婬欲의 종교적 醇化

빛을 행하는 길

2008-01-13     관리자

「빛을 행하는길」의 주제(主題)로 대승 경전의 여러가지 보살행(菩薩行)이 구체적으로 제시 되어 왔다.오늘은 그러한 대승 경전보다도 더 원초적인 아함경(阿含經)을 배경으로 부각된  어느 남녀 수도승의 청순한 사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함에는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이라는 점에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낄수가 있다. 대승 경전의 부처님은  일체의 차별 망상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리의 몸으로 등장하고 제자들 또한 빈틈없는 보살 마하살이 주가 되고 있다. 그러나 아함의 부처님은 따뜻한 인간의 스승이며, 그의 제자들 또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번뇌로운 수도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때로는 가르침을 의심하고 때로는 애욕에 번민하는 냥이 우리들 법부와 통하는 바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아함의 인물중에서 남달리 인정이 많은 이는 아난(阿難)이다. 부처님의 상수시자(常隨侍者)로 뽑혔을 때 그는 세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부처님께서 법복(法服)을 그에게 빨게하시지 말것, 공양 받으신 음식물을 베풀어 주시지 말것, 그리고 향실(香室)에 함께 있도록 하시지 말것. 이것은 자기 혼자만이 너무나도 많은 은총을 입게될까 저허로운 마음에서 였던 것이다.

 부처님을 양욕해 준 마하파자아파티(大愛道夫人)가 출가를 바랬을 때 부처님은 여인의 출가를 극력 말리셨다. 여인이 출가하면 불법의 수명이 五00년은 감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먼 길을 맨발로 따르면서 출가를 구하는 그녀의 애틋한 심정을 보다 못해 부처님께 청하여 마침내 출가를 허락받게 한 것도 아난이었다.

 그는 부처님의 교설을 전부 기억하여 후세에 전해준 분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그를「다문(多聞)제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도 아라한(阿羅漢)도 되지 못할 정도로 도(道)에는 약한 분이었다. 이것은 이따끔 교학의 약점을 드러내는 예(例)로 지적되고 있지만, 그만큼 그는 인정(人精)이 많았던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실로「인정제일」이라고 할만 하다.

 그러한 사람이 오늘 날 우리 주변에 있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를 따르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가 사업을 하면 함께 사업을 하고 그가 출가하면 함께 출가하고 싶을 정도로. 그이라면 내모든 괴로움도 털어 놓을 수가 있을 것같고, 또 그것을 이해해 줄수가 있을 것 같다. 아난의 따뜻한 인간미를 이곳저곳에서 맛볼수 있는 것이 아함을 읽는 크다란 즐거움의 하나가 되고 있다.

부처님도 열반에 임하셨을 때, 멀리 숨어서 통곡하고 있는 아난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내가 조금만 눈을 들어도 아난은 곧 그것을 살펴 내가 생각하는 것을 가져다 주었다. 전륜성왕(轉輪聖王)에게 네가지 부사의(不思議)가 있듯이 아난에게도 네가지 부사의가 있다. 그가 말없이 비구 속에 들어가면, 모두가 그의 존재를 기뻐하고, 그가 설법하면 다시 기뻐하고, 그의 모습을 보거나 설법을 듣는 것에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가 비구니 · 우바세 · 우바이 속에 있을 때도 또한 그러하나니, 이것이 아난이 갖는 네가지 부사의이니라.』

 二천년이 넘은 오늘에도 아난에 대한 생각은 이렇게 연연(戀戀)하다. 하물며 그 당시에는 어떠했을까. 아무리 출가한 몸이라고 해도, 번뇌를 다하지 못한 이성(異性)의 눈에 그는 어떻게 비치고 있었을까. 아난에 대한 연정(戀 情)으로 병이 난 한 니승(尼僧)이 아함에 그려져 있다.

 대승 경전의 능엄경{능嚴經}에서는 아난은 마등가(摩登伽)라는 한 음녀(婬女)의 주술(呪術)에 빠져 하마터면 계체(戒體)를 헐뻔한다. 그와 마등가녀가 제도되는 것은 부처님의 칙명을 받든 문수(文殊)보살의 주력(呪力)에 의해서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 살펴보는 아함, 좀 더구체적으로 말하면 잡아함(雜阿含) 권二十一(高麗大藏經十八 , 九一三)에서는 그녀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한 비구니」(異比丘尼)라고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아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온 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 뜨거운 사랑의 불길을 이제는 더 이상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난에게 사랑의 고백도 할 수없는 딱한 처지임은 물론이다. 가련한 그녀는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끝으로 한가지 소원은 아난더러 자기의 병고를 한번 와서 보아 달라는 것이었다. 다정한 아난이 그것을 거절할 리가 없다.

 그러나 아난이 그녀의 처소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어떠한 상태로 있었을까. 그녀는 발가벗은 몸으로 와상(臥床)에 누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들의 경전은 당시의 그녀의 상태를 이런 모습으로 기술해 주고 있다.

 이러한 경우를 당한 아난은 어떠한 행동을 하였을까. 그 수수께끼를 경전에서 읽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잠시 그런 처지에 우리 스스로가 놓였을 때 어떻게 하였을까 하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필요가 있다. 그럴경우, 여러가지 길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그냥 돌아서서 와버리는 길이요, 둘째는 그녀를 호되게 나무라는 길일 것이다.

 셋째는 그녀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이다. 아닌게 아니라 대승 능엄경{능嚴經}에서 아난은 마등가(摩登伽)의 주술에 빠지고 만다. 더구나「발가벗은 몸으로 누어 있었다」는 경전의 서술을「애틋한 사랑의 하소연」에 대한 경전적(經典的) 기술이라고 해석한다면 어떨까. 그럴 경우, 인정 많은 사람일수록 유혹에 빠질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이세가지 가능성 속에서 만일 첫째 방법이나 둘째 방법을 택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말할 필요도 없이 가련한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부끄럼과 원망때문에 영영 건질 수 없는 타락의 길에 빠지거나, 아니면 자신을 파멸시키고 말것이다. 그렇다고 셋째 길을 택할 수도 없다. 만일 그 길을 택한다면 두 사람은 다같이 종교적 타락자가 되어 양심의 가책을 영원히 씻을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빛을 행하는 길」은 이럴 때 어떻게 행하는 것일까. 두 사람이 다같이 광명으로 인도되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는 다시 경전에 되돌아가, 우리의「아난」은 그때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를 보자. 그는 모든 감관을 수습한 다음, 그녀에게 등을 향한체 말없이 서있었다 한다. 그러자 그녀는 비로소 옷을 입고 그를 맞이하여 설법을 청했다고 경전은 설해 주고 있다.

 알고보니「별것 아닌일」 로 해서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순간에서 함께 소생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감관을 수습했다는 아난의 말에서 그의 심적 갈등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고 말없이 서서 기다린 그의 행동에서 그의 인간에(人間愛)가 어떠했던가를 엿볼 수가 있다. 위대한 종교적 슬기와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조그마한」일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불교가 종교로서 지니는 진정한 의의는 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조그마한 일」을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하게끔 해주는 곳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