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신라불교설화에 나타난 불기(不羈)의 인간상

논단

2008-01-07     황패강

 우리 나라 불교문화의 황금시대는 신라왕조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문학 특히 서사문학은 불교문학의 수준높은 것이었다.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신라문학을  대표하는 불교설화 가운데 이른바 「매이지 않은 인간상(不羈人像) 」의 문제다 신라불교설화가 창조한 여러 인물형 가운데 가장 특색있는 것으로 필자는 「매이지 않은 인간상」을 들고자 한다. 신라의 설화를 읽어 나가면서 가장 감동적인 것이 있었다면 「매이지 않은 인간상」과의 만남이 아닐 수 없다.  감동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충격적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딱딱한 껍질을 벗어던진,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  그런 까닭에 아무 걸림없이, 까다로운 절차도 없이 진실이 다만 있는 그대로 그 앞에 나타나는 그런 인간상이다. 

 우리는 신라불교설화를 통해서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매이어 있는 존재며 소견이 좁고,  통량이 옹졸한가를 아프게 느끼며 부끄러워 하게 된다.  진실을 보기에 부자유한 나 자신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된다.  

 형제의 눈안의 작은 티를 골라 내기에 급급한 동안,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에 힘과 열을 다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더욱 더 진실에서 멀어지고, 더욱 부자유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인간상이다. 

 그물에 걸려 사는 인간들이 그물에 걸려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어리석음을 눈뜨게 하고, 그물을 벗어나는 것과 자유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직접 체험시켜 준다.  

 그물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진실을 보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효  매이지 아니하다(元曉不羈)」라는 제목의 원효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떤  날 원효는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아무도 노래의 뜻을 알아듣는 이가 없었다.  오직 한 분 태종임금이 노래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스님께서 귀부인을 맞아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라로서는 큰 인물이 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태종은 사람을 시켜 원효를 불러오게 했다.  원효는 궁으로 오는 도중 문천(蚊川)시냇물에서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시었다.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원효는 과부로 사는 요석공주의 궁으로 인도되었다.  요석궁에 머물러 있는 동안 원효는 공주와 가까이 지냈다. 공주는 잉태하였고, 신라의 유명한 학자 설총을 낳았다. 설총을 낳은 뒤 원효는 속인의 옷으로 갈아 입고 이름은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고, 박을 두드리며 무애(無艾) 노래를 지어 널리 세상에 퍼뜨렸다.  그는 이 마을에서 저마을로 떠돌아 다니며 무애노래를 부르고 또 춤추어 사람들을 교화 하였다.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까지 부처의 이름을 알고, 염불하게 된 것은 오로지 원효의 교화의 힘이었다.  원효가 요석 과의 관계를 맺고 무식한 사람의 틈바구니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다닌 자유분방한 태도에서 원효의 인간을 볼 수 있다.  원효는 율계(律戒) 위에 있는 사람이기에 율계라는 그물에 매이지 않았다.  그의 「성관계」는 애욕에 빠진 결과가 아니다.  세상에 크게 이익을 줄 인간을 낳으려는 비원에 그 동기가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결코  사랑의 사슬에 묶이지 않았다. 애욕에 대한 티끌만한 탐심도 없었다. 그는 애욕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이런 경지에서는 「애욕의 행위」도 「애욕의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생제도의 보살행이 되는 것이다. 속복(俗服)으로 갈아 입고 거사(居士)가 된 원효는 승복을 입고 승형(僧服)을 하고 있던 어젯 날의 원효와 결코 다르지 않다.  그에게 있어 겉모양이나 이름은 한낱 헛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런 것에 매일 까닭이 없었다. 문제는 자비(慈悲)의 보살행이다.

 원효에게는 혜공과 관련된 또 다른 설화가 삼국유사에 있다.  

 원효가 여러 경서의 소(蔬, 풀이)를 지으면서 매양 혜공에게 질의도 하고, 혹은 서로 희롱하기도 했다. 어떤 날 두 사람이 함께 시냇가에서 천렵을 하였다. 두 사람은 잡은 물고기를 먹고 물가 바위에 뒤를 보았다.  혜공이 원효에게 농담으로 말했다.

「그대의 똥은 내가 잡은 고기요.」
 ( (그런일이 있고, 그곳에 항사사(恒寫寺)를 지금까지도 오어사(吾魚寺)라고 불러오고 있는 것은 그 까닭이다.) )

 혜공도 원효도 보통 사람의 틀에서 벗어난,「 매이지 않은 인간상」의 인물임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원효는 「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던 까닭에 오히려 관음의 진신(眞身)과도 만날 수 있었고 허심으로 농담을 주고 받았다.  

 일찌기 원효가 낙산의 관음을 보러 간 일이 있다. 논 가운데 흰 옷을 입은 한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는 희롱삼아 벼를 좀 달라고 여인에게 청하니 벼가 여물지 않았다고 댓구했다. 원효가 다리 밑에 갔들 때 어떤 여자가 개짐(月經帶)을 씻고 있었다. 원효는 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했다. 여인은 방금 개짐을 씻을 물을 떠서 바쳤다. 원효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새로 냇물을 떠서 마셨다. 바로 이여인들은 관음의 진신이었다.  

 신라  십성(十聖)의 한 사람인 사복(娑福)이 그의 어머니가 죽자 원효를 찾아가서 말했다.

「그대와 내가 전생에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는데, 같이 장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소?」
 그의 제의를 쾌락한 원효는 사북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원효는 시체 앞에 가서 빌었다.
「나지말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말라! 나는 것이 괴롭다.」
  그러자 사복은 말했다.
「 말이 너무 번거롭소.」
 원효는 다시 고쳐서 말했다.
「죽음도 삶도 괴롭다.」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가서 장례를 지냈다. 사북은 띠풀을 뽑고 그 밑에 열린 연화장세계로 어머니의 시체를 메고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나서 원효는 혼자 돌아왔다.  

 위의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세상의 작은 법도나 윤리나 생각의 그물을 훌쩍 뛰어넘은 자리에서 세상과 사람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던「 매이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 머리를 깍고 입도(入道)한 승려의 몸으로 삼세의 인연이 있다고 하며 자기를 따르는 묘화 여인의 애정을 끊는 일을 않고, 오히려 그와 결혼하고 아들 딸을 낳은 부설(浮雪)의 경우 그의 처신을 세속적인 차원에서 말할 수는 없다. 그는 결코 애욕에 빠진 나머지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가을 하늘과 같이 맑고 밝아 한 점 티도 없는 깨끗한 그대로였다.
남은 개의치 않고 자기만의 성도를 열망하는 소승의 수도자가 아니다. 중생이 무명에 있을 때 바로 병을 앓는 대승의 보살이다. 묘화여인의 병은 그녀 자신의 병일뿐 나와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떼쳐 버릴 수 없었던 부설이다. 묘화여인의 아픔과 괴로움은 곧 나의 아픔과 괴로움이었다. 그만큼 그는 대중과 공감적인 일체감을 가지고 있는 수도자였다. 부설은 자기를 가엾이 여기며 떠나가는 두 친구에게 말했다.

「깨달음의 길은 출가냐 재가냐에 있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들끓는 거리냐, 고요한 산간 이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여러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하신 방편은 오로지 뜻이 중생을 이롭게 하심에 있었읍니다.」 

 이 말에서 부설의 참뜻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는 재가의 뜻만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 재가도 출가도 중생제도의 방편은 마찬가지다. 문제는 중생으로 향한 그의 뜻과 세상을 보는 그의 눈이다. 부설은「 매이지 않는 인간 」이었다. 세상의 티끌 속에 묻혔어도 티끌이 그를 더럽힐 수 없었고,  애욕의 그물이 그를 얽었어도 그는 매이지 않았다.  그는 높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항상 높은 곳에 뜻을 두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기에 그는 애욕에서 헤어나지 못한 한 여인을 자비로써 대할 수 있었고, 그에게 손은 뻗어 그의 사슬을 벗겨 줄 수 있었다. 「매이지 않는 인간」은 세간의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그는 어떤 일도 기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니 어떤 일을 해도 상관이 없다 그의 청정한 심정은 티 한 점 없는 거울과 같아서 흐려질 줄을 모른다.  오히려 더럽히려는 상대를 맑힐만큼 그 깨끗함이 철저하다.  그와 같은 인물은 어디에 있으나 누구와 함께 하나 더럽혀질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는 더러움 속에서 더욱 깨끗한 빛을 더 할 수 있는 존재다. 까닭에 굳이 더러움을 피하기는 커녕 더러움을 찾아가 그 가운데 처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마치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의 아름다움에 비유할 만한 세계다.

 그에게는 자유가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두 가지 수도자의 세계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비유담이 있다. 노힐부득(努肣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은 백월산 동쪽과 북쪽에 제각기 작은 암자를 짓고 도를 닦고 있었다.  어떤 날 저녁 묘령의 여인이 달달이 있는 북쪽 암자를 찾아 왔다. 산에서 길을 잃었으니 하룻밤 자고 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박박은 「깨끗한 도량을 여인으로 하여 더럽힐 수 없다.」고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여인은 하는 수없이 동쪽 암자의 부득을 찾아갔다.  부득은 「비록 도량은 부녀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기는 하나, 중생의 뜻을 따르는 것이 보살행의 하나요, 더구나 깊은 산 속에서 밤조차 어두웠으니 소홀히 대접할 수는 없소이다.」하고 여인을 맞아 들였다. 달달은 자신의 계행은 지켰으나, 길 잃은 중생의 괴로움을 외면한 너무나도 이기적인 소심한 수도자였다.  결국 그가 지켰다고 믿은 계행은 박박의 보살행보다도 훨씬 낮은 차원의 것임을 다음에서 보여준다. 

 여인은 두 수도자의 성도 를 도우려고 모처럼 찾아온 관음의 화신이었다. 

 부득은 여인을 암자에 맞아 들여 놓고, 여전히 염불하여 쉬지 않았다. 밤이 새려고 할 무렵 여인은 갑자기 산기를 일으켰다. 부득은 짚자리를 깔아 자리를 만들고, 목욕할 물을 끓였다. 해산을 마친 여인을 목욕통 안에 앉히고 씻겨 주었다.  얼마 후 통 속의 물이 향기를 풍기더니 금빛으로 변했다. 여인은 부득더러 그 물에 들어와 목욕하라고 했다. 부득은 그안에 들어가 목욕을 하니 살결이 금빛으로 변했다. 결국 부득은 관음의 도움으로 대보리를 이루었다. 박박은 뒤미쳐 여기에 와서 이 광경을 보고 후회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통 속에 남아 있던 물로 간신히 목욕을 하여 부처가 될 수 있었다.    율계에 매였던 달달은 관음이 나타났으나 그를 볼 눈이 어두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