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存在와 涅槃의 意味

특집 . 열반이란 무엇인가

2008-01-13     관리자

     1 存在의 成屬的 構造 

 존재란 생존의 모습이다. 세계내의 삶의 모습을 불교는 六道로 말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지옥이다. 지옥이란 사면이 빈틈없이 막혀 빠져 나갈 수 없는 고통만을 받고 잇는 죄인의 경지를 말하고, 아귀(餓鬼)란 간탐(慳貪)과 질투 많은 중생이 떨어지는 경지로 항상 굶주림에 허덕이는 생존형태를 말하며, 축생(畜生)은 성질이 무지하여 식욕. 음욕망이 강하고 옳게 사는 길을 모르고 본능에만 의존해서 살며, 생명의 가치를 모르고 약육강식하는 생존의 양식을 말한다. 아수라(阿修羅)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을 의미한다. 인간은 어디에 속하고 있는가? 아수라와 天과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天이란 Deva로서 광명. 자연. 청정. 자재 최승(最勝)을 의미하며 인간세계보다 수승한 과보를 받는 좋은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인간세계란 天의 세계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으나 과거에 오계를 면았고 중품(中品)과 10선(善)의 인(因)을 닦은 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말한다.

 인간이란 六道중에 五道에 있으며 天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존재의 형태적 구별로서의 인간의 위치를 말한다. 그러나 본래 인간의 모습은 그 자체가 지옥에서부터 天의 세계를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자신이 그의 마음이 완전히 막혀 빠져 나갈 길이 없이 고통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지옥인 것이요. 또한 항상 탐욕심에 허덕이면 그것이 곧 아귀의 생활인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자각치 못하고 본능에만 의존하여 살아 간다면 그것은 곧 축생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요, 싸우기만 좋아하고 자비와 보살심이 없다면 그것은 아수라와 무엇이 다르랴? 그러나 언제나 十善을 닦고 자기 마음을 비(空)게 하고 청정한 세계에 도달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인간의 본래적인 자성청정(自性淸淨)을 선언하고 자각하고 있음을 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계층적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본래부터 이러한 존재의 양태가 형성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의 이러한 생존의 모습은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위에서 건립된 객관적 세계인 것이다. 한 생각이 바뀌면 이러한 존재의 모습도 바뀌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본래부터 人間은 극복되어 있을 뿐이다. 일체의 존재 양태가 자유로써 극복되어 있다. 단지 극복되어 있는 자기를 자각치 못하고 있다. 자각치 못할 때 존재의 모습은 수없이 많은 갈래로 나뉘어지게 마련이다. 

     2 부처님과 부처성품과 人間

 부처님과 부처성품과 차별이 없고 모든 인간은 부처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부처님과 차별이 없다. 이미 인간은 부처님과 차별이 없음을 보았다. 본래부터 중생과 부처님과 차별이 없다면 도를 닦아 무엇 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하는 새로운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부처님과 부처 성품이 비록 차별이 없으나 모든 중생들이 모두 구족하지 못하였느니라……모든 중생이 결정코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를 얻을 것이므로 내가 말하기를 온갖 중생이 모두 부처성품이 있다 하였으나 모든 중생이 참으로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갖추지 못하였나니라……모든 중생이 지금 번뇌의 속박속에 있으므로 현재의 32상, 80종호가 없으며 모든 중생이 지나간 세상에 번뇌를 끊은 일이 있었으므로 현재의 부처 성품을 보게 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인간이지만 단지 하나의 차이 때문에 부처가 되는 도를 닦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번뇌와 망념이다. 인간과 부처의 차이가 본래 없지만 이것만이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부처 성품인가? 부처 성품은 제일의 공(第一義空)이요, 제일의공은 지혜를 말한다. 부처 성품은 반야이다.

 「공이라 말하는 것은 공한 것이나 공하지 아니한 것을 보지 않는 것이요, 지혜라 함은 공한 것이나 공하지 아니한 것이라. 항상한 것이나 무상한 것과 괴로운 것과 즐거운 것과 나(我)인 것이나 나가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다. 공이란 것은 온갖 생사요, 공하지 않다는 것은 대열반이며 내지 나가 없는 것은 생사요, 나라는 것은 대열반이다. 온갖 공한 것만 보고 공하지 않은 것을 보지못하는 것은 중도(中道)라 이름할 수 없으며 내지 온갖 나가 없는 것만 보고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을 중도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중도란 부처 성품이다. 부처 성품은 이런 뜻에서 항상하고 변하지 아니한다. 단지 중생들의 무명(無明)에 쌓여 보지 못할 뿐이다」

 부처 성품은 열반이다. 부처성품은 무상무왕(無相無往)이다. 부처성품은 공도 아니요, 공아닌 것도 아니요 공인 것도 아니라는 그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나 특징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라 말할 수도 없고 그것은 일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습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먼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나에게 있다. 나의 주체적 체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이 주체적 체험이란 다름이 아니라 조금도 의심없이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곧 부처성품이라는것은 내가 곧 부처라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재현을 통하여 얻어지는 부처인데 여기에 틈이 있다면 그것은 재현의 순수성이 결여되기 때문에 부처는 아닌 것이요, 중생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본래부터 조금도 차별이 없는 부처이지만 단지 번뇌가 있어 중생임을 알고 이 번뇌가 본래 없는 것을 알았을 때 열반인 것이다. 불성이 곧 열반이다.

     3佛性卽涅槃

 부처성품은 곧 열반이다. 이 말은 너무나도 엄청난 말이다. 부처성품은 이미 번뇌가 일어 나지는 않기 때문에 끊을래야 끊을 것도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이미 부처이다. 부처가 되지 못함은 인간을 번뇌의 쇠사슬에 얽혀 있다고 보는데서 이미 인간은 넘을 수 없는 자기 스스로의 결박과 구속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본래 번뇌가 없다. 번뇌가 있다는 그 생각이 곧 번뇌를 만들어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은 대해탈(大解脫), 대자유(大自由)이다. 대해탈이란 번뇌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대자유라함은 한 생각의 우물 속에서 나(出)와 자재(自在)함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대자유, 대해탈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곳에 곧 열반이 있다. 이미 말로써 표현하면 그것은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그곳이 열반이다. 일어나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고 머무는 바가 없을 때, 그 때가 곧 열반이다.

 불교에 있어서 열반사상은 곧 인간존재를 유한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한존재로 보고 있으며 대립과 갈등의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통일과 조화의 존재로, 객체적 존재로가 아니라 인연의 존재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제한성과 고정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유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중생은 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였으며 곧 열반이요, 진리 자체인 것이다. 이 몸 자체가 진리의 주체요, 이 마음이 곧 진리요, 열반 바로 그것이다. 열반이 시간적으로 내세(來世)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자체인 것이다.

     4 涅槃은 집이다

 열반은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이다 언제나 있으며 언제나 즐거움이며 언제나 나이고 언제나 깨끗한 것이다. 이것은 본래가 그리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내가 곧 열반이라 할 때 나는 본래 이러한 것이었는데 내가 한 생각을 일으켜 나는 상이 아니요, 락이 아니요, 아가 아니요, 정이 아니라 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상. 락. 아. 정은 편벽되고 고립되고 오염된 그런 것이 아니라 본래 그런 것이기에 조금도 차별이 없이 그대로 들어 내어 지는 것이다. 열반은 곧 내가 그렇게 되어 그 생각을 쓰고 사는 것이다.

 부처 성품은 곧 상. 락. 아. 정이요, 이것은 일념(一念)위에 세워져 있다. 일념이 무너지면 부처 성품도 열반도 있을 곳이 없다. 그러기에 열반은 수능엄삼매(首능嚴三昧)요,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요, 금강삼매(金剛三昧)요,  사자후삼매(獅子吼三昧)요, 곧 불성인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열반은 집이다. 왜 집인가? 번뇌라는 비 바람을 막는 까닭이다. 일념에 생명이 없음으로 거기에는 번뇌가 들어 올틈도 없는 것이다.

 또 열반은 귀의처이다. 왜냐 하면 능히 공포를 없애는 까닭이다. 열반은 일체의 생각이 쉬고 있으며, 망상과 번뇌의 아수라가 그대로 조화와 평화를 누리고 있음으로 공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상(相)이든 상에 머물면 그것은 열반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상이라는 상도 열반은 아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무상이기 때문에 자유자재인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우리는 열반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물질의 존재를 실재로 보고 그 실재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찾는다든가 또는 자기라는 자의식의 집을 짓고 독단과 아집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모습, 이런 것은 모두가 지옥. 아귀. 축생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상에 머물고 있는 한 끊임없이 번뇌가 생멸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차안(此岸)의 그러한 세계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자아의 주인이 숨쉬고 있는 곳이 있음을 보아야 한다. 소리로서 소리를 막는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마음으로서 마음의 생멸을 막아야 한다. 이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곧 불성이요, 열반임을 확인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