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의 세계] 유마경 입불이법문에 대하여

특별기획: 유마경의 세계

2008-01-10     관리자

 유마힐 이란 이름이 [비마알라키르티]의 음역에 비롯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비마알리], 즉 [때없음][맑고 깨끗함]이라 불리는 사람, 이것이 [유마힐]의 뜻이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또 무구칭 또는 정명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지게 되었었다. 우리는 이 이름이 이 경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음을 주목해야할 것 같다. 이 [비마알라키르티]란 사람이 역사적이 실재인물인가 아닌가 하는데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문이 많아 확실한 말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하여간 이경 자체에서 묘사하는 바에 의하면 재가보살의 이상적 모델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처자를 거느리고 세속의 생업에 종사하며 사는 거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항상 범행을 닦아 조금도 생활에 문란함이 없으며, 불법에 통효해 세속적인 사물이거나 또는 종교적인 집착하는 일 이 없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 고통중에 있는 사람, 병든 사람, 이러한 모든 불행한 사람을 보면 그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겨 이들을 돕고 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힘쓰고, 또 문란한 행위를 하는자는 이를 가르치고, 세상의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술집이건, 궁전이건 가릴 것 없이 그 곳을 찾아 옳게 사는 길을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이 [청정무궁함]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마경은 바로 그러한 생활, 그러한 이상을 천명하는 것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실제로 이 경의 촉루품에서는 유마경이 [불가사의 해탈법문]을 말하는 경이라고도 지적되고 있어 이 경이 단순히 이론적으로 어떤 교리를 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기 보다도 불가사의한 종교적 체험에서 얻어진 마음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경임을 알 수 있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또다른 증거로서는 지겸이 맨 처음에 이 경을 번역할 때에 [불법보입도문삼매경]이라고도 한 것을 들수 있는데, 이는 이 경이 삼매의 체험을 말하는 것임을 입증한다. 고래로 많은 주석가들은 이 경의 중심이 바로[입물이법문품제구]에 있다고 했는데, 이 품의 사상인 불이의 사상은 이 경 전체에 일관하는 핵심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다. 바로 이 입불이법문은 그 불가사의한 해탈의 경지에서가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깨달음의 위대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중국 초기불교의 사상적 개척자 승조는 그 유마경 주석서에서 입불이법문이란 품의 제목을 해석하면서 다음과같이 말했다. 불이라고 하는 것은 일도청청을 말하는 것이요, 법은 진극가궤며, 문은 지묘허통이니 이 불이법문에 입 한다는 것을 요오사리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유롭게 풀어서 말하면 이런 뜻이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여[입불이법문]이란 철저하게 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도리가 무엇인가.그것은 불이법문인 것이다. 즉 진실로 모든 것의 궁극적인 궤가 되는 청정한 하나의 도, 그것은 허한 것같으면서도 통하는 지묘한 것. 이것을 완전히 깨닫는 일, 이것을 두고 불이법문에 들어 가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이란 말에 대해서는 유마경의 모든 말들이 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바쳐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로 그설명이 많다. 그것은 상대적인 대치, 둘 또는 셋, 넷, 수많는 상대적인 것들이 각각 그 독자적 우월성, 절대성을 표방하며 병열되어 있거나, 또는 대립투쟁의 관계를 형성하는 그런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융무애한 경지, 어떤 일정한 제한이나 수식을 넘어선 무애자재한 각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그 불이의 법문은 개념이 아니요 어떤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을 대하는 마음의 경지요 삶의 태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아는 문제와 관련이 있고, 행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불법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알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마경 입불이법문품 제9에서는 유마거사가 설흔 한명의 보살들로 하여금 각각 그 아는 바대로 불이법문에 대해 설명을 하도록 했다. 모두 다 제각기 그럴사하게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을 열거하면서 그것을 부정하는 식의 어려운 설명들을 한다. 마지막에 문수보살 만이 다른 대답을 했다. 그는 말하기를,[제 생각으로는 일체법에 대해서 무언. 무설. 무시. 무식하고 제문답을 떠나는 이것이 곧 입불이법문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때 유마거사는 [묵연히 무언]을하고 계셨다. 이 광경에 접한 문수보살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자어언이 있지 않은 거기에 이르를 때 비로소 진실로 불이법문에 들어 갑니다.]라고 한다. 이 말씀들을 다 듣고 나서 그 자리에 모였던 오천명의 보살이 다 불이법문에 들어가 무생법인을 얻었다고 이 품의 끝맺음을 한다.

 무생법인, 이것은 깨달음의 절정을 의미한다. 모든법, 즉 모든 사물의 공한 실상을 깨닫고 그러한 확신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모든 불가사의한 일을 다 해낼 수있는 경지에 있게 됨을 말한다. 무생법인을 강조하는 것은 비단 이 유마경에서만 하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반야경등에서 강조된 바가 있다. 아니 그 정신은 이미 원시경전들 속에서 소박하게 나마 언급된 일이 있었다. 그것이 대승불교에 와서 더욱 확실히 강조되는 것이다.

 유마경 제자품에서는 십대 제자나 보살들이 제딴에는 지혜롭고 자비롭게 수도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다 어설픈 깨달음이요 어설픈 행위임을 갈파하고, 보다 투철한 안목을 찾고 새로운 생활 이상을 좇아 살 것을 권하는 무한한 교훈들이 제시되었다. 그들은 현실생활과 열반 해탈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출가와 재가의 차별을 절대시 하려는 경향도 보였고, 개인 개인의 영혼을 별개의 것으로 보며,또 아직도 생과 사의 차원을 갈라 놓으려고 했으며, 또 자기의 수도성과에 자부심을 갖고 남을 가려서 생각하려는 경향도 있었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현상의 차별상과 개념의 노예가 되어 완전히 눈을 뜨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만 했다. 그러한 잘못들을 타파하는 철추가 내려진 것이다.

 법의 실상에는 중생의 차별이라든가 에고이즘 이라든가 삶과 죽음의 구별이라든가, 영혼이라든가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보고 그 모든 것에서 보리의 실상, 열반의 실상을 보고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불이법문의 가르침이다.* (동국대불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