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자재한 농산 스님 이야기

2008-01-10     관리자

 마음공부를 하여 밝은 마음을 보는 사람은 인간의 생명이 육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닌 것을 본다. 물질의 장벽을 넘어서서 긴 생명을 사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1] 생사자재한 도리

 사람은 육체가 있어서 사는 것이고, 육체가 허물어지면 죽는다 하여 인생은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육체 밖에 볼 수 없고 물질형태의 음식을 먹지 않고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그렇게 보는 것도 어쩔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범부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공부를 하여 밝은 마음을 보는 사람이면 이와는 견해를 달리한다. 인간의 생명이 육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육체를 넘어서서 살아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마음공부를 하여 마음이 물질과 감각과 망념에 끄달리지 아니할 때 거기서 물질의 장벽을 넘어서서 긴 생명을 사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도를 닦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을 우리들은 그대로 믿어지지가 않아서 의심도 하고 혹 부정도 하며 어떤 때는 불가사이한 사실로 덮어두기도 한다. 원래 사람은 육체가 아니요, 물질에 갇혀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거듭 말씀하셨다. 많은 경전에서 온 세계는 [ 오직 한마음] 이라고 설파하셨다. 많은 성인들이 이 사실을 입증하였던 것이다.

 인간이 마음이요. 세계가 한 점 마음이요, 이 마음은 내가 중심일진대 이 마음을 본래대로 쓰는 사람이면 막힘이 없는 자유를 행사할 것도 분명하다. 인생이 나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다. 도를 닦은 사람이라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새로운 생을 선택하여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나고 죽는 것이 마음에서 일어난 그림자이므로 마음을 자유로이 쓰는 사람이 생사를 자유로이 하는 것이다. 필자는 전 호에 오죽잖은 체험을 늘어논 바 있었지만 이번에는 필자가 머물고 있는 금선암에 머물고 있던 한 수도인의 생사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아마도 도인에게 있어 생사는 몽환이라 하지만 몽환을 써서 불사를 지어 중생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복되게 한다는 것은 보살의 길인가 생각한다.   

 [2] 물장수생활 3년      

 이조 정조대왕 때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200년 전이 된다. 그 당시 사찰에는 많은 부담이 있었다. 절에서 불법을 공부하여 법을 펴냄으로써 백성을 제도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자를 생산해서 나라에 바치는 공출제가 가혹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산중에서 목기를 만들어 진상한다든가, 실백 같은 과자를 만들어 진상한다든가. 또는 닥나무를 심어 종이를 떠서 공출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할당량이 어떻게나 많았던지 절에서는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서 도를 닦고 경학을 공부하는 일은 도무지 할 겨를이 없게 되었다. 산중의 스님들이 이렇게 노동생산에만 골몰하게 되니 불법은 말이 아니었다. 사찰이 도를 닦는 곳이 아니라 노동자 합숙소 꼴이 되게끔 되었다. 어찌 뜻있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지나칠 수 있었던가. 경북, 지금의 문경 대승사에 용파(龍坡)스님이 계셨다. 청정수행에 높은 도덕을 갖추었고 당시의 불교사정이 불법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상감을 찾아보고 직소하던지 아니면 조정의 대관을 만나서 호소하여 이 폐단을 없애도록 하기로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렇지만 상감이나 대관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웠다. 궁리한 나머지 남대문밖에 여러해 있으면 수원花山능에 자주 가시는 정조대왕을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물지게를 지고 물장사를 3년이나 하였지만 물장수가 나라님을 만난다는 것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용파 스님은 지쳐서 본사로 돌아가서 기도할 수 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물지게를 팽개치고 어떤 객주집에 머물며 떠날 차비를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정조대왕 꿈에 남대문 밖 어떤 초가집에서 용 두마리가 하늘로 오르고 서기가 장안을 비추는 것을 보았다. 왕은 이상히 여겨 이튿날 아침 일찌기 별감을 대동하고 남대문 위에 올라가 보았다. 과연 꿈에 본 초가집이 있었고 무엇인가 영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별감을 시켜서 저 집에 묵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게 하였다. 별감이 초가집에 당도해 보니 목로방에 허수룩한 차림의 남자가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별감은 그를 깨워서 무엇하는 사람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서 3년동안 물장사를 하며 상감만나기를 소원했던 대승사 스님인 것을 알고 곧 상감께 데리고 갔다. 용파스님은 하도 신기하고 놀랍고 황송해서 어전에 엎드렸다. 대왕이 물었다. [ 그대는 무엇하는 사람인고? ] [ 소신은 경상도 사불산 대승사에 있는 용파라 하는 중이온대 하도 억울한 일이 있어서 직소하려고 상경하여 물장수를 3년 하였지만 뜻을 못이루어 이제 기도하러 떠나려는 참입니다 ] 하고 자초지종을 남김없이 털어 놓았다.

 정조대왕은 깊이 느끼는 바가 있는 듯 하였다. [ 잘 알겠소. 대사의 소원은 내가 다 풀어줄 것이니 안심하오. 그러나 대사에게 청할 것이 있으니 들어주겠오?] 

 그 무렵 정조대왕에게는 왕자가 없었다. 3년전에 세자가 죽고 왕은 나이 40이 다 되니 왕실의 후사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 지당하신 분부이십니다. 그러나 일이 중대하므로 기도를 하여도 300일은 하여야겠고 또 소승 한사람으로는 부족하오니 소승의 도반과 함께 기도하는 것을 허락해 주소서,] 이렇게 되어서 용파스님은 서울 수락산에 있는 내원암에서 기도를 하고 그의 도반인 농산(弄山)스님은 금선암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  

 [3] 몸을 벗고 王家로      

 용파스님은 금선암으로 농산스님을 찾아가 이일을 의논하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나라에서 내린 향,촉 등 기도공양구를 양사에 올리고 열심히 기도하였다. 100일기도를 두차례 마치고 세차례 백일기도도 다 마쳐가는 때였다. 용파스님이 선정에 들어서 살펴보니 왕자로 태어날 사람이 없었다. 왕가로 태어나려면 많은 공덕을 지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라면 용파스님 자신과 농산스님 밖에 없어 보였다. 그렇지 않고는 세자를 얻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나는 여러 곳에 불사를 맡아있고 아직 육신을 버려 왕자로 태어날 형편이 못되나 농산스님이라면 비록 귀찮은 왕 노릇이겠지만 성불을 좀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위하고 불교를 위하여 이 일을 부탁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농산스님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 300일 기도도 다 마쳐가는 중인데 내가 보기에는 국내의 왕자로 태어날 분으로는 나와 스님뿐이요. 그런데 나는 여러 곳에 불사를 벌려 놓았으니 궁중에 탄생하기 어렵게 되었으나 스님은 아무런 걸림없이 정진만 하시는 터이니 홀가분하게 몸을 버리고 왕가에 태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본의는 아니겠지만 나라를 위하고 불법을 위하여 왕자가 되어달라는 요지였다 금선암에서 기도하시던 농산스님도 300일 기도를 마쳐가면서 살핀 바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 기도를 성취시키자면 비상한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용파스님에게 회답을 썼다. 

 나에게 왕자가 되어 가라고 하나 나의 평생공부가 성불이 목적인데 부귀영화를 탐하여 왕자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고 나라를 위하고 불법을 위하여 희생하라고 한다면 거역할 수는 없다. 나도 삼매 중에 본 바가 스님과 같으므로 이젠 올것이 온것을 알고 약간의 공부의 힘을 드러내어 보이겠으니 자세한 것은 기도를 마치는 날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기도를 마치는 날 새벽에 왕비의 꿈에 농산스님이 법복을 입고 방에 들어오는 것을 꿈꾸고 그후 왕자를 낳았으니 그가 후일 등극하여 순조대왕이 되었다. 살피건대 기도한 것은 정조대왕 13년이고 왕자가 태어난 것은 14년 6월이다. 정조대왕은 기도를 시작하면서 전국에 영을 내려 사찰에 부과한 일체 노역과 물자공출을 혁파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농산스님은 기도를 마치는 날 금선암 법당에 앉아서 조용히 입적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