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문] 바른 생각에 필요한 靜寂의 水準 / 서정주

자하문

2008-01-13     서정주

바위 옆을 달려 지나가는 개가 과연 그 바위를 잘 알아서 그 바위를 두고 빈틈없이 바로 생각해낼 수 있을까? 아니다 그 바위를 두고 빈틈없이 잘 알아 생각하자면 그 바위 옆을 달려서 지나치는 개같이 냉큼 바쁘게 수선스러이 지나쳐 버려서는 되지 않는다. 무슨 핑게를 내세워도 그러고서는 그건 되지 않는 것이다.

 바위를 잘 알아서 바로 생각하자면 먼저 차분하게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바위를 여러모로 자세히 또 깊이 살펴야만 한다.

 신라 땅에 혜현(惠現)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세상이 시끄럽고 어수선하여 생각이 바로 잘 되지를 안해서, 절간에가 중노릇이나 하면 그게 잘 될까 싶어 중이 되었다.

 그렇지만 중이 되었다고 해도 제가 제마음을 잘 가중크려 가지지 못한다면 시끄럽고 어수선한 것은 역시나 있다. 혜현은 재주도 있는 사람이라 불경은 잘 배워서 그 교수(敎授)까지도 되긴 되었지만, 마음을 바닥까지 조용히 가중크려 가지기에는 여기도 적합치 못한것만 같아 또 마음을 썩히다가 마침내는 더 깊은 山골의 동굴로 들어가서 혼자만 덩그랗게 앉아 참선에 들고 말았다.

 굶주림이 많은 호랑이 한마리가 굴 밖에서 혜현을 먹어볼 생각으로 가끔 몰래 들여다보고는 했으나, 어디 이빨 대볼 빈틈하나 없이 혜현의 목숨은 너무나 튼튼하여서, 호랑이도 감히 그를 허물어뜨릴 수는 없이 느꼈다.

 그러다가 혜현의 명수(命數)가 다해 숨을 거두고 형혜(形骸)만이 남은 날 비로소 호랑이는 여기 덤비어 시신을 먹기 시작했는데, 으드득 와삭와삭 다먹어 치우고 마지막 두개골(頭蓋骨)안창의 혓바닥만은 이빨이 안닿아 놓아두었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게 꼭 고약(膏藥)처럼 꾸들꾸들 마르다가 나중엔 홍옥같이 굳어져서 빛을 발산하는데, 그게 그 수다만 떨고 넓죽 얄팍 허트루 지꺼리다가 만 세상의 그 너절한 혓바닥하고는 달라, 그 짙게 붉은 빛이 하늘을 쏘더라나.

 내가 무엇하러 고려의 一然스님이 하신 이 이야기를 여기 다시 옮겨 되풀이 하고 있느냐 하면, 그 때나 지금이나 또 뒷날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무얼 두고 차분히 바른 생각을 해내자면 그 고요하고 차분함의 한 수준이라는 것은 지탱되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것만은 지금도 그래야 하고 또 영원히 그래야 할 것이지만 가령 한마리의 고래가 바다에 떠서 유유히 그 헤엄을 이어 쳐 가자면 그 고래가 뜰만큼한 바다의 깊이가 필요하듯이 우리들의 충분히 깊은 느낌이나 깊은 생각에 필요한 것도 무엇보다 먼저 거기 적당히 필요한 고요함과 차분함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미당 서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