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논단] 현대의 위기와 종교

삼라만상은 무기가 되었다.

2008-01-07     장병길

  『질문을 받지 않았을 때에는 알고 있었으나 질문을 받고 보면 모르겠다 』는 옛 그리이스哲人의 말이 있다. 위기란 무엇일까. 알것 같으면서도 막상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종교란 것도 마찬가지이다. 알듯하면서도 쉽게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말들이 우리 일상생활의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그것은 그렇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위기 몇가지를 주워보면 대충 이런 것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첫째로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의 곳곳에 아직도 무력의 위기가 존재한다. 날로 병기과학이 발달하여, 단숨에 전 인류를 섬멸할 수 있게 되었다. 땅위의 병기를 대기권으로 운반하여 하늘에서 폭탄을 낙하시켜 폭발시킬 수도 있다고들 한다. 그 무기생산도 옛날과 달라서 독점물이 아니다. 이쯤 되면 지구는 위기 속에 항상 갇혀있는 것이다. 또 이 무기는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는 나라나 민족을 아예 지구상에서 없애버린 적이 있다. 마야문화는 무기에 의해서 근절되었으며 이런 일은 30년전에 일본에서도 있었다. 하나의 도시가 깜박하는 사이에 없어지고 땅속까지 태워버렸다. 무기는 확실히 인간의 적이다. 그런데 수년전에 아세아남쪽 일각에서 기적이 있었다. 기적이라고 하면 세상사람들이 비웃을런지 모를 일이나, 무력으로서는 어느 나라보다도 강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나라가 무슨 까닭인지 총도 제대로 쏠줄 모르는 저개발국을 돕다가 물러섰다. 여하간에 무력에 이기고 무력에 지는 무력만연이란 위기 속에 우리 인류는 놓여있는 것이다. 그 위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현대의 위기 중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평행하여, 모든 것이 무기화되고 있다. 일기를 알기 위한 기상관측은 이제 무기화할 수 있게 되었다. 적지의 기상에 변화를 일으켜 온 땅을 홍수로 멸망시킬 수도 있고, 구름을 딴 곳으로 몰아서 적지에 햇빛만 내려 쪼이게 하여 땅위에 있는 식물이나 동물을 태울 수도 있고 말라 죽일 수도 있게 되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땅에서 생장하는 곡물도 병기화할 수 있게 되었다. 수년전에 아랍세계가 석유를 무기화하겠다 하여 석유시대의 전세계를 공포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었는가 하면, 잉여농산물을 다른 나라로 수출하려는 것을 막아, 식량부족의 나라를 굶겨 죽이려고도 했었다. 이렇게 이 지구상만이 아니라, 대기권에 있는 모든 것을 무기화하는 위기시대가 되었다. 실로 삼라만상은 무기이다. 그러나 삼라만상은 무기화하지 못했다. 꼬집어 말할 수 없으나 아직도 무기화하기 일보 직전에서 인류는 주춤하고 있다. 무엇때문에 주춤할까. 따져보아야 무기의 위기에서 인류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기계문명의 위기도 있다. 기계는 생활을 돕기위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생활의 방편이고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질 수도 없고 그 이상의 가치부여를 받을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기계는 우리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기계의 다량생산은 사람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탓으로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기계가 자본이 되었으며, 인간의 생각을 대신하여 주고있다. 계산기는 우리의 간단한 산수를 빼앗고, 컴퓨터는 우리의 기억력을 대신하고, 모태에서 자라야 할 태아를 유리관에서 길러 인간으로부터 부모의 정을 빼앗고, 다만 동물과 인간사이에 있는 애완적 애무를 남기게 했다. 사람이 인조인간(로봇트)이 되고 인조인간이 사람이 될 위기의 오늘이 되고 말았다. 또 다른 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기계에서 또는 제품제조과정에서 오는 공해가 인간을 위협하는 것이다. 땅속의 물마저도 생명을 위협하는 독소에 오염되었고 인스탄트식품에도 위험이 있으며 자연식물도 땅의 오염, 공기오염으로 먹을수 없게 되었다. 실로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갖게 한다. 보이는 것만에서 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는데에도 위기가 있다. 대항의식이 그중의 하나이다. 너와 나,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의 대치부터 시작하여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하늘과 땅에 이르는 대립의식은 인류로부터 공재의식을 앗아가서, 월남인을 이십세기의 엑소더스를 만들었으며 태극(太極)이란 一元의식을 버리고 정신과 물질이란 二分대립의식을 낳아서 물질에만 인간을 의존하게 하였다. 인구문제 자원문제도 대항의식에서 생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민족운동과 인터내쇼날리즘 사이에서 현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현대와 미래의 의식도 그렇다. 오늘만이 있고 내일이 없는 상대적 의식세계에서 인간은 질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자유, 평등, 평화 대 억압 불균형, 다툼이란 의식도 그 나름대로의 특수한 위기와 위험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종교적인 위기의 여러 상을 들추어 보면 다시 위기를 헤쳐나가는 길이 열리리라고 짐작된다.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다량생산시대란 주변의 탓으로 종교도 다량으로 생산되어 상대, 대치, 대립이란 종교적 위기를 조성했으며 自派優力을 갖가지 수단을 쓰면서 선전한다. 우리나라에서밖에 볼 수 없는 십자가 표식을 단 그리스도교회가 몇집 건너 하나씩 생산되고 있다. 그 건물은 종교적 건물이 아니고 보통 민가이며 혹은 살림집의 한 방이다. 한편으론 건물의 맘모스화로 선전효과를 노리기도 한다. 극장식 넓은 홀에 분칠한 장식, 콩나물과 같이 빽빽히 들어선 관중이나 청중을 수용할 건물도 하나둘이 아니다. 화려찬란한 몇십만원짜리의 카펫트를 깐 교회로부터 유리 창문 하나 밖에 없는 창고건물, 반짓다 버려둔 건물의 교회등은 비단 그리스도교에만 관한 일이 아니다. 모든 종교건물에 해당되는 알맹이 없는 허식이다. 여기에서 종교는 存亡의 위기에 빠진다. 또 신도를 다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 각 종교마다 신도배가운동을 벌린다. 전군신도화운동, 청소년교화운동, 종단종교에서의 전학생신도화내지 교화운동은 확대되어 전민족신도화운동으로 나아간다. 이 운동들은 자파강화운동인 것이며 종단의 귀족화 혹은 자본화와 직결되고 신입신도 한 사람이 돈으로 계산되는 것이다. 그런 신도를 얻기 위해 갖가지 묘한 수단이 안출되어 종교집단만이 아니라, 그 사회를 어지럽힌다. 확실히 인간이란 원점에서 볼때 나는 없고 종단 이름만이 지속된다. 이와 같은 종교적 위기로 인해서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종교의 무익론이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쯤되면 그 사회는 짐승들이 사는 숲이다. 그 숲속에 천차만별의 종교가 움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옆으로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와 그 분파인 군소집단이 나란히 서 있는가 하면 종으로는 민간신앙으로부터 민족종교와 세계성 종교가 겹쳐 있다. 세계종교는 민간신앙이나 민족종교의 바깥이나 혹은 그들 종교위에 군림, 지배하려고 하나 민간신앙인들이 종교의 진수를 지니고 있으며 그외의 모든 기성종교는 귀족화하고 자본화하여 주식회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 나라만의 일이 아니고 아시아부터 아프리카에 걸친 모든 지역에서 벌어진 종교적 위기이다. 불교, 유교, 회회교, 바하이교, 파시교, 그리스도교등이 옆으로나 종으로 엉켜 있는 다양한 종교세계이다. 이와 같은 다양성때문에 서로가 자연히 다른 생산양식을 낳고, 다른 사회, 문화 생각을 낳아서 모순과 충돌을 한 나라에서만 아니라 전세계에 일으켜 서로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콤뮤날(comnunal) 문제이다. 종파사회의 종교적 사회적 대립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그 대표적 예는 소위 신흥종교와 기성종교의 대립이며, 이 대립에도 서민층에서 새로이 일어난 신흥종교와, 어떠 모체종교에서 벗어나서 민족성을 띈 유사종교가 있다. 세계적인 콤뮤날로서 힌두교와 회회교, 유대교와 회회교의 대립이 있는데 이것은 내쇼날리즘으로 먼저 이스라엘공화국과 시리아, 파키스탄과 인도사이에서 벌어지는 발포전쟁에까지 발전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콤뮤날은 한 종단과 그 사회내에서 계급적인 모순을 점점 심화하며, 제국주의적 의식을 자아낸다. 말하자면 나와 적이란 적대적 대항의식에서 적을 무찌르는 공격적행동과, 나를 너와 구별하되 나를 너의 <위>에 얹어놓고 너로 하여금 나에게 신종토록 하려는 계급의식과 거기에 따르는 행동 태도를 구체화 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와> 불교, 불교<와>  유교 또한 한 종파내에서의 태고종<과> 조계종, 내지 법화종<과> 법상종이란 <과>의 의식은, 기독교의 섬멸이 아니면 기독교의 불교화 혹은 그 반대가 되든지, 태고종이 조계종화 하거나 그 반대가 되는 他派征服에 까지 이르러야 정지한다. 이것은 종교집단과 종교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이나 한 종교집단의 한 종파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조계종이란 종파내에서 민속적 불교신앙층과 교학적 신앙층 사이에 앞에서 말한 <과>의 側面이 벌어진다. 이때에 약세자는 강세자에 삼켜지게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사실이다. 그러한 <과>의 관계는 외국인 선교사를 파송 받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諸派와 민족종교 사이에서 더욱더 우심 (尤甚)하다. 이상과 같은 일반사회적 위기와 종교적 위기에 놓인 종교와 미래는 인간의 원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인구문제가 어제 오늘에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에는 지구표면상에 수용될 수 있는 절대량의 문제와 국가별 또는 민족별, 그리고 각 종교별의 상대적 문제가 있다. 즉 절대량의 인구는 이 이상의 인구를 증가하여서는 안될 것이나, 국가나 민족에 따라서는 인구를 늘려야 하는 경우가 있으며, 한 국가내의 절대량이 넘는 인구는 금후에 조절되어야 하나, 현 초과인구는 절대량이 부족한 국가에 이주되어서 균형이 이룩되어야 할 것이며, 식량, 연료, 물자등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별에서도 위와 같은 확신이 적용된다. 한나라는 국교 내지 공인교를 철폐하고 고루고루 종교를 믿도록 법적으로나 제도상으로 마련하여야 될 것이다. 서양에서 일어난 사랑의 종교나, 기성화하고 자본화하여 귀족적이 된 종교만을 배후의 권력이나 재력으로 선택하게 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왜 아랍세계나 그리스도교에서 아시아의 종교가 敬遠되어야 하는가. 사랑의 종교도 지금은 세계인구의 삼분지일정도를 포옹하고 있으나 벌써 그 인구의 일할이상을 잃고 있다니, 포화상태에서 쇠퇴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의 종교, 인의 종교, 모두가 믿는 사람들을 강화하거나 새 생명들을 권유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점에 되돌려서 제각기의 종교를 창조하게 하는데에 힘써야만이 지구에서 종교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 배운 교리에 사람들은 벌써 싫증이 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