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사상] 나의 신앙관

2008-01-11     김어수

 江水淨而秋月臨   信心生而諸佛降

   화엄경에 있는 말씀이다. [강물이 맑아지면 가을 달이 비치고 믿는 마음이 확실할 적에 부처님이 나타난다.대충 이러한 뜻이 담긴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딴 생각이나 이견이 있을수 있겠는가?  나는 이 한 말씀으로 일생동안 나의 신앙에 대한 신조로 삼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믿는 마음]이라고 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평소에 가지고 있던 소신을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을 느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믿는 마음]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언어를 과연 얼마만큼 객관화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우리는 흔히 이 믿음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여러가지 형태의 추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역사적인 근거가 확실한 믿음이라든가,  혹은  사회적인 명백한 이론이라든가,  혹은 맹종적인 어떤 치우친 믿음이라든가......

    그러나 신앙이란 [확고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볼 때 우리는 잘못된 믿음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오도된 미신과 맹종과 같은 불행을 목격하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믿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신앙을 선택한다는 것과 직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젠데,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것이 [참다운 믿음]을 선택한 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면 난해한 교리적인 문제로 밖에 설명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몇가지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  누구나 손쉽게 구별할 수 있는 현상적인 문제로 그 유형을 대별해 보면 우선 불교는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불교에 나의 믿음의 확실한 뿌리를  내리게 했던 것이 바로 그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한 믿음어어야만 우선 현실적으로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 [믿음]에 [믿음]을 더할 때 비로소 숭고한 신앙은 이룩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조그마한 한 인간에서 출발하여 커다란 깨달음의 경지를 몸소 체험하였고,  어둡고 어리석고 둔박한 생령들을 슬기롭고 밝은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 이러한 큰 가르침을 티없이 맑은 마음으로 신앙할 때 어찌 부처님을 예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부처님을 예배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어둡고 어리석음을 맑히자는 큰 뜻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라는 대상에게서 광명과 행복이 쏟아져 주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고 엄숙하고 순수한 자기자신의 신앙속에서 번뇌와 망상이 스스로 가라앉고 녹아져 내리는 자기 자력 정진의 행원이 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이것이 옳은 신앙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객관성을 대상으로 한 신앙이 아니라 내적인 주관성으로 이루어진 지덕이 충만된 불생불멸의 무량수 무량광 자재법신을 말하는 것이다. 지성으로 예불을 한 번 더할 때 자신의 부처는 한 걸음 더 가까와지고 우매한 범부의 때는 다시 한번 벗어진다는 것을 느낄때 신성의 물결이 새롭게 일어나고 새로운 마음으로 이 몸을 경책하게 한다.

   [自警]이라는 책에 보면 (今生未明心  適水也難消)라고 분명히 일러 놓았다.

   사람의 생을 받아 탄생한 일생 동안에 마음에 묻어 있는 때를 벗기지 못하면 물방울같이 작은 업덩어리라도 녹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는 금강경의 [毫厘有差  千理縣隔]이란 말씀대로 신심을 굳혀 한걸음 한걸음 마음을 밝혀가면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객관적인 부처님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객관적인 부처님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 고도로 맑아져 번뇌와 망상과 오욕과 탐진이 끊어진 아름다운 경지를 말한 것이며 이것은 바르고 굳은 신심(믿음)  없이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지고지미한 최고의 인격 완성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