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의 성좌] 벽송지엄선사(碧松智嚴禪師)

불광의 성좌

2008-01-10     고산 스님

 1 . 전등에 대하여

  이조시대를 장식하는 커다란 별은 아무래도 서산대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서산대사는 바로 태고왕사의 임제정맥을 이은 조사임은 대개 큰 이론이 없다. 물론 불조원류(佛祖源流)에 수록되고 서산대사의 수록에 근거하였다고 보아지는 서산대사 비명에 전해오는 전등법맥에 대하여 근거있는 이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법맥에 대한 천책은 피하기로 한다. 서산대사 비명에 이르기를 『우리 동방의 태고(太古)화상이 중국 하무산에 들어가시어 석옥(石屋)화상의 법을 이으시고 이를 환암(幻庵)에게 전하였다. 환암은 귀곡(龜谷)에게 전하고 귀곡은 정심(正心)에게 전하고 정심은 지엄(智嚴)에게 전하고 지엄은 영관(靈觀)에게 전하였으며 영관은 서산(西山)에게 전하였다. 이는 실로 임제(臨濟)의 정맥이니 이로 보건대 서산이 홀로 그 종을 얻은 것이다.』하였다. 고려 말에서 이조 중엽 서산대사에 이르는 사이 계속되는 불교탄압이 있었고 그 중에도 연산군의 불법사태는 절정에 이른 것이다. 이 사이에 법맥을 이어 불법 정맥을 길이 전한 조사의 호법에는 실로 눈물겨운 바가 있는 것이다. 벽계정심(碧溪正心)선사의 경우 사태를 만나서 마침내 속진 속에 피하여 지엄선사를 만난것이니 이 지엄선사가 영관선사를 거쳐 서산대사에 이른 것이다. 고려 말에서 서산대사에 이르는 동안에 빛나는 성좌들 중 우선 지엄 선사에 대하여 잠시 그 거룩한 자취를 살피기로 한다.

 2 . 출 생

  선사의 이름은 지엄이다. 호는 야로(野老), 거처하는 처소는 벽송당(碧松堂)이라 하였다. 오늘날 선사의 행상과 게송 수편을 수록한 벽송집(碧松集)이 있는데(양산 통도사판) 그 이름이 이에 유인한다. 선사의 속성은 송(宋)씨, 아버지는 복생(福生)이라 하였고, 전북 부안(扶安)사람이다. 어머니는 王씨인데, 꿈에 한 도승이 나타나서 절을 하면서 쉬어가기를 청하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고 전한다. 이조 제 6세 왕인 세조 9년(서기 1464) 3월 15일에 탄생하였다. 골상이 기특하게 뛰어났고 성장하면서 기골이 웅장하여 武人의 풍모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書와 劍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병서에 박통하였다. 성종 22년 두만강 건너 야인이 침공하여 왔을 때 도원수 허종(許琮)은 2만병을 거느리고 이를 쳤다. 그 때에 선사도 종군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다음해 개선하여 하루는 탄식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부질없이 바깥을 향하여 힘들이고 달리니 이럴 수만은 없다. 비록 땀 흘린만큼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필경 이것은 헛된 이름인 밖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땅히 심전(心田)을 지킴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마침내 집에서 나와 계룡산에 찾아갔다. 그곳에서 조징(祖澄)대사를 만나 축발하였다. 그 때가 28세였다.

 3 . 오도(悟道) · 전법(傳法)

  선사의 수도는 실로 철저하였다. 견고한 도심은 길이 만인의 거울이 되리라. 엄정하게 계를 가지며 선을 닦되 잠시의 틈도 없었다. 그러면서 널리 선지식을 찾았고 한편 능엄경의 깊은 뜻을 묻기도 했다. 벽계정심선사를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황악산으로 벽계정심선사를 찾아 마침내 이곳에서 대오하니 임제정맥은 끊어질 듯한 어려움에서 벗어난 것이다. 불조원류(佛祖源流)에는 벽계정심선사가 입멸에 즈음하여 법을 벽송에게 전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를 말한다. 그후 선사는 운수행각을 계속하여 제방 제산의 여러 선지식의 문을 두루 두들겼다. 산중 깊숙히 이름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며 지내시는 도인이 많았던 것이다. 뒤에 지리산에 들어가 지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한 벌 누더기요, 먹는 것은 하루에 한 끼,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좌선하였으며 그 청정한 거동은 참으로 참선학도의 모범이 아니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선사의 문풍은 고준하고 엄정했다. 비록 납자가 찾아와 법을 물어도 그 단련은 준열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 사람들은 선사에 가까이 하지 못하고 두려워 했으며 한편에서는 선사의 고준을 허는 자조차 있었다고 한다. 선사가 후학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독특한 바가 없지 않다. 보통의 선인과 같이 문자 세우지 아니한다 하여 경전을 불고하는 類와는 크게 달랐다. 법화경· 능엄경등 대승경전을 간파하고 정심선사에게 최후 일관을 격발하여 깨친 경력을 가졌기 때문에 제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선종조사의 어록을 대뜸 들어대지는 않았다. 먼저 선원도서(禪源都序)와 보조국사가 평을 가한 법집별행연절요(法集別行緣節要)를 읽게 하여 대충 교학상의 이해를 주고 그 다음 해 조사의 경절문(徑截門)의 어록을 배우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법화경 · 화엄경 · 능엄경등 대승경전을 강하여 널리 부처님 말씀에 젖게 하였으니 이는 보조(普照)국사가 일체경교를 심지(心地)개발의 기초를 삼았던 내력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하겠다. 대개 이와같이 하여 선요어록으로 알음알이의 병을 세척하고 다음 해 향상일로(向上一路)를 보이는 것이었다.

  이조 중종 29년 겨울, 문인들을 모아 법화경을 강하였다. 방편품에 이르러 홀연히 탄식하여 이르기를 『중생이 스스로 광명을 가리고 윤회를 달게 받아 돌고 돌기가 오래 되는구나. 그래서 세존께서 수고롭게도 광명을 동쪽에 한 번 비추시고 힘들여 정성스럽게도 열어보이고 말씀하시게 하였구나. 이것들은 모두가 중생을 위하여 방편을 베푼 것 밖에 무엇이 있는가. 이것은 실법(實法)이 아니다. 대개 제법(諸法)의 적멸상(寂滅相)은 말로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너희들 모두가 만약 부처님께서 말씀이 없으신 것을 믿는다면 곧 자기 마음 땅에 깨달아 들어가리라. 이것이야 말로 가히 보재창고를 여는 것이라 하겠으며, 또한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된다. 오늘 나도 또한 여러분들을 위하여 적멸상을 보이겠다. 여러분들은 결코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라. 노력하고 노력하라.』하였다. 그리고 시자를 불러 차를 가져오게 하고 한모금 마시더니 문을 닫고 단정히 앉으셨다. 잠시후 대중이 문을 여니 선사는 이미 천화하였던 것이다. 이 날이 11월 1일이다. 안색이 생시와 같았다고 한다. 선사의 게송이나 글은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서산대사가 수집한 게송20수가 벽송집에 실려 있는데 문구에 걸림없이 천진심(天眞心)을 흘러내림은 만고의 구슬이라 하리라. 선사의 세수는 71세, 법납은 42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