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성과 기원정사

서경수 칼럼

2008-01-10     관리자

  1)기원정사 이야기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 성 가까이에 있고 코살라국은 당시 간지스강 남쪽을 지배하던 마가다국과 대결할 만큼 세력이 강했던 나라였다. 당시 16개 군소 국가들 가운데서도 두 나라는 가장 부강했고 따라서 서로 패권을 다투는 사이였다. 마가다국의 서울, 왕사성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중심으로 중생교화를 하시던 부처님은 기원정사(祈園精舍)가 마련되므로 코살라의 서울, 사위성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정사가 마련되기 까지는 제타라는 왕자와 이 정사를 희사한 수닷타 장자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거래가 있었다.

  왕사성에서 정사를 희사하겠다는 뜻을 전한 수닷타 장자는 곧 코살라로 돌아와 사위성 주변에서 정사에 알맞는 집터를 물색하는데 분주했다. 걸식을 위하여 도시에서는 멀지 않으면서도 수도를 위하여는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위치에 집터를 구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마침 아주 적당한 위치에 숲이 우거진 동산이 있었다. 알고 보니 왕자인 제타의 소유지였다. 사위성내 굴지의 부자인 수닷타는 주저함 없이 직접 왕자와 도시 매매를 위한 교섭에 나섰다. 그러나 아끼던 땅이라 하여, 장자의 끈질긴 제의를 완강히 거절하던 왕자는 마지막으로 거의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했다.

  "그의 넓은 동산을 장자의 금화폐로 다 메꾼다면 몰라도.."란 조건이었다. 그런데 장자는 다음날 부터 하인들과 함께 큰 수레에 금화폐를 가득 실어와서 왕자의 동산을 한쪽 구석으로 부터 메꾸어나가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사흘 나흘 장자는 금화폐로 왕자의 땅을 메꾸어 가는 작업을 쉬지 않고 계속했다. 놀랐다기 보다는 질려버린 편은 왕자였다. 그제서야 왕자는 장자의 지극한 정성을 알았다. 어느 위대한 성자를 위한 정사를 지어 희사한다는 말을 들은 왕자는 자기도 그 희사에 한 몫 끼어주기를 자청했다. 그래서 이 정사의 이름은, 제타 왕자가 희사한 동산에 외로운 사람을 도와 주기 좋아하는 수닷타 장자가 지었다 하여,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으로 경전에는 나타나 있다. 기원정사는 바로 기수급고독원의 준말이다. 이 이야기는 인도의 산치 대탑이나 발훗의 조각에 사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부처님은 성도 후, 25회 가량의 안거를 기원정사에서 지냈다. 그래서 현존 경전 중 3분의 2가 넘은 수량이 기원정사에서 이루어졌다. 「如是我聞, 一時 佛 舍衛國 祈樹給孤獨園...」으로 시작되는 모든 경전은 여기 기원정사에서 부처님이 설법하신 내용을 담은 것이다. 오랜 세월 정글에 덮여 있던 정사는 1905년 부터 발굴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남북 500m, 동서 75m의 거대한 불사터의 일부를 볼 수 있다.

  2)천불화현(千佛化現)

  코살라 왕은 원래 자이나교를 신앙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불교와 동시대에 신흥종교로 일어선 자이나교는 주로 간지스 강 북쪽에서 교세를 펴 나갔다. 그래서 사위성에는 자이나교도가 우세하였고 그밖에 6사외도의 하나로 알려진 <아지비카>같은 유물론적 경향이 농후한 교파가 자이나교 다음으로 득세하고 있었다. 이같은 시기에 간지스강 남쪽 마가다국에서 불교의 교조 부처님이 교화의 판도를 넓히기 위하여 사위성을 찾아 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데 부처님 초기 중생 교화사업은 사위성에 까지 그 명성이 들려올 만큼 성공적이었다. 게다가 수닷타 같은 부자와 제타 왕자까지 합세하여 정사를 마련하여 희사했다고 하니 사위성의 종교 분위기는 자못 긴장했다. 특히 자이나교와 아지비카교의 장로들은 불교 교세의 확장을 저지하는 방책을 강구하는 데 부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부처님은 여러 제자와 함께 사위성에 조용히 등장했다. 당황한 자이나교와 아지비카교의 무리들은 부처님을 향하여 정면 공격을 시도했다.

  첫째 부처님이 소문대로 거룩한 성인이며, 위대한 도인이라면 그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다. 즉 위대한 도인으로서 초인적 기적을 나타내라는 말이다. 항시 태산같은 위엄과 굳게 닫힌 성문같은 침묵으로 일관하시던 부처님이다. 그를 시험하려는 무리들에게서 간악한 공세를 받았다고 해서 흔들릴 부처님은 아니다. 다음 순간 거기 모인 여러 군중의 눈 앞에는 천 개의 부처가 동시에 나타났다. (부처님의 거룩한 위엄이 천여 명 군중 각자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투영하였는지) 여하튼 천 불은 분명히 그들의 눈 앞에 화현했다. 이것이 유명한 사위성의 기적이다. 아잔타 석굴 제2굴에서 암벽에 조각된 사위성의 기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천불화현의 기적만으로 쉽게 후퇴할 반대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부처님에 대한 비방과 함께 음모를 획책했다. 순결을 고수하는 비구 승단을 훼방하려는 계책을 꾸미고, 친챠라는 창부를 매수했다. 불교 교단의 신도를 가장하고 부처님이 계시던 기원정사에서 숙식하던 친챠는 어느 날 불룩 나온 배를 안고서 자신은 부처님의 아기를 잉태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다녔다. 그리고 설법하는 좌석에서 부처님을 향하여 「설법만 하지 말고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준비도 해야지 않겠느냐」고 고함쳤다.

  부처님을 함정에 빠뜨리게 하므로 불교 교단을 위기에 몰아 넣으려는 술책이다. 설법을 듣고 있던 대중이 놀라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쥐 한 마리가 친챠의 치마 끈을 끊더니, 치마 속에서 바가지가 굴러 나왔다. 바가지를 감싸 안고 잉태를 가장한 것이다. 이 쥐는 하늘의 제석천의 화신이라고 경전은 전하고 있다.

  부처님을 모함하려던 음모가 폭로되자 황급히 도망치던 친챠는 얼마 가지 못하고 땅이 갈라진 틈에 빠져 지옥으로 떨어졌다. 지금 기원정사에는 친챠가 지옥으로 떨어진 자리에 땅 구멍 하나가 뚫려 있다. 마침 그 주변을 서성대던 모슬렘 노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정말 이 구멍이 지옥과 통하느냐?"고 묻는 말에 "친챠 이후, 아무도 빠져 본 적이 없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지 아니면 극락으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오."라는 싱거운 대답이다. 모슬렘 노인에게 이 기원정사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신 알라와 관계 없는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2세기 이후, 기원정사와 사위성이 위치한 북인도의 역사는 알라를 믿는 모슬렘 교도가 지배하는 역사다. 그래서 기원정사와 사위성의 이름도 오늘의 지도에는 이슬림식 이름인 사헤트, 마헤트로 바뀌었다.

  3) 앙굴마라의 참회

  옛 모습은 전연 찾을 길 없는 사위성에 벽돌로 쌓아 올린 큰 언덕이 있다. 그 지방 사람들은 박기, 쿠티와 캄치, 쿠티라 부른다. 법현(法顯)과 현장(玄奬)은 캄치, 쿠티를 수닷타 장자의 집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폐허이기는 하지만 집터의 크기에서 옛날 수닷타 장자의 저택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박키, 쿠티에 대하여는 이설이 분분하다. 앙굴마라의 탑 유지라고 추정하는 학자가 있다. 커다란 벽돌탑을 쌓아서 그 이름을 기념할 만큼 유명한 앙굴마라는 사위성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삿된 술사의 주술에 걸려서 백 명의 사람을 죽인 다음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는 살인마로 변했다. 그는 99명의 목숨을 빼앗아 99개의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다녔으니, 사위성은 온통 공포에 쌓였다. 두려워서 길거리에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백 명째 살인을 위하여 상대를 찾고 있던 그의 눈 앞에 부처님이 나타났다. 옳지! 됐다고 느끼면서 그는 부처님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가도 그의 칼은 부처님의 목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 멈춰!"라고 부처님에게 호령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벌써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만 그가 부처님에게 다가오지 못했을 뿐이다. 그는 무서운 충격을 받았다. 곧 부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참회의 눈물을 흘린 다음 제자가 되었다.

  악행에 강한 사람은 선행에도 강한 법이다. 그의 피나는 수행과 정진은 다른 제자들의 모범이 될 만큼 수승했다. 과연 그는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그가 지은 살인행 때문에 가혹한 갚음을 받게 되었다. 탁발을 나갔던 어느날, 그는 사위성 거리에서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유가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칼에 가족의 생명을 잃은 유가족들은 현재의 그의 신분에는 아랑곳 없이 집단 몰매를 퍼부었다. 인욕하라는 부처님의 교시에 따라 끝까지 반항 한 번 없이 그는 꾹 참기만 했다. 소식을 듣고 뛰어온 부처님의 팔 안에서 그는 미소까지 지으며 평화스런 죽음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 만큼 중요하다.

  여기서 앙굴마라는 사람의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고 다녔다고 했는데 인도의 북단, 히말라야 너머에 위치한 라닥의 티벳 사원 벽화에서 사람의 해골을 꿰어 만든 목걸이를 걸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칼라, 챠크라, 야나<시론승>라는 티벳 특유의 밀교의 일파이다. 해골로 만든 목걸이가 있다면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도 있을 수 있는 추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여하튼 앙굴마라의 생애는 그를 위한 벽돌탑이 사위성에 세워질 만큼 특이하고 기구했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