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생애

특집/전통사상의 현재

2008-01-09     목정배

  신라전역에서 무진 연기의 화엄사상의 철리를 심으면서도 동해의 한적한 보타 낙가산 가슭에서.......

 동해의 낙산사에서 해돋이를 보아라. 그 곳엔 관음의 진신이 용출할 것이다. 의상스님은 보타 낙가산에서 백의관음을 친견한 고승이다.

 송나라 고승전에 의하면 그의 속성은 박씨요, 계림부(鷄林府)사람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나 二九세 때 경주의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의 출생 연대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이설이 있으나 해동고승전에서는 신라 진평왕 四二년 (六二O)이지만 삼국유사에 인용된 부석사 본비 (浮石寺本碑)에 의하면 당의 무덕(武德) 八년(六二五)에 태어나 二十세에 출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부석사 본비설을 따른다.

 출가 이후 의상스님은 나이가 八세 앞서고 학덕이 고매한 원효스님을 쫓아다니며 학문을 하기도 하였다. 원효스님은 그 당시 학덕이 수승한 낭지(郎智)스님의 문하에 수학한 적이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의상스님도 덕망있는 스승을 찾아 불교의 교리를 넓히는데 전략한 구도자 였다. 대각국사의 문집에 의하면 보덕(普德) 스님의 법좌에서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열반경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보덕스님은 고구려가 도교(道敎)를 맹신하므로 백제 완산 (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비래방장하여 경복사(景福寺)를 창건하여 열반종을 개창한 스님이었다.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의 동지적 구도열은 대단하여 그들은 항상 행동을 같이하였다. 그리하여 진덕여왕 四년(六五O)에 요동을 겨쳐 입당구법하러 떠났다. 마침 그 때 고구려 순라꾼에 발각되어 입당의 뜻이 좌절되고 말았다. 한번 구도의 열이 오르기 시작한 정열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법이다. 교학이 만발하고 각종(各宗)이 경쟁하는 당나라 그 곳에서 학문의 폭과 깊이를 연마하려 하였다.

 의상스님은 제 二의 구법을 결행하였다. 그 때도 원효스님과 함께 하였다. 그때가 문무왕 원년 (六六一)이다. 백제가 멸망하였으므로 해로를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전날의 육로구법의 실패를 해로에 의하여 성취하려 하였다.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서해 바닷가로 향하여 관악산에서 몇 날을 묵었다고 한다. 삼막사(三幕寺)란 절이다. 당시에 일막 . 이막 . 삼막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삼막사만이 현존하고 있다. 해로를 찾아가는 도중 이 곳에서 야숙한 것이 아닌가 한다.

 원효스님의 토총설화는 여기서 생략하지만 의상스님의 구법은 종교적 생동감이 감도는 부분이 많다. 해동의 화엄초조가 되기 전에 선묘(善妙)와의 인연은 무진연기를 상징적으로 설파한 것이 아닐까. 이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의상스님이 신라방의 한 신도 집에 머물고 있을 때, 그 집에있는 선묘(善妙)라고 하는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가까이 하고 싶어하였으나 이를 알아차린 의상스님은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 선묘는 의상스님의 굳은 의지를 보고 도심(道心)을 일으켜 『생생세세(生生世世)에 화상(和尙)님께 귀명하겠읍니다. 제자는 반드시 시주가 되어 스님께서 필요하는 생활 자료를 제공하겠나이다.』라고 하며 자기 소원을 말하였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의상스님은 장안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삼장(智儼三藏)을 스승으로 모시고 七년 동안을 공부하여 화엄경의 묘지(妙旨)를 전수받았다. 그는 귀국할 때 지난 날 그 신도 집에 들러 감사의 뜻을 표하고 배에 올랐다. 선묘는 미리 의상을 위해 마련한 법복등을 가지고 급히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스님이 탄 배는 벌써 먼 바다 위에 떠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본 마음은 법사님을 공양 하는 일이옵니다. 원하옵건대 이 옷함이 저 배에 닿기를........., 하고 옷함을 던졌다. 또 맹세하기를 『이 몸이 변하여 법사님이 탄 배가 무사히 신라 땅에 닿아 그 나라에 법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비옵니다.』하고는 바다 속에 몸을 던졌다. 선묘의 애틋한 마음과 정성에 모든 신들이 감동하여 그녀 뜻대로 한 마리의 용이 되어 의상 스님이 탄배를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에 닿을수가 있었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스님은 온 나라에 화엄불교를 널리 펴기 위한 좋은 땅을 태백산에서 구하였으나 많은 무리들이 이를 막고 방해하자 선묘의 어리고 착한 넋은 사방 십리 넓이의 큰 반석이 되어 공중으로 떠 다니며 잡된 무리들을 모두 쫓고 의상대사의 화엄불교를 길이 수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의상스님은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가 되었다. 이것은 부석사 창건연기이기도 하다.

 의상스님은 지엄스님의 문하에서 화엄교학의 진수를 체달하였다. 입당구법의 햇수가 八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화엄의 광대 무한한 교리를 七언 三十구 二백 一十ㅇ자에 핵섭할 수 있음은 의상스님의 학문이 투철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五四각으로 된 해인도(海印圖)이다.

 지엄스님은 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상찬탄복하여 이르기를 (화엄의 큰 뜻이 이한 인(印)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하였다. 이로 본다면 의상스님의 화엄교학의 이해가 얼마나 위대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깨달은 자는 항상 가깝게 하는 무리가 있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다. 무명중생인 것이다. 이 무리를 구원하고 구제하는 것이 깨달은 자의 의무다. 의상스님의 깨달음은 중국 화엄가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높은 위치에 도달 하였다.

 의상스님은 학문적 완성에 의하여도 귀국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귀국을 재촉한 것은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상황이었다. 학문의 개발은 당나라에서 완성하였다지만 조국을 저버릴 수 없는 국가의식이 강열하였기 때문에 스님은 더욱 귀국을 서둘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신라가 통일하였지만 이것은 통일을 수행하기 위한 신라측의 방안이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신라마저 당나라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당 고종이 설방(薛邦)을 대장으로하여 군사 五十만을 출병하여 신라 원정계획을 수립하였다. 당 함형(咸亨) 二년(六七一) 즉 문무왕 二년인 것이다.

 이와 같은 급보를 입수한 의상스님은 촌각의 지체없이 귀국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상스님의 투철하고 확고한 국가의식을 찾아 볼 수 있다.

 의상스님의 국가의식은 타국에 향한 것과 자국민에 향한 양면을 살필 수 있는데 자국에 대한 국가관은 국민에 향한 것이다. 이것은 치자의 덕화가 얼마나 큰가를 시사한 것으로 『왕의 정교가 밝으면 풀언덕으로 땅에 금을 그어 성(城)이라해도 백성이 감히 넘나들지 못할 것이오며 또한 재앙을 맑히어 복을 증진할 것이나 정교가 진실로 밝지 못하면 장성(長城)이 있다해도 재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문무왕이 축성으로 외세의 세력을 축출하고 경도를 수비하려고 하였으나 의상스님은 축성공사보다 정교의 바른 법으로 백성을 강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불교의 바른 법을 정치에 선용하는 길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귀국이후 국가의식을 고취함과 동시에 스스로 체달한 화엄교학을 전교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청년기에 출가한 황복사에서 일승법계도를 강의한(六七四) 기록이 보이며 또한 문무왕 一六년 (六七六)에는 신라 화엄도량의 남상이 된 태백산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

 의상스님이 부석사에서 화엄의 교학을 전수할 때에는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특히 진정(眞定)의 어머니를 위한 추동(錐洞)  법회에서 화엄을 강의할 때 제자의 무리가 三천이나 되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스님의 화엄교학이 얼마나 심원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의 제자가운데 십대 제자가 있다. 즉 오진(悟眞) . 지통(智通) . 표훈(表訓) . 진정(眞定) . 진장(眞藏) . 도융(道融) . 양원(良圓) . 상원(相源) . 능인(能仁) . 의적(義寂)  이다.

 의상스님은 원효스님처럼 저술활동보다 화엄전교에 일생을 바친 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저서는 앞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와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이 있고 일실본으로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초記) .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 등의 목록이 보인다.

 그의 원대하고 열열한 신앙은 신라에 화엄사상을 심는데 정성을 바친 듯하다. 왜냐하면 화엄의 대찰이 十(십)개 사찰이 있은 것을 보면 그의 영향이 대단한 증좌다. 화엄 十(십)찰이 위치한 것을 보아도 신라 전역에 두루한 것이다. 즉  공산(公山) 미리사(美理寺),  지리산(地異山) 화엄사(華嚴寺),  북악(北岳) 부석사(浮石寺),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태주(態州) 보원사(普願寺),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  삭주(朔州) 화산사(華山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비슬산(毘瑟山) 옥천사(玉泉寺),  전주모산(全州母山) 국신사(國神寺) 등 이다.

 신라 전역에 무진연기의 화엄사상의 철리를 심으면서도 동해 한적한 보타 낙가산 기슭에서 『옛날에 당신이 미타불 앞에서 무릎을 꿇었듯이 이 몸도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세세생생의 귀명을 맹세하옵니다』라고 백화발원한 것은 신앙의 핵심을 송두리째 바친 것이라고 하겠다. 화엄을 전교하면서 관음보살께 귀명한 신앙은 너무나 인간적인 면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토록 교학과 신앙에 깊고 열열한 의상스님은 성덕왕 원년(七ㅇ二)에 七八세의 노령으로 시적하였다. 시적한 이후도 화엄의 신앙을 법성게에 의빙하여 지금껏 전달하고 있다.

 의상스님은 우리나라에서도 존경을 받지만 일본에서는 선묘와 나란히 존숭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