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샘] 그 소리가 그 소리

지혜의 샘

2008-01-11     문정임

  어느 추운 겨울 날이었다.  평소에 가까이 모시던 B스님을 뵙기 위해 그분의 거처를 찾았는데, B스님은 마침 외출 중이고 빈 방만이 뎅그라니 나를 맞이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까부터 나말고도 아주 먼곳으로 부터 온듯한 한 스님이 마치 그림자처럼 한켠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 스님의 존재조차도 의식을 못하고 그저 B스님의 부재만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차차 방 한쪽이 밝아지면서, 어디선가 산냄새가 밀려 오더니 드디어 그 스님은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 내었다. 

그 스님은 아마 꽤 오랬동안 B스님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밖에서는 겨울의 눈보라가 짐승소리를 내면서 기승을 떨치고 있는데, 난생 처음 만나는 이 스님과의 침묵의 대좌는 이렇게 시작 되었다.  빈 방에서 인사도 나눈 적이 없는 생면부지의 스님과 오랜동안 한 마디의 말도없이 앉아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나로서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만은 아니었다.  아직 젊고 젊은 처녀였던 나는, 그 침묵이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 그 스님을 부처님으로 만들어 놓고 나무 아미타불을 속으로 읊조리었다. 

그러고도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어이없게도 굳이 B스님을 만나야 할 이유가 내게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방에 와서 산에서 온 저 스님을 만난 인연으로 족한 것이었다.  B스님을 마나고자 했던 용건이 부처님 닮은 얼굴이나 뵙고, 부처님 말씀이나 듣는데 있었다면, 나는 이미 이곳에 온 용건을 다 마친 셈이 아닌가.  자리를 털고 일어 서려다 말고, 나는 용기를 내어서 아까부터 벼르고 벼르었던 말을 그 스님에게 건네었다.  「스님, 아주 먼 곳에서 오신 모양인데 좋은 말씀 좀 들려주셔요.」  스님은 처음으로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 소리가 그 소리지오!」 했다.  가슴을 딱 때리는 한마디였다. 

염화시중의 미소같은 미소속에서 튀어 나온 이름도 알 수 없는 스님의 그 겨울의 한마디는 나를 꽤 어른으로 만들어 놓았다.  시(詩를 쓸때에도, 스님의 그 한마디가 걸리고 걸려서 나는 밤새워 고생을 하곤 한다.  지난 가을에 해인사에 들렀는데, 그 스님과 얼굴이 비슷한 젊은 스님이 아주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  나는 속으로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들이니 닮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 겨울의 스님과, 이 젊은 해인사의 스님과의 세속적인 인연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전생의 나와의 인연들을 상상하고 있었다.  숲으로 그윽한 해인사를 나서며, 그 스님이 구어 준 알밤이 목에 넘어 가지 않음을 의식했다.  웬지 모를 슬픔같은 것이 서산 마루에 걸려서 해어름을 만들고 있었다.  「스님, 법명이나 일러 주십시요.」 「 나같은 돌중에게 무는 법명이 있겠읍니까?」  나는 할 수 없이 키가 사천왕처럼 큰 그 스밈을 뒤로 하며, 속으로 <그렇지요. 그 소리가 그 소리지요.>  했다.  저 먼 산 어디선가 「 길 도(道)에 빌 공(空)입니다 .」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문정임 (작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