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을 위한 불교이해 (5)

2008-01-08     관리자

       종교와 이지가 상반하는가.

       만약 학술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현대 종교가 될 수 없다.

    범어로 윤회는 sam sara다.  流轉,  輪轉의 뜻이 있다. 시냇물은 흘러서 강으로 가고 강물은 바다로 간다.  바닷물은 다시 안개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눈도 된다. 그래서 다시 땅으로 내려오고  시내로 흐른다.  이래서 유전이다.  이 윤전은 시작도 끝도 없다.  수레바퀴가 도는 것 같다. 번뇌와 업으로 인하여 중생들은 三界六進의 迷의 세계를 돌고 돌며 죽음과 남(生)을 반복하며 돌고 돈다.   이 사회에서 울고 웃고 한숨 짓고 다시 죽어 간다. 그러면서 그 사이에 인간은 부단히 자기와 자기세계를 만들어 간다.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듯이.

   어떻게 하면 윤회의 쇠사슬에서 벗어날까?  다음에 다시 계속한다.

    [1]  理知와 불교

   인간이 동굴생활을 하고 있던 시절로부터 우주여행을 꿈꾸고 수중도시를의 논하는 현대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가있다.  이 변화를 할말로 문화의 발달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화의 발달이란 理智의 진보를 의미한다.  엄밀히 말해서 오늘의 문화가 과연 참된 의미의 이지의 진보냐? 하고 의문을 받는 것을 고려해 넣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문화의 발달과 이지의 진보와의 등식관계는 부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지식이 향상되고 이론이 보다 세분 조직화하며 생활이 부단히 합리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초에 강한 이지의 빛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화의 진보란 이지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다. 문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불교도 이지에 의하여 이해되고 또는 이지가 끊긴 이지에 의하여 불법이 밝혀진다. 그것은 불교의 교의적 체계가 역시 이지적 체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한편 불교가 염원하는 불법은 이지가 끊긴 근본지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교학적 입장에서만 말한다면 불교는근본적으로 이지주의다.그러므로 불교는 학술일 수도 철학일 수도 있다. 다른 모든 학술과 나아가는 방향이 같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문화도 이지에 의하여 진보하고 불교도 이지에 의하여 이해된다.  우리 인간사회의 모두는 이지에 의하여 기초가 굳혀지고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은 다툴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아무 종교에나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이지의 진보와 신앙의 이해와는 정반대의 관계에 있어 왔다. 즉 이지의 진보는 종교를 버려야 한다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지의 진보는 종교영역의 축소를 의미했다.  고도의 세련을 거친 오늘의 종교에도 역시 이런 면이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보다도 종교는 반이지적이라는 생각에 기인한다.  知는 신앙에 유해하다는 종교의 태도가 종교의 지적 이해를 거부하거나,  그가 견지하고 있는 종교적 교의가 지적 욕구를 포용하지 못했거나  공격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술,  철학의 욕구를 감당하지 못하는 종교는 오늘의 종교로서는 존립하지 못한다. 오히려 철학이 미치지 못한 곳을 향하여 그를 인도하고 그가 막다른 장벽을 타개하는 활로를 보여 주는데 오히려 오늘의 종교의 참 의의가 있다.

 [2]  불교와 불법

   그런데 독자는 필자가 여기서 불교와 불법을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에 착안했으리라.  불교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짐짓 그리한 것이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거기에는 부처님의 말씀이나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여러 성인의 말씀과 그에 관련된 모든 사상을 포함한다. 거기에는 논리와 사고가 분명하고 우리 경험법칙에 의한 이해를 충분히 충족시켜 준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에 포함된 넓고 깊은 사상은 우리 생활 주변에 일어나는 새로운 여러 사태에 대하여 명확한 지침과 판단의 기준을 제공한다.  이것은 이미 나타난 事象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여러 사상까지를 포함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불교를 이해하고 깊이 연구함으로써 인간이 지혜스럽고 행복하게 살며 인간사회가 평화롭고 번영되게 할 모든 원리를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인격 향상에 관련된 도덕적 원리와 인력개발을 위한 실천적 방법과 사회의 조직과 운영의 원리와 사회인으로서 있어야 할 인간의 자세를 가르친다.   그래서 안이한 표현으로 불교에는 평화와 행복과 발전에 관한 가르침이 담겨져 있다 해도 좋은 것이다.

[3]  실천을 통한 주체적 파악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은 그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교조나 덕목을 배우는데 있지 않다. 이 점이 재미있는 점이다. 물론 부처님의 말씀에 의한 가르침은 불교의 골격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교의 골격을 유지하고 활동적으로 살려 나가는 요점이  따로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수행이다.  말씀으로 가르친대로 행하는것이다. 이 행은 밖으로 나타내는 효과에  의미를 두는 수행보다도 안으로 마음에 이뤄지는 수행으로 도달한 마음의 경계 수행에서 이루어진 자기에 참 의미가 있다.  수행에서 이뤄진 참 자기—   이것이 불교를 생기 없는 덕목이나 교조의 나열이거나,  삭막한 교학이기 쉬운 고전적인 교훈에서 산 의미를 알게하며 살아 있는 불교로 살려 나가는 관건이다.  다시 말하면 수행에서 도달한 참 자기의 활동이나 존재방식,  그것이  가지는 의미의  설파가 바로 불교의 원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참자기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고 또한 참자기에 도달한 상태를 가르치며,  참자기의 활동방식을 가르친다.  이것이 불교다.

[4]  [ 참자기]가 의미하는 것

   그런데 이 참자기로 표현되는 경계에는 중대한 의미를 내포한다.  자기라 하면 우리는 흔히 일체 객체를 인식하고 그에 상대하는 개아를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의 자기,  참자기란 그것이 아니다. 주체적인 자기라는  점에서는 개아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참자기는 상대적인 의미의 존재가 아니다.  우주와 함께 하고 시간과 공간이 그와 함께 하고, 자기 안에서는 우주도 시간 공간도 우주  시간 공간 구실을  못하는 ,  우주도 시간 공간도 아닌 자기도 아닌—     이  경계다. (이때의 경계란 경계가 아니지만) 五

   다시 말하면 분별 대립 인식 이전의 근원적 존재이다.  근원적 실재—  이것을 참자기라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참자기에 이른다거나 참자기의 발견이나 참자기에 도달했다거나 참자기의 존재 방식이라거나 참자기의 활동 방식이라는  말은 바로 근원적이며 주체적인 진리에의 그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스스로 이루고,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 경계에 도달하고 진리 자체를 말하고 진리의 구체적  작용,  현실적 활동 양상을 말한다..

   이와같이 불교에 있어서의 [자기]  또는  [참자기]란 실로 궁극적 진리를 내포하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5]  불법은 어떤 것인가

   그러면 불법이란 무엇일까?

   위의 말을 흘러내는 근원 실재다. 거기에는 말로 이를 수 없다.  생각으로 복탁할 수 없다. 비유로나 형용으로 짐작할 수 없다. 인식이나 사유의 대상이 되는 자가 이니고 인식사유의 주체며 존재가 아닌 절대적 실재며 분별 상대적 관계가 아닌 全一 全性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숨은 것이 아니다. 초월자도 아니다.  현실의 깊이 속에 숨은 자도 아니다. 법칙이나 이념이 아니다.  그는 바로 현실이다.  통째로 있는 현실이다.  분단적 인식을 거부하는 있는 대로의 실재다.  보고 듣고 말하고 시냇물은 잔잔하고 송아지는 움매하고,  토끼는 뛰고 구름은 흐른다. 불법은 여기 있다.

   불교는 부처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 마음이라 하는 선은 바로 불법의 실천적 추구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은 불교의 원형이다.  불교는 불법의 분별 해설이다.  불교는 지엽이고 불법은 밑둥이며 뿌리다.  불법을 알면 일체 불교경전을 앞뒤로 외우고 능히 해설하여 돌정승도 귀를 쫑긋하고 머리를 끄덕하리만치 설하더라도 불법과는 아무 상관 없다.

   부처님 가르침의 우월하고 거룩하고 영원히 빛나는 진리성은 이와같은 불법의 진실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이나 생각이나 고상한 이론으로 꾸며지는 소위 종교란 계절과 함께 변하는 나뭇잎이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만고장불멸의 태양이다.  천상천하 무엇과 비길 것이 없다. 견줄 말이 없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불자는 모름지기 불법이 의미하는 것을 배우도록 해야한다. 이것 없이는 불자의 행복을 반감한다.

[ 6]  理智가 끊인 智

   본란은 앞서 [불교는 이지에 의하여 이해되고 이지가 끊긴 이지에 의하여 불법이 밝혀진다.]하였다.

  이론과 사유의 세계는 이지가 지배하는 세계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  말씀을 통하여 알수 있는 부분은 이지가 지배하는 경계다 . 여기까지는 이지로 알 수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이나 언행이 모두가 이론과 사유로 알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 이지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이지로 알 수 있는 것은 실로는 부처님의 겉경계요  진면목은 理智의 知가 끊긴 곳에서 열리는 것이다.  무분별지,  근본지라는 智는 범상적 知가 아니다.   그렇다고 무지몽매도 아니다. 반야(prajna)가 그것이다.  [이지가 끊긴 이지]라 함은 반야를 의미한다. (반야에 대하여는 별고 반야심경 강의 참조) 실로 불법의 법은 반야에 의하여 밝혀지는 것이다.

   우리는 경이나 조사어록에서 [일심]  [정념] [무심] [무념] [삼매] [방하착] [무지] [쉬어가라] [말이 끊겼다] [對待가 끊겼다.]는 말을 본다.  이것이 이지의 한계를 넘어선 법의 경계를 보이게하는 입구며,  반야광명이 흘러나오는 문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분별,  사량,  복탁하는 생각이 쉰 곳에 열반 대지는 열리는 것이다.

 인생이 갈길

   우리는 온갖 노력,  온갖 지식을 통하여 줄달음친다. 이런 생??태도를 우선 건실하다 하리라.  그런데 목표가 뭐냐에 대하여는 아직도 문제가 남아 있다. 야심을 위하거나 물욕 충족을 위한 목표라면 자기를 망치기에 우선은 알맞은 목표다. 왜냐하면 물욕이란 필경 공허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충족 시키려고 해봐도 필경 허욕과 갈증을 채우지 못한 채 죽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야심이란 다른 사람을 제쳐 놓은 이기적인 충족욕인데 야심은 대립 갈등이 격화하여 스스로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만든다.

   범부의 생각에는 바람직하다는 소망이 만약 그대로 달성 됐다가는 자기도 남도 망칠 소망을 곧잘 품고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