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기독교의 조상숭배

2008-01-13     관리자

 조상숭배의 문제를 기독교적으로 조명한다면 거기에는 몇가지 측면이 부각된다.  우선 조상에 관한 성서의 관점인데,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조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가진 상호불가분의 의존적 존재다.  그 다음은 종교일반이 인간적 조상에 대하여 신적인 종교의식을 통하여 예배와 제사를 드려서 받들지만 기독교에서는 인간적 조상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다만 조상이란 하나님의 믿음과 구원의 약속을 그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신앙전통의 전승자에 불가하다.  마지막으로 일반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조상이란 인간의 삶의 역사적 전통을 그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전통의 계승자다.  조상이란 과거를 싣고 현재와 미래로 흘러가는 배와 같은 존재다.  그런점에 인간은 그의 인간적 조상을 귀중하게 여기고는 있지만 결코 신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1.  성서에서 보는 조상

  성서에서 보는 인간의 최초의 조상은 아담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자기와 닮은 존재로서 인간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매우 뛰어난 걸작품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이 인간이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있지않고 자기마음대로 놀았기 때문에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된다.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은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다시 구원해 주기로 약속한다.  구원은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복종하고 따르기로 약속하는 데서 보장된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최초의 조상 아담사이에서 이룩된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순수한 존재 관계의 형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아담 이후의 인간은 누구나 모두 죄로 인하여 타락했다고 보는데, 이러한 죄에서 인류의 후손들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등장시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온갖 엄청난 요구와 뜻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므로써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전형적 인물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외아들을 산채로 잡아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요구를 받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후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었다.  믿음이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보여준 바와 같은 무조건적인 전적 복종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후 아브라함은 신앙의 조상이 됐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그런 신앙이 그후 이삭에게로, 이삭에게서 다시 야곱에게로 전승되므로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독교에서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성서가 말하는 조상이란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믿음의 조상이란 인간을 구원하고 축복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이 그대로 믿고 그것을 그의 후손들에게 전승해준 사람들이다.  이것이 우선 기독교적 조상의 한 측면이다.

    2.  기독교는 조상을 숭배하는가 ?

  기독교는 흔히 유일신을 믿는다고 한다.  그 말은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믿었던 유일한 인격적인 하나님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나님과 비견할만한 신이 없다는 뜻이다.  하물며 인간이 어떤 신처럼 믿어지거나  숭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죄를 짓고 타락한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계명에는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그러므로 종교일반이 흔히 하는 바와 같이 인간적 조상을 마치 신처럼 생각하거나 아니면 귀신처럼 생각하여 그에게 어떤 종교적 형식을 갖추어서 제사를 드리고, 그를 숭배한다는 것은 적어도 기독교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조상이란 숭배의 대상의 아니라, 믿음의 전통안에서 앞서간 하나의 선구자, 그리하여 믿음을 그 후대에 전하여 주는 믿음의 선배 또는 뛰어난 한사람의 선생에 지나지 않는다.  구약의 역사가 가고 그뒤를 이어서 지상에 교회가 창설돼서 그 교회를 통하여 옛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의 전통과 유산을 계승하면서 성도들을 가르친 탁월한 선생들을 우리는 성자(聖者)라고 부른다.  기독교의 역사, 특히 교회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성자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성자들을 숭배한다. 

그러나 그 숭배는 그들이 신앙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것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성자들 중에서 그 누구도 초인간적 조상으로서, 신적 존재로서, 인간의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는 경우는 없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일반에서는, 특히 원시종교에서는 우주만물에 모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고, 인간적 조상도 그러한 견지에서 신적으로 믿어지고 숭배되고 있으나 기독교는 거기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도 부모나 조상을 공경하라는 십계명이 있고 인간적으로 부모를 기리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다.

    3. 조상은 권위의 원천인가 ?

  사화과학적인 눈, 문화사적인 관점으로 보면 조상의 가치는 그것이 권위의 원천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조상의 가치를 유일한 권위의 원천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전통지향적인 보수주의, 형이상학적인 초월주의, 불합리한 비현실주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민족은 그들 나름으로 그들의 조상의 범형(範型)을 존중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상의 문화적 범형이란 바로 그 민족집단의 현재의 삶의 원형과 바탕과 고향과 원천을 이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언제나 주의해야 할 함정이 있다.  모든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원천적이기는 하되, 현재와  미래의 변동된 현실을 실질적으로 포괄할 만큼 개방돼 있지 못한 폐쇄성과 원시성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발전한 문화와 문명사회는 현실과 미래의 꿈을 과거의 조상의 범형에 전통지향적으로 또는 과거지향적으로 통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원시적이고 폐쇄적인 과거를 해체하고 개방하여 현실과 미래에 알맞게 승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모든 자손은 조상에게서 나왔지만, 그러나 자손은 조상을 넘어서서 앞으로 전진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기독교는 조상을 권위의 원천이라고 보지 않고 미래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는 하나님이 모든 역사적 운명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가치지향은 조상의 전통이나  조상의 과거가 아니고 하나님의 해방과 하나님의 미래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언제나 구사하는 언어 형식은 <옛 사람은....라고 했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 라고 말한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조상의 옛것을 혁명적으로 개혁하여 새로운 미래를 쟁취하려는 기독교적 변증법의 기본 성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