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노트] 5. 형제 관계

정신분석 노트(5)

2008-01-09     정희용

(1) 형이 되는 길

오코노기 케이고(小此木啓吾)

[제임스딘]의 명화 [에덴의 동쪽]의  테-마는  형제간의 숙명적 대립이었다.

대개는 엄격한 도독적인 부친의 입장에서는  형은 자유를 즐기고 인생을 향락하려는 아우를 사사건건 멸시한다. 형은 사리도 알고 교양도 있으나 인간의 애정이나 의존심을 내심에서는 비난하는 심정에 있다. 아마도 이 형과 아우와의 차이는 어린 시절에 엄마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이리라.

형은 엄마에게 응석 부리고 싶어도 동생이 있는 것이다.

 [ 형이니까 점잔치요?  동생은  작으니까 어쩔 수 없지요>  형님은 참 점잔쿠만!  동생과는 전혀 다르구만.....   . ]이런 시긔 엄마의 교윱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형쪽에서 보면 동생은 제멋대로이고,  욕심꾸러기이다. 동생이 보면 형은 위선적이고 소심장이고 간사하고 인간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형님 심리에는  ㄷ대개의 경우 아우에 대한 질투와 선망의 정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형은 자기의 이런 저열한 감정은 모두 극ㅂ복하였다고 확신하고 보다 형답고 보다 따뜻하게 동생에게 대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反動形成이었던 이 형의 태도도 차차 몸에 배게 되어서 형다운 것이 진짜가 돼 버린다.  더우기 그 가정에 아버지나 모친이 없을때는 문자그대로 형이나 누나가 아버지 대신 엄니 대신 돼 간다.

그리고 이러한 형에의 길을 훌륭하게 해낸 인물이 사회적 지도다다 되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類의  인품을 가진 현대사회인으로는 종종 야구 거인군의 川上 감독이나 롯데의 金田 감독을 든다.

저들은 둘이 다 몇사람의 帝妹를 돌보면서 立身하였고 그러한 노력은 동시에 사회인으로서의 완성에도 연결된 사람이다. 동생들이 골치거리이기는 하지만  미소라. 히바리(가수)도 역시 이런 류의 (누님道)를 실천한 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2) 형제의 상극

   그러나 한편,  이 형에의 길이란 것이 동생에게 언제나 반드시 감사와 존경의  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에덴의 동쪽]과 같은 형제관계는 종종 일어나는 것이다.

    일본에서 옛부터 유명한 것은 願類朝 그의 동생 義經이고 가까이는 太帝治와 그의 형(元靑森縣知事)과의 관계가 있다.  太帝治의 경우 그 지방 대지주의 아들로서 형은 현 지사까지 된 보수적 명사이고 그 지방  기존 사회층의 대표적 인물인데 반하여 동생 태제치는 학생시대부터 맑스주의로 넘어가 시종일관 이 형에게 반항을 계속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항상 형의 우월감과 아우의 열등감이 따라다닌다. 아마도 형이 보기에는 태제치는 아직 젖이 덜 떨어진 어린 동생이었으리라.

   그리고 이런 종류의 형제의 상극은 심하게 되면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저 아벨과 카인의 비극이 된다.  형 카인은 땅에서 난 식물의 열매를 여호아 신에게 바쳤고,  동생 아벨은 양을 바쳤는데 여호아신은 아벨의 獻品은  좋아했지만 카인의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질투심에 미친 형 카인은 아우 아벨을 죽여 버린다. 이윽고 카인은 에덴동산(카인과 아벨의 부모인 아담과 이브의땅)을 떠나 [에덴의 동쪽]에 있는 (노도) 땅에 살게 된다.

   이것이 [카인의 저주]인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키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이것이 인류 최초의 [동생 죽이기]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인류 최초의 [사람 죽이기]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것이다. 이 최초의 살인,  바꿔 말해서 살인의 原型은 형제살인이라는 사실이다. 

 

(3) 사랑과 미움의 병존

   그리고 이 사실은 [형제는 타인의 시작]이니 [형제는 최초의 적]이라는 말에서도 짐작이 간다.

   적어도 형제 자매 사이,  그중에서도 만약 동포가 이 둘 뿐이라면 이들 둘이에게 있어 최초의 만남은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미움)에서 일어난다.  형에 있어서 동생은 어머니와 자기 사이에 침입하는 기분나쁜 방해자이니 이때 형에게 먼저 일어나는 것은,  동생을 배제해 버리고 싶다는 심한 怨心이다.

  그리고  이 미움은,  그것이 아주 어린 유아일 때는 아래 동생을 [내다 버려]  [누군가에 줘 버려] [짓눌러 버려!].....   .  이런 원시적 파괴 —  배제충동이다.

   그러기 때문에 형답게 되려면 어떻게든지 이 미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형이 아우를 사랑하게 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은,  어머니와 아들,  남자와 여자의 사랑보다도 더욱 사회성이 많은 애정이고 우애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아지고 있다.

   형제애는 서로가 먼저 대립하고 경쟁하는— 자기와 다른 [個]로서 존재한다.  이 현실을 서로가 인식한 연후에 이뤄지는 애정관계이고 그것은 본능적인 것을 넘어선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사이에 두고 성립하는 애정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형제관계는 부자 모자관계 이상으로 사랑과 미움의 안비바란스(상반병존)를 의식하기 쉬운 관계이다.  한편에서는 항상  미움,  경쟁,  질투,  선망,  비교(우월감과 열등감)등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또 한편에서는 자기 일같은 동일시(공감),  아니 그보다 자기 이상으로 소중히 생각하는 자기애적인 애정,  우정,  연대감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병존해 간다. 그래서 싸움이 애정교류이고 돌봐 주는 것이 우월감의 표현이고 응석부리고 기대는 것이 열등감의 체험이라는 이런 복잡한 체험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라 하기 보다는 오히려 원시적 자기애의 작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원래는 방해자이었거나 경쟁 상태였던 존재를 자기와 같은 존재라는 形으로 동일시하는 이 애정관계의 기본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기애적동일시의 가장 극단적인 것을 볼 수있는 것은 쌍생아의 경우이다.  그중에도 一卵生 雙性兒의 경우에는 이 상호동일시가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나 동시에 다른 한편에 경쟁심이나 대립심도 서로가 제각기의 자아를 뚜렷이 하려고 하면 할수록 격렬한 것으로 돼 간다. 사랑과 미움의 안비바란스는 삼각하게 돼 간다.

 

(4)  형제애의 원리는

   여기서 내가 왜 형제관계를 들고 나왔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여야겠다.

   대개로 민주주의 원리의 성립 그 자체가 세로(縱)관계에서 가로(橫)관계의 원리에 유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그중에서는 부친 不在라 이르는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사회관계의 원리로서 어떻게든지 재발견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이 형제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제관계를 생각하면 곧 생각에 걸리는 것은 우리 형제관계의 특수성의 문제다.  동포순위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형제관계가 [가로관계]이기보다는 역시 하나의 [세로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족관계 속의 형제로 자라난 우리들에게는 참된 민주적 [가로관계]가 몸에 붙지 않는 것도 극히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점점 [가로관계]의 시대가 핵가족화의 동양과 함께 찾아들게 되니 이번에는 [아이는 둘만 두자]가 돼서 사람들은 소수의 형제관계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시대에 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번에는 부모와 하나나 둘,   즉 외동아들이나 막내둥이가 되어 부모의 사랑을 둘러싼 애정의 쟁탈이나 반복하게 되어 언제까지나 형제 동기간의 연대감이 몸에 붙지 않아 참된 형제애가 성립하지 못한 채 사회인이 되는 사람들이 늘어가지나 않을까.

   금후 사회에서 이 인간관계의 구조를 이해해 가는 과정에 있어 형제관계의 연구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가 되는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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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페이지에서 계속)

   참호속의 바참한 광경을 바로 볼 수가 없다.  몇 분 전까지도 대화를 나눴던 친우들의 싸늘한 시체를 보는 순간 필자 자신도 살아있는 것 같질 않았다. 살을 꼬집어 보았다.  아프다.  필자 혼자만이 살아있다는 현실로 돌아왔을 때 [후.. ] 긴 한숨과 함께 동녘 하늘에서 미간백호광을 비치시고 계신 부처님을 본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본 것이다.

    이 기적에서 필자의 신앙심은 더욱 강해져 갔다.  그리고  그 신앙심은 어떤 고난 중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가져오고,  [직심시불]의 진리를 알 것만 같았다.

    부처님께서 업에 따라 극락에도 나고 지옥에도 떨어진다 하신 설법도 이제는 그 참뜻을 알 것 같다.

   [지옥도 극락도 오직 마음 속에 있다.  따라서 진실한 신안심 속에 극락은 상주한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