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空思想

般若心經에 대하여

2008-01-12     관리자
  1. 공은 공이다
  가령 거리를 산보하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찻잔을 발견하였다고 하자. 나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몇 분 동안 지켜 보다가 마침내 이 찻잔은 옛날의 명기(名器)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그 작자를 생각해 보거나 나중에는 어떻게든지 그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마음 먹게 된다. 그래서 전 재산을 털어 넣어 그것을 샀다고 하자. 그러나 얼마 있다가 그와는 다른 증거가 나타나서 그 찻잔은 금전적으로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하자. 나는 물론 낙담해서 자살할 마음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다시 마음의 정상을 회복할 수 있다면 나는 하나의 진리를 깨닫고, 또한 그 진리는 인간에게 있어 구극적인 진상(眞相)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찻잔이 명작이라고 판단한 것은 나의 환상이다. 그것이 모조품으로서 명작이 아니라고 안 것도 내편의 또 하나의 환상이다. 진상은 명작도 아니고, 모조품도 아닌 하나의 찻잔이고 그것은 언제나 그 아름다운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찻잔은 자신을 명작이라고도, 모작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명작이다」「모작이다」라는 분별은 내가 한 것이고, 찻잔이 관여한 것은 아니다. 명작이던 아니던 그 유(有) 또는 무(無)라 하는 것은 사람의 분별이고 찻잔은 그 유, 무가 공(空)한 것이다.
2. 천녀와 사리불
  나는 공을 생각할 때 유마경에 나오는 천녀를 생각한다. 유마경은 반야경 이상으로 반야경적이다. 그 일부를 다음에 소개한다.
  그 집에는 한 천녀가 있었다. 이들 보살마하살의 설법을 듣고 기쁘고 만족하여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는 자기 몸을 나타내서 하늘의 꽃을 이들 대보살과 대비구들 위에 활활 뿌렸다. 그랬더니 보살의 몸에 떨어진 꽃은 땅에 떨어졌지만 대성문 비구들 몸에 떨어진 꽃은 들어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대성문들은 신통력으로 그 꽃을 흔들어 떨어뜨리고자 하였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천녀가 사리불장노에게 말하였다. 『대덕이여, 이 꽃을 왜 떨어뜨리려고 합니까?』대답하기를 『천녀여, 이런 꽃을 몸에 붙이고 있다는 것은 출가인으로서 마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녀가 말하였다. 『대덕이여, 이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요. 이 꽃은 법다운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꽃은 어떤 생각을 한다든가 분별하지 않는데 사리불장노가 생각하고 분별하시기 때문입니다. 대덕이여, 출가 수행인으로서 부처님의 법과 율 가운데 있으면서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법답지 않은 것입니다. 장노는 생각하고 분별하고 계시지만 생각하고 분별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대덕이여, 보십시요. 생각이나 분별을 여의고 있기 때문에 저들 대보살들의 몸에는 꽃이 붙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공포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틈을 이용하여 악마가 들어올 것입니다. 그와 같이 생사윤회의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는 형상·소리·향기·맛·촉감 등이 그 사이에 붙어 들어오게 됩니다. 만약 이 세간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번뇌와 두려움을 떠난 사람이라면 그에게 형상이나 소리·향기·맛에 부딪히는 五욕 따위가 어찌하겠습니까? 애착으로 습관되어 온 것을 아직 끊지 않은 사람에게는 꽃이 들어붙지만 그것을 끄는 사람에게는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보살들에게는 꽃이 붙지 않는 것입니다』………사리불이 물었다
『천녀여, 애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해탈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까?』 천녀가 대답하였다. 『애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떠나서 해탈한다고 하는 것은 만심(慢心)이 있는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만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애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본성이 그대로 해탈입니다.』(유마경 제六장)
  꽃으로 몸을 치장한다는 것은 출가한 사람에게는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 사리불은, 「세속성」이라는 그 자신의 분별을 꽃 위에 붙이고 있는 것이다.
  꽃으로서는 귀찮은 일이다. 꽃은 법다운 것으로서 세속성이라든가, 세속성을 넘어섰다고 하는 본성을 갖고 있지 않은 공한 것이다. 꽃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리불의 고뇌는 꽃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실로는 사리불 자신의 분별에서 나온 것이다. 만심(慢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분별한 것을 자연 그대로 있는 사물에 붙여서, 그것을 세속과 성(聖), 번뇌와 열반, 생사와 해탈 등 어떤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애욕이라던가 성냄이라던가 어리석음이라는 분별도 또한 같다. 본래 성냄도 아니고, 자비도 아니다, 어리석음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다. 그 어떤 것도 다 여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요긴한 것이다 라고 천녀는 말한다.
  3. 심경의 空
  반야심경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사리불이여,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실체가 없다는 특성이 있다. 난것도 없고 없어진다는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고, 더러운 것을 여읜 것도 없고, 줄 것도 없고, 는다는 것도 없다.
  그 까닭에 사리불이여,
  실체가 없다는 입장에서는 물질적 현상도 없고, 감각도 없고, 표상도 없고, 의지도 없고, 지식도 없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마음도 없다.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부딪치는 대상도 없고, 마음의 대상도 없다. 눈의 영역에서 의식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없는 것이다.
  깨달음도 없고 미혹도 없고 깨달음이 없어지는 것도 없고 미혹이 없어지는 것도 없다. 이렇게 되어 마침내 늙음도 죽음도 없고, 늙음과 죽음이 없어지는 것도 없다는데 이르는 것이다.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을 없이 한 것도, 없고 괴로움을 없이 하는 길도 없다.
  알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그 까닭에 얻는다 하는 것도 없으므로 모든 구도자는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 마음이 덮인 바 없이 머물러 있다. 마음을 덮은 것이 없으므로 두려움이없고 휘둘린 마음을 멀리 여의어 영원한 평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여기에서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십이연기(十二緣起), 사제(四諦)라는 불교철학·수도의 기본적 범주를 모두 부정해 버린다. 범주란 현상의 세계를 몇 개의 요소로 구별 분별하여 그 낱낱 요소에 실체성을 붙이는 조작이다. 진리를 말하려면 개념·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범주가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부득이한 방편임을 잊고 범주를 실체화하거나 범주를 실재시할 때는 그 사람은 진리에서 사뭇 멀리 떠나가 버린다. 심경은 이것을 여기서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생겨났다」는 개념을 부정하면 사람들은 「없어졌다」는 개념을 긍정하려고 한다. 「더럽다」라는 규정을 부정하면 「깨끗하다」를 긍정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유(思惟)와 언어의 숙명이다. 그러나 심경은 그 사유와 언어의 숙명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 숙명을 이탈하지 않는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경은 모든 것은 생도 멸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늠도 줌도 없다고 하여 대립하는 두 개념을 모두 부정하여 인간의 사유의 원리를 파괴해 버린다. 모든 것의 진상은 개념이나 말로서 규정될 수 없으며, 인간의 분별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심경의 역설은 인간 사유의 파괴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대개 자기의 말이나 사유가 거부되었을때는 방황하고 두려워 한다. 그 두려워하고 의심하느 것은 유마경에 나타난 사리불의 두려움과 같은 것이다. 사리불은 자기가 출가인이고 재가인과는 다르다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있다. 세속인과는 구별된 성자의 실체성에 들어붙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의 상징인 꽃이 성자인 자기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에 당황하는 것이다. 그리고 꽃은 법다운 것이라는 천녀의 말에 성자로서 자기의 본성이 부정되었다 생각하고 두려워 한다. 그러나 유마경이 심경이나 반야경 일반이 가르치고 있는 공의 진리에는 성인의 실체가 없다할 뿐만 아니라 속인의 실체도 없다고 하고 있다. 성과 속을 구별하는 사유분별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에 성도 속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이라 하는 것인데, 공을 이해하였을 때는 사람은 마음에 덮인 것이 없어지고 두려움을 넘어서게 된다고 한다. 사리불의 두려움은 성과 속의 구별과 그에 대한 집착에서 생긴다. 그 구별을 초월하였을 때 두려움이 아니고, 절대의 평안이 찾아 온다. 그래서 심경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에 덮인 것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휘둘린 마음을 멀리 여의어 영원한 평안에 들어가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三세에 계신 깨달은 분들은 모두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4. 심경의 신비
  후 七세기의 인도의 불교학자 찬드라 키이류티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한다. 눈병 들은 사람이 눈 앞에 어른거리는 머리카락을 보았을 때 다른 사람들이 「제가 본 머리카락은 실지가 아니다」라고 가르친다. 그때 눈병 들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있는 머리카락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까지의 상상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머리카락 환각(幻覺)이 아주 보이지 않는 그러한 진실을 자기 몸으로써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눈병이 나았을 때 비로소 머리카락을 아주 보지 않는 그런 진상을 이해하게 된다. 이 경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는 것을 넘어서 있음과 동시에 그것은 없다고 하는 의식도 넘어서 있다. 환각 자체가 없을 때 환각의 유도 무도, 긍정도 부정도 없는 것이다. 나지 않는 환각은 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라고.
  여기에 말한 환각이란 사람의 생각과 분별이다. 사유 분별에서 유와 무, 생과 멸, 증과 감, 구와 정 등 대립과 구별이 일어난다. 사유 분별을 여의어 공성(空性)을 직관한 사람에게는 모든 대립과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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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迷)했던 깨달았던 어떤 분별에 상관없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 반야의 참모습이다. 따라서 반야에는 아무런 막힘도 없다. 일체에 통해있고 만법에 자재하다. 반야를 통해서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는 열리는 것이다. 반야를 삼세제불의 어머니라하고 반야를 대표하는 문수보살이 七불의 스승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온다. 우리는 어떠한 번뇌 속에도 걸림 없이 찬란한 반야를 바로 알아 쓰도록 힘써야 하겠다.
  2. 바라밀다(波羅密多)…. 「저 언덕에 이르렀다. 또는 「다함이 없는 데 이르렀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완성을 뜻한다. 바라밀다는 미혹의 중생세계에서 자유와 진실이 가득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길도 되고 마하반야에 의하여 드러난 완전무결 구극의 진리적 본성을 의미한다
  3. 심경(心經)….심경은「진수」·「핵심」. 사람에 있어 심장과 같은 요점이 되는 경전이란 뜻이다. 심(心)은 마음을 뜻하지 않는다.
  4.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한다. 자비심의 완전한 구현으로서 고뇌에 빠진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를 때 곧 해탈시켜 주는 데서 그 이름이 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준말, 도를 구하는 자라는 뜻이 있다.
  5. 오온(五蘊)….다섯 가지 쌓임이라는 뜻이다. 이 세간에 존재하는 것들은 물질적 형상과 정신적 작용으로 구성되었으니 이것을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가 뭉친 것이라 하여 五온이라 한다.
  색은 물질, 수는 감각, 상은 대상을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인식작용, 행은 의지, 식은 감각기관을 움직여 쓰는 의식이다.
  6. 공(空)….범어의 「슈냐타」인데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원래는 수학의 ○의 뜻이다. 불교에서는 관념적 상대적 인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니 곧 무한·영원·절대성을 나타낸다 하겠다. 따라서 공은 실로는 무가 아니다. 한 물건도 없는 곳에 무진장이 있다는 말이 여기서 있게 된다.
  7. 사리자(舍利子) …..부처님의 제자인데 지혜 제일이라 이르던 사리불이다.
  8.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된다. 물질적 존재인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실체가 없다. 있는듯이 보이지만 형상일뿐 끊임없이 변화하며 실체가 없다. 그것은 실로는 공이다. 또 이 공은 현상적 현상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끊임없이 변화하여 마지 않는 것이지만 실로 그 자체는 있다 없다에 속함이 없이 영원히 진실을 충만히 간직한다. 이 충만한 진실은 색이랄 수 없고 무라 할 수 없고, 유라 할 수 없다. 살아 있는 공이다. 공은 이렇게 원래로 충만하고 살아있는 것이다. 일체 현상은 실로 공이며, 공은 색으로 자신을 왕성하게 나투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말이 있게 된다.
  9.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눈·귀·코·혀·촉감·뜻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없다는 말이다.
  10.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빛깔이나 형상·소리·냄새·맛·부딪힘·분별 등 안이비설신의 감각기관이 상대하는 대상경계가 없다는 말이다.
  11. 무안계내지무의식계(無眼界乃至無意識界) ….이것은 앞서의 육근 육진(六塵)도 없고 이번에 육식(六識)도 없다는 말이다. 六식이란 감각기관이 경계를 대하여 일으킨 생각인데 안으로 六근이 밖으로 六진을 대하여 중간에 六식을 얻는 것이 범부의 의식세계이다. 이 六식경계가 없다는 말이 된다.
  12.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亦無無明盡乃至無老死亦無老死盡) ….무명이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고 내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는 말이 된다. 무명은 밝은 지혜가 없는 상태이니 이것이 근원이 되어 중생의 번뇌와 생사번뇌가 있게 된다. 무명이 근본원인이 되어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
……….94쪽~95쪽 인쇄 안 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