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논단] 불교교육의 제문제(諸問題)

전수도량의 설치를 제창함

2008-01-10     홍정식

   一 ,   현 불교교육의 문제점

 우리 종단의 불교교육은 현재 두 가지 양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재래식 강원교육이요, 다른 하나는 종립학교를 통한 현대적 학교 교육이다. 이 중에서 승니(僧尼) 교육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재래식 강원교육이라는 점에 우리 불교교육의 일차적인 문제성이 있다. 불교의 교육 이념이「나」를 깨우치는 데에만 있다면, 재래식 강원교육이라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사미과(沙彌科).......초심(初心),  발심(發心),  자경(自警),  치문(緇門)

   사집과(四集科).......서장(書狀),  도서(都序),  선요(禪要),  절요(節要)

   사교과(四敎科).......능엄(楞嚴),  기신(起信),  금강(金剛),  원각(圓覺)

   대교과(大敎科).......화엄(華嚴)

의 사과(四科)로 구성된 이역(理繹)과정은 화엄선(華嚴禪)적인 입장에서 교학 연찬의 길은 훌륭하게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교육이념이 「나」를 깨우치는데에만 있지 않고 「남」을 깨우치는 데에도 있다고 할 경우, 더구나 대승불교에서는 「나」보다도 「남」을 깨우치는 데에 중점이 가 있다고 할 경우, 승니 교육이 강원 교육으로만 행해질 때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남」을 깨우치는 전법활동의 지도적 위치에 서야 할 승니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남」의 괴로움이 어떤 것이며, 그 남의 생각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지 않으면 안된다. 남을 모르고 남을 가르칠 수는 없는 법이다. 재래식 강원교육이 이렇게 남을 아는 지도자로서의 승니를 교육하는데에 부족함이 없다고 볼 수가 있을까.

 아마 누구라도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재래식 강원의 이역(理繹)과정이 성립된 것은 이조 중엽, 十七세기 경으로 생각된다. 그때와 지금은 二백년이라는 시차(時差)를 갖고, 사회가 엄청나게 달라져 있다. 이조의 억불정책에 밀려난 당시의 산중(山中) 불교는 사회의 지식층을 상대로 한 교화활동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전통적인 불교사상을 계승하는 곳에 있는 힘을 다하지 않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 종교사상이 강력한 도전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유물론적 공산주의 사상이 위협을 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 합리주의와 비판정신에 입각한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사유(思惟)생활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재래식 강원교육을 받은 승니가 이러한 현대 사람들을 깨우쳐 이끌어 갈 수가 있을까. 더구나 오늘 날은 전통적인 불교사상의 전승보다는 남을 깨우치는 전법활동에 중점을 두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러지 않고는 전통사상의 계승마저도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의 설립운영은 이러한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것이다. 전통적인 불교사상의 현대적 이해와 포교에 필요한 폭 넓은 커리큐럼을 마련하고 시대적 요청에 따를 수 있는 자유로운 연구활동이 전개될 바탕이 마련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대학의 실재적인 교육효과를 볼때는 여기에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커리큐럼」은 「개론(槪論」적인 소개로 끝나 깊이를 잃을 우려가 없지 않으며 이론적인 강의는 「학해(學解)」에 치우쳐 종교적 신행을 결핍시키기 쉬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래식 강원과의 관계에서 불교대학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강원출신의 일부 승니들이 불교대학에 진학함으로써 전통적인 강원의 이력과정은 불교대학 이하의 과정으로 전락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통불교의 연찬(硏鑽)의 면에서 볼때 강원의 이력은 불교대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강원은 대학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원 출신은 대학에 와서, 강원에서 이미 공부했던 과목을 다시 듣는 폐단이 생하고 있다. 강원 교육이 전통의 답습이라면 대학은 새로운 각도에서의 해석이라는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중복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종단의 불교 교육이 정비되지 못한 것을 단적으로 나타 내고 있다. 불교 교육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없을텐데 왜 이 중대한 일이 이렇게 방임되고 있는 것일까. 문제 해결을 위한 치밀한 계획이 강원과 대학을 포함한 불교 교육 전반에 걸쳐 체계적으로 수립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二 ,  전수도장의 설치

 이러한 교육 계획은 어떠한 방향으로 수립되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고려되어야 할 제안(提案)의 하나로서 나는 전문적인 수련도량(修練道場)의 설치를 제창하고 싶다.

 우리 종단 산하의 고찰(古刹)에는 유서깊은 전수도량(專修道場)들이 있었다. 해인사는 화엄학(華嚴學)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송광사는 보조(普照)의 정혜사(定慧社)가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동화사가 유가종(瑜伽宗)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면 금산사는 밀교도량(密敎道場)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계단(戒壇)으로는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생각 할 수가 있고, 그밖에도 역사적인 특징을 지닌 많은 사찰이 있다. 그러한 예를 쫓아 불교학의 어느 한 분야를 전수하는 도량을 설치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교학의 중요한 분야로 현재,   삼론(三論) . 천태(天台) . 법상(法相) . 화엄(華嚴) . 정토(淨土) . 율(律) . 선(禪) . 밀교(密敎) 등이 강의되고 있는데 그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함은 물론 실제로 수련(修練)해 보는 전수 도량을 유서깊은 고찰에 설치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현존 강원은 개편해서 기초교육을 시키는 기구로 전환해야 한다. 재정적인 문제만 허락한다면, 「승가전문학교(僧伽專問學敎)」(二년제 초급 대학)와 같은 것을 설립하여 모든 강원을 그 속에 포섭 시킨다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고등학교 정도의 학교 교육을 받은 승니가 일단, 승가전문학교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다음, 뜻에 따라 불교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고 (三학년으로) 또는 각 본산(本山)의 전수도량을 순력(巡歷)하며 전문적인 교학연찬과 수련을 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대학이나 대학원에 재학중인 일반학생들도 그들의 전문적인 연구와 실제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전수도량에 나가볼 기회를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三 ,  실제적인 효과

 이러한 구상밑에 우리 종단의 불교 교육을 계획한다면 어떠한 실제적인 효과가 기대될 수가 있을까.

 첫째, 승니들이 현대적인 학교 교육에 접하게 될 보다 많은 기회를 갖게될 것이다. 승가전문 학교로써 강원을 대치한다고 할 경우 승가전문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중. 고등학교 정도의 학교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고, 그런 다음 다시 승가전문학교에 진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전문적인 교육은 그 방면의 전공자가 아니고는 교수할 수 없다. 각 본사가 현재처럼 단독적인 강원을 개설할 경우 전문적인 강사의 확보가 커다란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분야의 전수도량을 개설할 경우 그런 문제가 보다 쉽게 해결된다. 그리고 강의를 담당하는 사람도 자기의 전문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여유를 갖게되므로 교학 발전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세째, 교육에는 무엇보다도 교육 환경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각 전수도량을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은 고찰에 설치할 경우, 가령, 화엄학(華嚴學)의 전수도량은 해인사에 보조선(普照禪)의 전수도량은 송광사에 있게할 경우 수려한 산수와 역사적인 분위기에서 오는 교육효과는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이것은 또 그대로 전통의식의 앙양이 된다.

 넷째, 일련의 불교학 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행자는 마치 선재동자처럼 여러 전수도량을 편력해야 한다. 그러한 구법행각에서 오는 교육효과 또한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섯째, 불교대학과 강원과의 모호한 관계에서 빚어지고 있는 현 불교교육의 대중성을 지양하여 그 관계를 명확하게 할 수가 있다. 전수도량이 부분적이고 실천적이고 신앙적이라면 불교대학은 종합적이고 이론적이고 비판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면에서 양자는 서로 상대방의 존립의의(意義)를 인정 해줄 수가 있을 것이다.

 여섯째, 소위 「문중(門中)」이라는 것이 한국불교의 오랜 고질(痼疾)의 하나로 남아 있는데 이러한 고질적인 관념도 지양될 수가 있다. 문중이라는 관념은 교육과정의 인연으로 깊어지는 것인데, 전국이 하나의 교육장(敎育場)이 됨으로써 그러한 배타성을 방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곱째, 전수도량의 설치는 고려시대와 같이 종파를 형성할 우려가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과는 사정이 다르다. 지금은 조계종이라는 하나의 종단이 전통불교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으며, 전수도량은 불교학의 연찬과 교수를 전문화할 목적으로 그 밑에 설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재의 법화종(法華宗),  법상종(法相宗),  진언종(眞言宗),  화엄종(華嚴宗),  원효종(元曉宗)과 같은 신흥 종파들을 견제 내지는 흡수하는 데에도 오히려 공헌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전수도량의 설치는 여러가지 실제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 기대된다. 따라서 불교대학과 강원을 포함한 우리 종단의 전반적인 교육계획 수립을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서 이것을 제기해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