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좌담] 믿음이란 어떤것인가 (서돈각, 목정배, 광덕)

서돈각, 목정배, 광덕

2008-01-07     광덕

ㅡ믿음의 출발과 성숙과 그 사회적 의미ㅡ

  믿음의 특징과 내용

 광덕 : 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종교에 따라서 믿음의 내용이 각각 다르리라고 믿습니다。하느님이 은혜를 주신다느니 신이 죄를 사하여 주신다느니 각기 종교에 따라 특징과 내용이 있습니다。불자의 믿음은 어떠한 것인지 그 특징이라 할까 믿음의 내용에 대하여 먼저 말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돈각 : 힌두교의 경우 브라만이나 비슈느, 또 시바신을 믿어서 이러한 신들이 창조주이고 길흉화복의 주재신이리 하는 등 종교에 따라 특징이 있죠。우리 불자는 일체주생이 모두가 부처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그 기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사람의 존귀한 가치와 만인의 평등도 함께 거기 있는 것이죠。부처님의 말씀은 퍽 많지마는 그 말씀을 이론만으로 파악하려는 데는 학문은 될지언정 믿음과는 좀 다르지 않나 생각됩니다。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불교는 심오한 동양철학이니까 믿는다。」라 한 것을 보았는데 그 분의 독특한 신앙으로 보아 잘못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목정배 :  기독교의 경우 원죄의 존재를 믿고 신을 믿으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만 불교에서는 죄를 인정하지 않지요。윤리적인 규범을 어긴죄는 인정하지만 그러나 현상적 인생은 고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가르쳐서 마침내 불성을 자유롭게 쓰는 것을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그래서 불자의 믿음의 출발은 인생의 현실을 낙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고라고 인정하는데 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 됩니다。

 서돈각 : 현실을 직시한다는 뜻에서 말하면 현실은 고통이고 고통은 과거에 지은 바 업에 기인한다고 하고 또한 업과 과거를 말하게 되면 저절로 윤회를 두고 말이 되는 것인데 이 점은 스님께서 한 말씀……

 광덕 : 믿음의 출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 인가에 대하여는 저는 좀 다른 곳을 강조합니다。앞서 서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지만 「내가 불자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 말합니다。부처님께서 지혜와 자비가 원만하시고 모든 위력과 덕성이 원만하시어 터럭끝만한 부족도 없는 것처럼 이러한 부처님의 공덕생명이 바로 나 자신의 본분이며 본면목인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현실적 눈으로는 결함도 있고 고통도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현실만을 볼뿐 지혜의 눈에서 실상을 본 것은 아니어서 불자는 비록 자신이 고통 많은 범부일망정 자기의 본분이 바로 불보살님과 차이 없는 불성의 주인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내가 불자다 라는 믿음이 범부를 필경의 목적지로 몰고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정배 :  저는 학생들과 불교를 3법인(三法印) ·4제(四諦) 등 법문으로 시작합니다마는 스님은 단번에 최상승의 신앙을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이 스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웃음)

 광덕 :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 믿고 배우되 근본지표는 변할 수가 없겠지요。처음부터 믿음은 구경처에 두고 수행은 현실에 처해서 하나하나 닦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철학적 믿음이라는것

 서돈각 : 얼마 전 불교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을 만났습니다만 이 분 말씀이 나는 석가모니불은 믿지만 그 밖의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은 믿지 않는다 하는 말을 들었지요。그분 말씀으로는 역사적인 인간 석가모니의 존재는 믿지만 그외의 것은 불신한다는 거예요。이 분도 지도적인 불교학자인데 이 분의 영향으로 우리 불교가 이런식의 신앙으로 되어간다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우리들 불자는 깨달음에 앞서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참뜻을 알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까。만약 말씀을 믿지 않고 석가모니불만 믿는다면 그것은 바로 부처님마저도 믿지 않는다는 결론이 될겁니다。

 목정배 : 제가 모처에 가서 불교강의를 해보려고 학생들의 반응을 들은 것이 생각납니다。제가 부처님이 참으로 계시는 불교를 가르친다는 거예요。유신적(有信的) 불교를 가르친다는 거예요。(웃음)

 다른 분들은 논리적이며 해박한 지식을 가르치시는데 듣고나면 신앙심이 떨어진다고 하더군요。만약 부처님은 믿지만 그밖의 다른 불보살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안 믿는 거와 같겠지요。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것이니까요。부처님은 천백억화신이라 하였으니 가이 볼 수 없는 곳에 참으로 무한한 참공덕이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부처님께서 무량겁동만 수행하시어 성불하셨다 하였는데 우리는 그 모두를 믿어야 할 것으로 생각 됩니다。

  부처님 말씀을 믿는다

 광덕 :  「부처님 말씀을 믿는다」참 좋았습니다。총장님 말씀과  같이 말씀을 믿지 않으면 신앙이 서지 않겠지요 말씀을 믿고 그 참뜻을 알려는 것이 중요합니다。한데 부처님의 말씀도 많습니다。그중에는 표현상 상반되는듯 하는 것도 없지 않죠。예컨데 무상이고 고이 부정(不淨)이다 하면 상(常) · 낙(樂) · 아(我) · 정(淨) 등 같이 말입니다。믿음을 세워가는데 이런 말씀의 참뜻을 잘 알아서 가려 가야 겠지요。

 서돈각 : 부처님 설법은 중생근기에 따른 이른바 대기설법(對機說法)입니다。사람과 상황과 사건에 따라 법을 설했기 때문에 부처님은 한 법을 말씀하시지만 나타내는 말씀에는 여러차이가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부처님의 참된 뜻을 찾는 것이 경을 보는게 아니겠습니까。선에서 왕왕 불(佛)을 부인하는 걸 봅니다。예를들면 단하천연(丹霞天然) 선사가 목불을 태운 일에 관해서 선사가 목불을 사룬 뜻을 깊이 살펴야겠는데 대개들 목불을 감히 사뤘다고 일화로만 강조하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어요。부처님의 말씀도 지엽에 걸리지 말고 참뜻에 눈돌릴 때 아무런 모순도 없다고 봅니다。

 광덕 : 단하천연 선사의 소불 이야기는 그런 점이 있어요。조사들의 다른 법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단하선사의 경우 부처님에 대한 그릇된 지견을 타파하고 참부처를 드러내는 것이 소불의 진의인데 그것을 다만 일화로만 알아서는 안돼죠。

 문정배 : 2조 혜가(慧可)대사가 달마대사를 찾아가 팔을 베었다는 것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혜가대사가 팔을 베인 것은   어떤 소견을 내보인거나 자학을 감행하는 만용을 보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결단적인 믿음을 드러내어 보인 것 입니다。무엇을 깨쳤다는 뜻보다도 뜨거운 신앙이 용출한 것이며 달마대사도 그것이 수도하는 마음자세가 될 것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광덕 : 혜가대사의 단비고사는 그것이 믿음의 표시지요。원래 혜가대사는 신광이라는 당대의 대지식인이었죠。많은 학문과 철학을 다 통하였다니까요。그 신광이 자기가 소중히 간직한 온갖 지식도 철학도 단번에 완전히 베어 버린 행위가 곧 팔을 짜르는 일 입니다。법을 담기 위하여 자기 그릇에 있던 온갖 잡동사니를 모두 비워 빈 그릇을 만들어 달마대사 앞에 내어 놓은 것이지요。이것이 팔 자른 것으로 믿음의 표시라 보는 것입니다。

  닦아가는 과정을 알아야

 목정배 : 서총장님 말씀과 같이 부처님 설법은 수기설법이며 어떠한 법도 가이 버릴 수 없는 것이죠。그러나 닦아 가는데 있어서 교학적 정리는 필요합니다。四念處 · 4무외 · 五根 · 7각지 등 37조도품에서와 같이 닦아가는 순서가 있습니다。우리는 이런 과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광덕 : 부처님께서는 보리수하에서 첫 말씀이 「기이하다。기이하다。일체중생 유정 무정이 모두가 불성을 갖추고 있다。」하셨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은 안목에 비친 진리실상에 대한 최초의 말씀입니다。이것을 알고 믿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많은 말씀을 하셨다고 봐야지요。그러니까 앞서도 한 말처럼 현실을 직시하고 성실하게 닦아가되 믿음의 목표는 「만인이 바로 불자」라는데 두어야 하겠지요。믿음의 내용을 일단 이렇게 정리해 보지요。

 서돈각 :  불교는 따스한 종교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부처님 경전의 숫타니파타 또는 법구경을 보더라도 역시 그렇습니다。원래로 이런 불교가 중국을 거치고 선종이 발달하면서 대단히 차가워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우리 한국 불교도 선종이 중심이 되어 발달한 만큼 그런 점이 적지 않다고 보아집니다。제가 잠시이지만 살핀 태국이나 실론에서는 대단히 따스한 불교를 믿고 있다고 느꼈습니다。우리 불교도 보다 따스한 불교로 돌아가기 위하여 선에 치우치느니 보다 믿음을 먼저 앞세우는 그런점이 강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영험록을 많이 읽자

 목정배 : 신라 · 고려시대 스님들은 영험록을 많이 썼습니다。 부처님을 신앙하여 입은 공덕이야기가 많습니다。그런데 요새는 그런 책도 없을 뿐 아니라 읽지도 않습니다。 책을 읽으려면 철학적 논리적인 중론이나 구사나 기신 같은 것을 읽어야지 그런 책을 보면 바보취급을 받아요。우리 민족 최대의 보전이라 할 삼국유사에는 감통편(感通編) 신이편(神異編)이 있고 고려의 요원 스님이 쓴 법화영험전도 있습니다。그 밖에 신앙을 키우자는 책도 많습니다。거기에는 부처님을 믿어서 병고친 이야기。소원성취한 이야기 등이 많습니다。오늘날 이런 것들을 등한시 하고 화두일색으로 선만을 주장하면 신앙을 키우는 데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기독교에는 참회록이 많습니다。모두는 신앙의 체험이며 신앙 고백서 입니다。신앙한 데서 입은 공덕이 적혀 있습니다。근일 우리 불교에 참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대개 기도나 의식 중에 있는것이고 책으로 나온 기록이 없어요。영험록은 신앙을 키우는 데 없지 못할 밑걸음이 됩니다。앞으로 영험록을 많이 쓰고 번역도 하며 널리 읽혔으면 좋겠어요。

 광덕 : 따스한 감성의 종교ㅡ좋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막바지라고 생각이 됩니다。선의 마지막 귀결처도 바로 그런 곳이지요。일체대립이 끊어진 일여제평(一如齊平)의 경지에는 끝없는 평화와 따스한 감동이 끝없이 물결치는 곳이라고도 하겠지요。그리고 보살의 불교는 그대로가 부처님과 함께 불국토를 장엄하고 불공덕을 펴나가는 것이지요。

 서돈각 : 선의 극치도 따스한 것일 겁니다。그 과정에 있어서도 따스하게 지도되었으면 어떨까 합니다。(웃음)

 광덕 : 선은 바른 지견을 여는 것인데 그것은 미혹이라는 착각상태에서 벗어나 깨치는데 유일한 목표를 둡니다。그래서 그 모두가 터럭끝 만큼의 사정이 없습니다。준엄하고 엄격하게 일체방편을 넘어서서 실물에 돌입하는 자세이지요。계율도 생활도 법을 쓰는 것도 모두가 한결같지요。그러나 그런 뼈에 사무치는 찬바람을 겪어야 봄에 코를 치는 매화향기도 있는 것이랍니다。

 서돈각 :  많이 살피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남방불교에서도 엄격한 계율이 있는 줄로 압니다。그런데  그곳 불교는 따스한 걸 느껴요。그것은 어디엔가 다른 점이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그리고 보살도에 있어서도 보살의 개념이 원래 대승불교의 것이지만 나는 그런 엄격한 의미를 떠나서 부처님이 가르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보살이 아니겠느냐고 생각됩니다。이런 점에서 불교가 국교인 나라들에 대해서는 한번 출가했다가 퇴속하더라도 계속 자기 분따라 불도를 걷고 있으니 그런대로 거기에 보살도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이런 점 태국 같은데서는 사회제도가 일종의 보살도를 실천하도록 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믿음을 키워가는 방법

 광덕 : 이제부터는 믿음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믿음을 충실히 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총장님의 믿음의 생활은 일반적으로 재가불자의 표본이 되겠지요。

 목정배: 서총장님은 이 점을 말하는 데 적임자이시니까 박사님의 경우를 말씀해 주시지요。(웃음)

 서돈각 : 나의 믿음은 특별한 동기가 있었는 것이 아니라 무턱태고 어릴 때 부터 부처님이 좋았어요。중학때는 철모르고 대구에서 불교 청년회를 따라 다녔지만 일본 가서는 의식적으로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보았습니다。저는 지금껏 부처님을 항상 가까이 모시고 있다는 믿음이 앞서며 내 곁에 부처님 계시다는 마음이 나를 지탱하고 있죠。

 광덕 : 신앙의 일과를 말씀해 주시면……

 서돈각 :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불단에 옵니다。가족이 다 모이죠。먼저 108배를 하고 다음에 독경을 하는데 금강경 아미타경 법화경의 수량품이나 권발품 등을 읽고 참선을 합니다。저녁에 또 염불을 합니다。108배는 참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좋은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정배 : 가정에서 신앙일과를 갖는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일과는 어린이들에게 참 교육이 되는 줄 압니다。저도 아침이면 가족이 다모여 예불하고 반야심경을 외우는 정도입니다만 그것이 국민학교1학년 꼬마까지 함께 하고 있는데 그 어린것이 절이 있는곳으로 소풍을 가면 법당에 가서 예불하고 오겠다고 선생님께 청한다고 해요。가정에서 신앙일과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새삼 느낍니다。그리고 제가 사는 동아리에서도 반상회나 어떤 모임에서든 부처님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서돈각 :  일과라 할 건 없지만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말보다 실천이어야 하겠더군요。백마디 말보다 하나의 실천이예요。제가 새로 불교학생회에 들어온 학생들을 위한 법회에서  108 배를 하여 보였더니 많은 감명을 준 것 같았고 그 후 잘들 믿고 있어요。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진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자기 수행일 뿐만 아니라 포교가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목정배 : 그렇겠지요。그런데 가정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을 기피하는 사람도 있어요。그러나 신라시대에는 민가 10호중에 8~9호가 절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각 가정마다 부처님을 모셨다는 뜻이라고 봅니다。저는 재가불자들이 모두 집에 부처님을 모시는게 좋겠다고 생각되요。

 서돈각 : 동감입니다。그런데 스님들 중에도 집에 부처님 모시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 분도 있어요。

  집에 부처님을 모시자

 광덕 :  그것은 이런 것 같아요。부처님을 집에 모시고 잘못하면 벌받는다는 생각이 있는것 같습니다。집에서 다투기도 하고 부정한것을 다루기도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 불경스러워진다는 것이죠。

 서돈각 : 우리나라에서는 확실히 그런 게 있어요 잘못하면 벌받는다는 거에요。물론 청정히 하여야하고 불경스러워서는 안되겠지요。그리고 신심있게 수행해야지요。그런데 신자로써 부처님을 집에 모시는 것을 꺼리는 것은 한국뿐인 것 같습니다。일본이나 태국에서는 다들 집에 모시고 있더군요。

 광 덕 : 지금 전해지고 있는 고불을 보면 고려 때의 불감에 모신 부처님과 협시보살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집집마다 모셨던 부처님이라고 생각이 되어요。

 서돈각 : 집에서 안 모시게 된것은 이조 이후의 배불정책과 관계가 있지요。

 목정배 : 그 밖에도 부처님 모시면 불교인이라 하여 배척받기 때문에 자연 산간의 사찰불교가 된 것도 있겠지요。

 서돈각 : 부처님 모셔서 재앙을 입는다는 말은 그런데서 나오고 또한 그것이 무속적으로 민간에 전해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목정배 :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시고 경건하게 일과를 지켜야지요。

 광 덕 :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과를 지켜야 합니다。예불 독경이나 참선 염불 등 일과를 지켜야 믿음이 굳어져요。다음에는 믿음의 실천이라 할까 생활 속에서 믿음을 행하는 데 관하여 한 말씀……

  생활속에서 믿음을 행하는 방법

 서돈각 :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첫째 부처님 믿는 마음에서 양심따라 매사를 처리하여야지요。그리고 부처님 근본 가르침인 제악막작(諸惡幕作) · 중선봉행(衆善奉行)을 마음에 두는 것이지요。셋째는 나의 신앙이 이웃에 미치도록 신앙자세를 갖는 것이라 생각하구요。끝으로 다른 종교를 비방하지 않고 이해해 주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 생각합니다。서로 다른 종교를 이해해주는 자세가 전체로서의 사회발전에 기여하는게 아닐까요。

 목정배 : 나의 믿음이 이웃에 확대되도록 마음 먹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신앙인이 확대될 때 사회의 불신풍조가 제거되고 서로 돕고 사는 밝은 분위기가 되는 것이지요。서로 아껴주고 신뢰하는 자세가 바로 전법이 되는 것이며 수행이 아니겠습니까。말하자면 동사섭(同四攝)의 실천인것 입니다。

 광덕 : 우리의 믿음의 생활이 우리 뿐만 아니라 나라의 평화번영의 기초가 된다는 생각도 필요합니다。우리의 밝은 믿음이 함께 사회와 나라를 비추고 흔들리지 않는 사회발전의 토대가 될 줄 압니다。긴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