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의상사상(義湘思想)의 사회적 성격

특집/전통사상의 현재

2008-01-07     김영태

  교단의 중흥은 물론 그 원만하고 투철한 사상과 맑고 깨끗한 몸가짐으로 후진을 양성하여。。。。。

  1 해동(海東)에 난 큰 나무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로 가서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에 지엄(智儼)화상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 전날 밤 지엄(智儼)스님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에 한 그루의 큰 나무가 해동(신라)에서 나서 가지와 잎이 매우 무성하여 그 그늘이 당나라에까지 드리웠으며 그 나무위에 봉황의 집이 있으므로 거기에 올라가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가 하나 있는데 그 빛이 멀리까지 비치었다는 것이다. 그 꿈을 꾸고난 지엄화상은 이튿날 아침에 깨끗이 청소를 하고 기다렸더니, 바로 해동(신라)의 의상법사가 찾아왔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낱 꿈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의상이라는 한 스님이 보여준 그 생애의 진가(眞價)가 잘 상징되어 나타나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의상은 신라가 낳은 위대한 고승이지만 그 그늘은 중국을 덮었고 그 빛은 멀리에까지 비치었기 때문이다. 스승 지엄화상이 화엄의 묘의(妙義)를 七十二개의 법계상도(法界相圖)로 나타내 보였을 때 의상은 하나의 법계도인(法界圖印)을 그려서 스승에게 보였다. 그 때 지엄은 의상에게 

『그대의 이 한 도인(圖印)이 나의 칠십이도(七二圖)보다도 훨씬 훌륭하다. 그대야말로 법성을 증득하고 부처님의 참 뜻을 통달하였구나.』하고 감탄하며 그 도인(圖印)에 해석을 붙이게 하였으므로 거기에 삼십구(三十句)의 게송을 지었으니 그것이 유명한 법성게(法界圖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스승을 능가하였다는 것만이 아니고 의상의 한 덕이 당나라 불교계에 일깨움을 더하여 주었다는 뜻도 된다. 그는 스승 지엄화상이 돌아간 (六六八)지 삼년 후(六七一)에 귀국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스승의 뒤를 이어 종남산 지상사를 중심한 중국 당시의 화엄학계를 지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동문으로 알려진 중국 화엄종의 완성자 강장국사 현수 법장(康藏國師 賢首 法藏)도 그에게 배웠으리라고 볼수 있으니, 법장은 비록 지엄화상에게 화엄을 배우기는 하였으나 지엄 입적때에 26세의 행자로 있다가 그 2년후에 비로소 사미계를 받은 후진이기 때문이다. 법장이 화엄학을 대성시킨 것에는 지엄화상 뿐만이 아니라 의상의 힘도 적지 않았으리라고 볼 수 있다. 지엄이 입적전에 의상을 칭탄한 것이나 그 후의 위치 등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중에 화엄종을 대성시킨 법장이 의상에게 서신과 저서등을 보낸 사실들을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당나라 지상사에 있을 때 유명한 도선율사(道宣律師)가 그 이웃 절에 있으면서 언제나 천공(天供 하늘 음식의 공양)을 받았는데 그 천공을 대접하기 위해서 의상을 초대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바릿대를 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천공이 도착하지 않으므로 결국 의상은 그냥 돌아갔는데. 의상이 간 뒤에야 天使가 음식을 가지고 왔으므로  도선이 천사에게 늦게 온 사유를 물은 즉 천사는 『동구에 신병(神兵)들이 옹위하여 막고 있어서 들어오지 못하다가 이제 신병이 물러갔으므로 들어왔읍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도선은 의상에게 화엄신중이 옹위하고 있음을 알고 그 도력이 높음에 감복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율종(남산종)의 창종자이며 지율(持律)과 학덕이 높기로 유명한 도선율사(道宣律師) 보다도 의상의 도력이 높다는 것을 보인 설화로 볼 수 있으나, 이와 같은 설화가 나올만큼 그가 당나라 불교계에 끼친 영향력이 컸고 또 그 학덕이 중국 고승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할 것이다.

 당시 통일전쟁에 시달리고 당군(唐軍)을 반도내에서 몰아내는 등 지칠대로 지친 신라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국가사상 선도의 대법사로서 민족 통일대업을 완성케 하였던 의상대사는 실로 해동 신라의 거목이었을 뿐 아니라, 그 그늘이 중국을 덮은 큰 나무였고 그 광명이 멀리 비쳤던 마니보주(摩尼寶珠)였다고 할 것이다.

  2  신라 사회(승僧 .속俗 )의 스승

 사문(沙門)은 出世大丈夫라 하지만 의상대사야 말로 의지가 강한 대장부였고 훌륭한 사문이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기의 분수를 지켜서 해야할 일만을 해나갔던 수도자였었고 어떠한 경우에도 자세를 허트리지 않고 불자의 사명을 다한 중생 교화의 대법사였었다.

 당나라에 가서 좀 더 많은 불법을 배우겠다는 젊은 날의 꿈이 중도에서 무참히 꺾였으나 십여년이 지난 뒷 날에 기어이 혼자서 뜻을 이루고야만 그였다. 동행하던 원효대사가 『당나라에 가서 무엇을 배우겠는가?』하고 되돌아 가버렸지만, 죽어도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심(서사무퇴誓死無退)으로 당나라에 도착한 그는 아릿다운 이국 처녀 선묘의 끈질긴 유혹의 욕정을 도리어 대서원 (大誓願)을 발하는 보살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조국의 위기를 알리기 위하여 그리고 어려운 시기의 조국에 도움되는 일을 하기 위하여 그는 급한 걸음으로 귀국하였다. 그 때 비록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되었다고는 하나 신라까지도 송두리째 삼키려는 당나라 군사들을 몰아내는 싸움 등으로 나라 안이 매우 어수선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한 때 그는 여러 곳으로 다니며 민심을 안정시켰고, 또 이 땅 신라의 관음도량(觀音道場)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불교인의 사명과 승려의 위치 등을 절감한 그는 승려의 자질향상을 위한 교육 수련의 근본도량이며 국민교화의 중심이 되는 부석사(浮石寺)를 세웠다. 통일 신라의 지리적 중심위치이며 승려 교육과 일반 교화의 최적지로 보았던 태백산 기슭에 더구나 당시 서울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영주땅에 큰 절을 세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어 부석사를 짓고 끝내 자기의 뜻한 바를 성취시켰다.

 배움을 찾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그 감화는 신라의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청상과부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며 군졸로 있던 효성이 지극한 한 노총각도 그 소문을 들었고, 그것을 알게된 어머니의 성화로 태백산 부석사로 가서 배움을 찾아 의상문하 십대덕의 한 사람이 되었던 진정(眞定)법사의 이야기는 그 한 예라고 할 것이다. 그 때 의상에게 배움을 찾아 모여든 무리가 삼천여명이나 되었으며 그러한 속에서도 그는 효성이 지극한 한 제자의 어머니를 위하여 석달동안 화엄대경을 강설하는 자상스런 법사였었다.

 그와 같이 의상은 오직 자기가 해야할 일만을 해나갔을 뿐이었다. 교단 내의 질을 향상시켜서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수도자의 바른자세와 상구보리(上求菩리)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출가 사문의 본분을 참되게 지니고 행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승려는 글자 그대로 국민을 교화하고 사회를 선도하는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상의 감화력이 태백산을 중심으로 하여 온 나라안에 펴져갔던 것이다. 의상이 생각했던 불교인의 자세는 철저한 수도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그 수도의 힘을 가지고 국민을 교화하고 사회를 선도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상대사를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감사하게 여기던 이는 바로 당시의 임금 문무왕이었다. 문무왕은 민족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영주(英主)였고 또 불교왕이기도 하였다. 왕은 그와 같은 의상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많은 전장 (田莊)과 종(奴僕)을 시주하였다. 그러나 의상은 『우리불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과 귀하고 천함이 없읍니다. 또 우리들 사문에게는 재산이라는게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논밭 토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어찌 종(하인)이 있을 수 있겠읍니까?

 이 몸은 법계를 집으로 삼고 바릿대 하나만으로 진리의 삶을 살아갈 따름입니다.』라고 하여 받지 않았다.

 그는 평생 법의(法衣)와 병발(甁鉢)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고 한다. 오직 제자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일깨워 사회를 교화하는 일에만 모든 힘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교인의 가야할 길을 그대로 어김없이 걸어간 정법의 사문이었으며, 교단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불법의 참뜻을 올바르게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민을 교화하여 국가에도 이익되게 한 글자 그대로의 진정한 법사(정법을 실천하여 모든 중생을 지도하고 일깨워주는 스승)이었던 것이다.

  3  구원(久遠)의 사표(師表)

 문무왕 二十一년 의상이 五七세 되는 六월에 왕은 신라 서울에 새로운 성을 쌓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 소문을 들은 의상은 급히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언덕에 금을 긋고 성(城)으로 삼아도 백성들이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며 태평성세를 누릴 수 있으나, 만약에 정교가 밝지 못한다면 비록 장성(長城)을 쌓아 놓아도 난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라는 글을 왕에게 보내었다. 이 글을 받아 본 왕은 곧 성 쌓는 공사를 중지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 의상이 그러한 글을 왕에게 보낸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때는 통일 전쟁이 끝난지도 오래되었고 당나라 군사를 몰아낸 뒤라 신라에 가까스로 평화가 찾아온 때였었다. 그러나 문무왕은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휴식할 틈도 주지않고 계속해서 성을 쌓고 또 보수하는 등의 큰 공사를 일으켰다. 문무왕 十三년에 당병(唐兵)과 싸우면서도 서형산성(西兄山城)등을 증축하였고 국원성(國原城) 등 아홉성을 쌓았으며, 十五년에는 안북하(安北河)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고, 十九년에는 남산성(南山城)을 증축하였으며 二十一년에는 또 경성(京城)을 새로 쌓을려고 하였던 것이다. 전쟁에 지치고 성 쌓는 공사에 피로할대로 피로해진 백성들에게 또 성 쌓는 일을 시킨다는 것은 백성들의 고달픔도 말이 아니거니와 국가 재산도 크게 축나는 일이었다. 국민의 안녕과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던 신라의 대법사 의상스님은 새로운 축성공사를 막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아끼는 애국 고승인 의상은 문무왕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에게 감화를 받은 문무왕은 그 다음 달(二十一년 七월) 에 세상을 떠나면서 『인력과 재력이 많이 소요되는 거창한 왕릉을 만들지 말고 불교식으로 화장을 해달라. 요긴하지 않는 과세(課稅)를 폐지하고, 불편함이 있는 율령(律令)과 격식은 곧 고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화엄을 중심으로 하여 교학을 크게 일으켜 교단의 중흥을 가져오고 그 원만하고 투철한 사상과 맑고 깨끗한 몸가짐으로 후진을 양성하여 삼천여명의 제자와 十六덕의 현성(賢聖)을 배출하였으며 통일대업의 어려운 시기에 국왕과 백성에게 큰 감화를 입혀 주었던 법사 의상은, 참으로 위대한 민족의 스승이었다. 그는 진정 통일 신라에 보여주었던 이 땅 구원(久遠)의 사표(師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여래의 후신이라고 받들었던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였으리라고 본다. 오늘의 우리 교단과 국가사회에서 볼 때 결코 의상법사는 천여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한 옛 고승으로만 돌려버릴 수 없는 너무나 오늘에 절실한 불교인의 자세이며 모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오늘에도 살아있어야 할 교훈이요, 영원히 간직되어질 귀감(龜鑑)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