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것이 화장세계로다

無 孔 笛

2008-01-13     관리자
 

  * 이 글은 경봉 노사의 설법 요약인데 설법 전부룰 싣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文責 記者)   *

                

                       이 몸 끌고 다니는 놈

      <법좌에 올라 묵연히 있다가 주장자를 세 번 치고>

           

            아침 안개는 새벽 해에 오르고

            비는 청산을 지나가니

            모든 것이 비로자나불이요

            온갖 것이 화장세계로다

           (霞登曉日 兩過靑山 頭頭毘盧  物物華藏)

  法文은 종사(宗師)가 법상에 오르기 전에 다 되었고 대중이 좌에 앉기전에 진리적의로 법문이 다 된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선지(禪旨)를 가지고 참선하는 사람이니까 눈만 끔적하고 손만 들어도 알고 또 그렇게 알아야 되는 것이다.


            칼은 불평 때문에 보갑에서 나오고

            약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금병에서 나온다.

           (鈐爲不平離寶匣  藥因救病出金甁)


  이제 우리가 일상생활에 다 있는 것을 모르니까 말하는 것이지 말하는 것도 허물이 적지 않다.

  지금 우리가 법문을 듣고 수행하는 것이 모두 참된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본래 십세 미만때에는 참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차차 자라면서 욕심이 생기고 애착이 생겨서 그 참된 마음을 변하게 한다.

  청산이 항상 푸르게 보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 청산을 볼 때 매일 보면 청산도 빛이 변한다.

  바닷물도 푸르지만 화가가 자주보면 바닷물 빛이 변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변하지 않는 물건이 변하게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이 마음, 즉 진심이라는 이것도 역시 병통이다.

  참된 마음이 있고 나쁜 마음이 있을 수 있나?

  말을 하려하니 진심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니 이 자리가 본래 일체 이름과 명사가 다 떨어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 자리를 가지고 망상(妄想) . 분별 . 탐진치(貪瞋痴) . 삼독(三毒)과 팔만사천 진뢰심(塵惱心)이 꼭 차서 본래 청정한 그 마음을 물에 거품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일으킨다.

  우리가 법문을 듣고 수행하는 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진심(嗔心) 자리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이 몸을 끌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마음이다. 마음이 어떤 것이냐? 모른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하지만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이 자리는 마음도 아니요, 부처자리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음을 진심이라고 하며 그 참된 마음을 진령감(眞靈鑑)이라고 하는데 참되고 신령하기 그지없는 거울과 같다는 말이다.

  보살계경(菩薩戒經)에는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것을 심지(心地)라고 한다. 즉 마음의 땅이다. 또 만선(萬善)이라고 하는데 오만 착한 것을 심지(心地)에서 발생시킨다고 한다. 능엄경(능嚴經)에는 차심(此心)을 발명이라, 이 마음을 발명한다 하고 이 마음은 곧 진심(眞心)망상(妄想) 없는 그 마음이고 반야경(般若經)에는 보리(菩리)라고 하는데 깨닫는 것을 더불어서 당체(當體)가 되었다고 한다. 화엄경(華嚴經)에는 이 자리를 일법계(一法界)라 하였는데 모든 것을 사무치고 원륭히 섭한다고 하였다.

  여여진상(如如眞相)이여 여여(如如)하여 항상 참되고 변치 아니한다고 했다.

  또 열반경(涅槃經)에는 불성(佛性)이라 하였다.

  그래서 법신(法身) . 보신(報身) . 화신(化身) . 삼신(三身)의 근본체라고 했다.

  원각경에는 총지(總持)라, 모든 것을 다 가져서 숨기고 덮으며 함(含)하고 섭(攝)한 까닭이다.

  또 승만경(勝曼經)에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십호(十號)인 여래응공(如來應供) . 정변지(正徧知) 명행족(明行足) .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 무상사(無上士) . 조어장부(調御丈夫) . 천인사(天人師) . 불(佛) . 세존(世尊) 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요의경(了義經)에는 원각(圓覺)이라 하였는데 즉 뚜렷이 깨쳐서 그 어두운 것을 파하여 홀로 비춘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각이라고 하였다.

  소소 영영한 무분별 경지

  조사문하(祖師門下)에 들어오면 모든 이름과 말을 두절해서 한 이름도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이름을 말하리요. 중생의 기틀을 따라서 설법한다.

  어떤 때는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자리를 자기라고 하고 중생의 본성(本性)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보면 이 몸을 자기라고 하지만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따져봐도 이것은 부모 물건이다.

  나라는 이 몸을 끌고 다니는 것은 일체 명사가 다 떨어졌다. 어떤때는 묘심이라 묘한 마음이 허하고 영영하여 항상 적적이 비추는 까닭이다.

  어떤 때는 주인옹(主人翁)이라 내 몸을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것이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주인공을 혹 주인첨지라고도 한다.

  어떤 때는 무저발(無底鉢), 밑이 없는 발우라고 하는데 밑이 있어야 하는 발우가 밑이 없다고 하였다. 어떤 때는 몰현금(沒絃琴)이라 거문고가 줄이 없는 거문고라 운출금시(韻出今時) 모든 음성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소리를 하는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 소리는 줄이 있느냐? 띵뗑뗑하면서 거문고를 타도 거문고라 하지만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줄도 없는 이것을 몰현금(沒絃琴)이라 하는 것이다.

  이때 아리랑 고개가 어디냐고 물어본다. 물으면 어떤 사람은 서울 미아리 고개라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입안 목이 아리랑 고개다.

  입에서 좋은 음식을 먹을 때 이것은 달다 쓰다 짜다 싱겁다 담담하다고 음식맛을 말하지만 이 맛이 목으로 넘어가면 짠것도 없고 매운 것, 신것, 단것, 거친 것이 입 안에 있을 때 분별하는 것이지 일체 좋고 나쁜 것이 있을 수 있느냐.

  이 고개만 넘어가면 모른다.

  음식맛을 분별하는 입안에서는 피가 되고 살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예술, 철학, 종교가 무분별(無分別)의 경지에 도발해야 글씨나 그림 한 장이라도 가치가 있고 참 뜻이 있으며, 또한 사농공상(士農工商)에는 그 아리랑 고개를 넘어야 무엇이든지 성공하는 법이다. 여러분은 법문을 많이 듣고 수행을 하여 걱정이 없을 것이다

 

  만물에 초탈하는 정신

  이 세상엔 걱정이 없는 사람이 없다.

  의식주(衣食住) 삼건사(三件事)에 활동(活動)하는데 걱정이 없을 순 없지만 먹고 입고 살림살이하는 그 물질(物質)과 사람에 초탈(超脫)하는 정신을 하나 가지고 살아야 된다. 저 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지만 다른 별은 다 움직이는데 정반성(定盤星)이라는 하늘 중심에 있는 별만은 움직이지 않는다.

  천기를 보는 사람이 정반성을 기준으로 춘하추동 사시절을 가리고 시간도 본다.

  우리가 사농공상의 각기 다른 위치에서 살아 가는데 명랑하고 쾌활하고 용기가 있고 투쟁력도 있고 과단성도 있어야지 콩죽에 물 탄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아무 일도 안된다. 이 법문을 듣는 것은 내 정신을 명랑하고 쾌활하고 용기를 갖고 내 말 한마디 하면 은행 보증수표와 같이 변동이 없어야 되며 신용과 시간을 내 생명과 같이 생각하며 법문을 듣고는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어떤 친구가 보검(寶劍) 두 자루를 만들어 가지고 사용하라고 주었다.

  한 사람은 국가에 큰 난리가 있을 때 사용하였지만 또 한사람은 개잡고 소잡는 그러한 곳에 사용하였으니 보검의 값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지혜, 칼날이란 것도 큰 보검이다.

  그러니 보검을 만드는데 천번 만번 두드리고 다듬어서 쇠똥이 다빠지고 쇠의 정수만 남아야 보검이 된다.

  이렇게 좋은 지혜 칼날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지만 컴컴하게 가지고 사용을 잘못하여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려는 것이 있기 때문에 문화민족이 못되고 고난을 겪는다.

  어떤 때는 정안감(正眼鑑)이라 그 바른 눈을 가지고 거울같이 비춘다.

  마음 밝히는 공부

  항상 이야기 하지만 바를 정자(正字)를 얼굴에 가지고 다니면서 마음 쓰는 것은 언제나 삐뚤어지게 쓰고 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 중 불교를 모르고 못믿고 도(道)를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삐뚤어지게 사용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무진등(無盡燈)이라하여 다함이 없는 등잔, 무진 등으로 광명을 빛내는 등잔이니 하는 마음 자리를 그렇게 부른다. 조파미정(照破迷情)이라 그 무진등을 가지고 속이컴컴한 그곳을 비추어 밝혀준다. 어떤 때는 취모검(吹毛검)이라 하는데 취모건이라는 것은 보배칼로써 공중에 털이 칼에만 부딪치면 털이 끊어진다. 그 칼 이름을 취모검이라 한다. 그래서 모든 진뢰(塵惱)의 뿌리를 끊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를 이우(泥牛)라고도 하며 선문(禪門)에 는 진흙을 가지고 만든 진흙소 라고도 하며 또 이 자리를 목마(木馬)라고도 한다. 또 이 자리를 심인(心因)이라 하고 또 이 자리를 심경(心鏡), 마음의 거울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종종 그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갖추어 기록할 수 없다.

  중생이 이 진심 자리를 매각(昧却)했다. 이 법문을 듣고 수행하는 것은 본래 밝은 이 자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정을 이루어 놓으면 아니할 걱정도 자꾸 생긴다.

  우리 불교 믿는 사람은 참된 마음을 쓰면 어둠이 없어지고 밝아진다. 공부를 하면 생각이 밝지 못하고 왜 어두워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말하기를 「날이 밝아지려면 조금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고 하였다.

 「하지만 열심히 하여라.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배를 타고 동으로 동으로 가면 떠난 그 자리에 다시 돌아온다. 무슨 실패를 당하고 걱정이 있어 얼굴에 근심이 가득찬 사람이 오면 그러한 사람에게 글귀를 하나 말해준다.


            낙엽이라도 아주 활기로워서

            하늘에 가득한 바람과 비에 훨훨 나른다.

            (落葉方能生活氣 滿天風雨碧空飛)

  그러니 낙엽이 땅에 떨어지면 사람도, 개도, 소도 밟고 온갖 짐승들이 밟는다. 그 무슨 가치가 있느냐? 그래도 하늘에 찬 바람과 비로 인하여 바람과 비를 따라 허공에 훨훨 나른다.

  만물중에 가장 슬기로운 사람이 좀 실패를 당했다 하여 근심에 잠겨 있어서야 되겠는가? 다시 자신을  가다듬고 힘을 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고함을 친다.

  그리고 보면 그 사람이 죽는 기색으로 있다가 곧 용기를 얻고 활기를 내어서 간다.

  내가 항상 법문끝에 말하지만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요 금일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이 이름이 설법이로다」 하는데 다만 이름 뿐이지 설법이 어디있고 실상이 어디있나, 법이 집에도 있듯이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요 라는 말을 하여 주어도 다 모른다. 음식도 거칠고 먹기 어려운 것은 입안에 넣어서 한참 우물거리며 씹어보면 무엇인가 다른 맛이 하나 나오듯이 모르는 것을 계속 마음가운데 생각하고 생각하면 무엇인가 큰 것이 하나 터져 나온다.

  이제 문자도 아니고 말도 아닌 법문이 하나 있는데 잘들어 보아라

  <할(할)  일할(一할)하고 법좌에 내려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