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불교] 중도 中 道

2008-01-11     관리자

  [1]치우침과 집착이 없는 생활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피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두가지 치우친 생활방식이 있다. 그것이 첫째는 오욕의 종이 되어 오욕에 빠져 사는 천한 생활이고, 또하나는 부질없이 자기 심신을 괴롭히는 고행하는 생활이다. 이 두가지 치우친 생활방식을 떠나서 마음의 눈을 열고 지혜를 밝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중도의 생활방식이다.

 중도의 생활방식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실,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마음의 통일 등 8정도이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모든것은 인연따라 생멸하는 것이므로 모두는 유와 무를 여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혹은 유라고 보고 무라고 보나 바른 지혜에서 보면 유와 무를 여의어 있다. 이것이 중도의 바른 견해인 것이다.

 재목 하나가 큰 강을 떠내려 가고 있다고 가정하다. 그 재목이 좌우 언덕에 걸리지 않고 물 가운데서 가라앉지 않고 육지에도 올라가지 않으며, 사람이 건지지도 않고, 물결속에 말려들지도 않고, 재목이 속에서 썩지 않는다면 그 재목은 마침내 바다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이 재목과 같이 안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밖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유(有)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무(無)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선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악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정(正)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사(邪)에도 사로잡히지 않아서 미(迷)를 여의고 깨달음에도 체(滯)하지 아니하며 중류(中流)에 몸을 맡기는 것이 도를 닦는 사람의 중도의 견해며 중도의 생활방식이다.

 [2] 사로잡힘이 없는 생활

 도를 닦는 생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모든것은 생한것이 아니며 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정해진 성질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자기가 행하는 선(善)에도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일체 것에 결박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또한 말을 바꾸어 말하면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꽉 붙들지 않는 것,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도를 닦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생도 바라지 않는다. 어떠한 견해도 그 뒤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무엇인가든 손만 닿으면 곧 그곳에 마음을 끄달리는 것이나 만약 이러한 끄달린 한 생각이 일어나면 홀연히 미(迷)의 생활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붙잡지 아니하고 취하지 아니하고 머물러 있지 아니하는 것이 사로잡히지 않는 생활 방식이다.

 [3] 미(迷)도 오(悟)도 둘이 아닌 깨달음

 원래로 깨달음도 자성이 없는 것이므로 실로는 깨달을 것도 없는 것이다. 미혹이 있으므로 깨달음이 있는것이니 만약 미혹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미혹을 떠나서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을 떠나서 미혹은 없다.

 그런 까닭에 깨달음이 있다 하는 것은 이것은 오히려 하나의 잘못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유하면 어둠이 있으니까 밝게 비추는 것이 있는 것이고, 어둠이 없어지면 밝게 비추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비추는 것도 비추어지는 것도 다 없어진다.

 그러므로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은 깨달았어도 깨달음에 머물어 있지 아니한다.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아직도 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모든 장애가 그대로 깨달음이며 어둠인 그대로가 빛이다. 모든 번뇌 그대로가 깨달음인 경계까지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4] 모두가 깊은 관계속의 하나

 이와 같이 모든 것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것을 공(空)이라 하며 무생(無生)이라고도 하며 무자성(無自性)이라고도 하며 무이상(無二相)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물건 자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실다운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생도 없고 멸도 없어 그것을 말로써 할 수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원래로 그 성품이 공이므로 이것을 무생이라고 하며 또한 모든것은 서로 관계하여 성립하고 상대가 되어 존재하는 것이며 홀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빛과 그림자, 긺과 짧음, 흰 것과 검은 것 같이 그 물건의 자성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므로 무자성이라 한다.

 그러한 까닭에 빛을 떠나서 그림자가 없고, 길이를 떠나서 짧음이 없으며, 미혹을 떠나서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 밖의 미혹이 없다. 이들 두가지는 서로 틀리는듯 하지만 거기에 서로 상반하는 두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무이상(無二相)이라고 한다.

 [5] 번뇌가 곧 열반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떠나서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외도의 그릇된 견해나 번뇌 그것이 부처의 종자가 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연꽃은 고원지대나 맑은 육지에 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러운 진흙밭에 피는 것과 같다. 산과 같이 커다란 아견을 일으키는 자야말로 비로소 도를 구할 마음도 내고 마침내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바다 밑 바닥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값비싼 보물을 얻지 못하는 거와 같이 번뇌의 진흙바다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깨달음의 보물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옛날 선인이 칼산에 올라가 몸을 불무더기 속에 던졌을 때 불에 미처 이르기 전에 시원함을 느꼈다고 하는 것과 같이 번뇌는 그대로가 보리이므로 명예나 이익의 칼산이나 미움의 큰 불 속에서 보리의 시원한 바람은 부는 것이다.

 [6] 하나도 버릴 수 없는 큰 깨달음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은 서로 상반한 둘을 여의고 둘이 아닌 하나를 얻는 것이므로 만약 서로 어긋난 둘 중의 하나를 잡고서 집착한다면 그것이 비록 선이거나 정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나」가 있다고 집착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으로서 비록 도를 닦더라도 보람은 없게 된다. 또한 만약 모든것은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잘못된 생각에 빠지는 것이며 다시 모든 것은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헤아리더라도 이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모든 것은 괴로운 것이라 한다 해도 이것은 잘못이고 다시 모든 것은 즐거움 뿐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도로써 치우친 양쪽을 여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