에 기울어지며 열반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말씀되어 있는 다섯 대하는 모두가 중인도를 흘러내려가 하나로 모여 항하가 되고 마침내는 뱅갈만에서 바다로 부어지는데 세존은 종종 이들 여러 대하를 비유로하여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던 것인데 여기에서는 저 성스러운 여덟가지 도를 열심히 수습하는 비우들은 이윽고 저 여러 대하가 모두 바다로 부어지는 것같이 반드시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비구들이 청정행을 닦는 까닭은 모두가 한결같이 열반에 이르기 위함이며 열반이야말로 그 목표이고 그 종극인 까닭이다. 그리고 실천 항목은 여러가지 있는 가운데서 저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을 그중 가장 기본적이며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세존은 다시 또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것들은 원리와 이탐과멸진을 수습하여 이윽고 그것이 편안한 심경으로 바뀌어갈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그것은 약간 용어는 다르지만 마침내는 앞서 라다에게 말씀하신 염리ㅡ이탐ㅡ해탈ㅡ열반의 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어째든 세존의 가르침을 따라 닦는 청정행은 모두 열반을 향하고 열반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것은 없다. 그러면 세존 그 자신은 열반의 경지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4 그러면 이에 대하여도 다시 하나의 경(남전 중부경전, 72, 婆蹉衢多火諭經. 한역, 잡아함경 34, 24, 見)을 들어서 말씀드리기로 한다.

 그것은 예에 따라 세존이 사위성의 기습급고독원에 계실 때의 일이다. 거기에 바차구다라는 외도의 유행자가 찾아와서 세존에게 여러가지를 물었다. 그 부분은 약간 길어지므로 할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나 이윽고 이야기는 해탈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 물음과 대답은 이런 것이다.

 『구담(瞿曇)이시요, 그와같이 해탈한 마음을 가진 비구는 도대체 어느 곳으로 나아가 태어나는 것입니까?』『바차여,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아니하오.』『구담이시여, 그러면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까?』『바차여, 나아가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적당하지 않소.』『그러면 구담이시여, 나아가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않는다는 것입니까?』『바차여, 나아가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부적당하오.』

 여기서 저 외도의 유행자는 비명을 올릴 수 밖에 없게 되어 『저는 이제 무엇이 무언지 알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세존은 저 득의의 반대질문을 시작했다.

 『바차여, 그러면 내가 그대에게 물으리다. 그대가 생각하는대로 대답해 보시요. 바차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오? 만약 그대 앞에 불이 타고 있을 때 그대는 그것을 보고, 네 앞에 불이 타고 있다 라고 알 것이 아니요.』『구담이시여, 만약 제 앞에 불이 타고 있을 때에는 저는, 내 앞에 불이 타고 있다 라고 알 것입니다.』『바차여, 그때 만약 그대에게 이 불은 어째서 타고 있는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물음을 당하고 그대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구담이시여,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이 불은 풀이나 나뭇가지가 있기 때문에 타고 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바차여, 그러면 만약 그대 앞에 그 불이 꺼졌다면 그대는 그것을 보고 내 앞에 불이 꺼졌다 라고 알 것이 아니요.』『구담이시여, 만약 제 앞에 그 불이 꺼지면 저는 내 앞에 불이 꺼졌다 라고 알 것입니다.』『그러면 바차여, 그때 그대에게 그대 앞의 불이 꺼졌는데 그 불은 여기에서 어느 쪽으로 갔는가? 동인가? 서인가? 북인가? 혹은 남인가? 라고 묻는 자가 있다면 바차여, 그대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구담이시여, 그렇게 묻는 것은 부적당합니다 구담이시여, 그 불은 풀이나 나뭇가지가 있기 때문에 탄 것이고 그것이 다 하였으니 다시 풀이나 나뭇가지를 보태지 않으면 탈 재료가 없어서 꺼지는 것입니다.』

바차는 세존에 의해서 멋지게 유도되었다. 여기까지 오니 세존은 깊이 긍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차여, 참으로 그와같이 저색(色ㅡ육체)으로써 사람에게 보이는 자는 그 색은 버려지고 그 뿌리가 끊겼을때 그 사람은 이미 없는 것이고 또한 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바차여, 그때 그 사람은 색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이 도리는 심히 깊고 한량이 없엇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바다와 같으니 나아가 태어난다고 하는 것도 맞지 않고 또한 나아가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바차여, 저 수(受ㅡ감각)에 대해서도 상(표상)에 대해서도 행(의지)에 대해서도 식(의식)에 대해서도 또한 같은 것이다.』

 여기서 세존께서 바차에게 가르치신 바는 필경 이런 것이었다.

 인간에게 고통스럽고 불안한 생활이 있는 것은 필경 갈애(渴愛), 즉 욕망의 도를 넘은 작용에서 오는 것이다. 그 도를 넘은 작용이 없어졌을 때 사람들의 불안하고 괴로운 생활은 없어진다. 그러나 그 변화는 「나아가서 태어난다」라고 할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변화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와같이 말씀하셔서 저 외도의 유행자도 겨우 깨닫고 그 생애를 재가신자로써 부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세존에 의하여 알려진 이 길에 의하여 실현된 인간의 이상적 상태, 즉 열반의 경지가 대단히 구상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더욱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것이 있다. 지금 세존께서 이 비유와 표현으로서 인간의 이상적 상태를 그려냇을 때에도 세존은 결코 이른바 회신멸지 (灰身滅智)의 경지를 말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서 「불이 꺼진」듯이 없어지는 것은 갈애이고 또한 탐욕이고 또한 번뇌이지 인간 그자체는 여기서 「없어졌다가」 다시 어느 곳엔가 「나아가 태어나는」것도 아니다. 그는 여전히 이 지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결코 종전 그대로의 그는 아닌 것이다. 앞서는 불안하고 괴로운 인생을 걸머진 자였던 그는 지금은 갈애. 번뇌를 없애므로 해서 완전히 평안하고 자유스러운 사람으로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한 게송 구절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사문(沙門)은 욕망을 두루 알아 항상 자유인(自由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