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의상(義湘)의 근본사상

특집/전통사상의 현재

2008-01-07     김지견

   1, 서   언 (緖  言)

 경전이나 어록(語錄)은 부처님, 조사님이 친히 일러 주신 말씀이지마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경전관(經典觀)이나 어록관(語錄觀)이 현저하게 달라지는 예를 우리는 보아서 알고 있다. 승가승상(僧伽僧像)도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숭배하는 예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한국불교 千六百년의 장구한 세월 속에서 오늘의 승가상의 사표(師表)로 삼음직한 가장 바람직한 분을 한분만 고르라고 하면 서슴치 않고 의상대사님이라고 대답하겠다.

 의상대사를 알려면 먼저 『화엄경』을 알아야 겠다. 화엄경은 동양문화의 정화(精華)라고도 하고, 불교 경전으로서만 아니라 많은 지역에 여러 방면에서 특히 예술과 문학방면에도 많은 영향이 미치어 있다고 보아진다. 화엄경은 대승불교 경전 가운데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내용은 불타의 대오(大悟)하신 경지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리불(舍利佛)이나 목련(目蓮)같이 훌륭한 불제자들까지도 벙어리와 귀머거리처럼 붇다의 설법이신 화엄경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경전의 내용은 복잡하고도 자상(慈詳)해서 쉽사리 이해가 안간다. 그러나 확실하게 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정독하는 동안에 무엇인지 방도(方途)도 없이 무변대해(無邊大海)와도 같은 붇다가 대오하신 경지에 우리들의 마음이 다가서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사상의 근본적인 특징은 사사무애와 법계연기에 기인했다고 한다. 즉 궁극의 진리의 입장에서 살펴 보면 일체 사상(事像)이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성립되었으면서 서로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진리성의 질서 체계도 서로 엉켜 보이지마는 그것들이 오히려 겹쳐 어긋남이 없고 그로써 더욱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입장에서 보살들의 실천의 덕목이 설해진다.

 보살도의 실천에는 자리와 이타의 이대(二大)방향이 있고 그의 실천에 있어서는 타(他)를 구제하는 것이 자리이기 때문에 자리 즉 타리인 것이다. 의상은 이와 같은 화엄사상의 종지를 실천궁행한 중국화엄종의 제이조(第二祖)인 지엄(智嚴)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거기서 『화엄일승법계도』를 제작하여 지엄문하의 이채(異彩)가 되었다. 의상이 귀국하여 부석사에 화엄의 근본도량을 정하고 도제(徒弟)들을 영도할 때 천(千)여인이 운집 했었다고 임덕(林德)은 『법계도총수록(法界圖叢髓錄)』에서 회술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고승이면 누구고 화엄학을 연구했었던 것은 사실이나 우리들의 정신문화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국사도 화엄학이 전성기에 지상에 불국토를 실현키 위해서 창달되었고, 역대의 주승(主僧)들이 의상계의 인재들이었다는데에 의의를 가진다.  화엄학은 신라시대에 많은 저술들이 있었으나, 후세에까지 그의 연구가 계승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의상대사의 경우만은 다르다. 즉 고려시대의 균여(均如)는『화엄일승법계도원통기(華嚴一乘法界圖圓通記)』二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화엄교리 연구에 없지 못할 귀중서이며, 특히 지엄(智儼)의 칠십이인(七十二印)과 의상의 근본인(根本印), 그리고 오중해인(五重海印)등의 원리가 상세히 검토되었다는 점이다.

 그 후 고려의 대암체원(大庵體元)의 찬(撰)인 『법계도총수록』四권의 주석서가 있는데 내용을 보면, 의상의 저술인 『법계도』를 고금의 학장(學匠)들이 연구한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인용되고 있다. 우리는 체원(體元)의 저술에서 의상이후 고려기까지 얼마나 많은 학승들이 의상을 연구했는가를 알 수 있고 여타 장소록(章疏錄)에서는 볼 수 없는 주석서와 인명이 소개된다. 체원은 그의 다른 저술에서도 그렇지마는 문제가 중심이라기보다는 자료를 중심으로 수집정리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중국계보다는 신라계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주목이 된다.

 다시 이조때에도 청한비추설령(淸寒比추雪岺-梅月堂金時習)의 주석서가 있다. 설령의 주석서는 선과 화엄을 잘 융화시킨 명저라 하겠고 이조시대의 선과 화엄을 이해하는데 없지 못할 자료이다. 특히 설령은 의상의 『법계도』의 사상을 대변하고 있다. 마치 『화엄경』의 사상을 보현보살이 대변하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 간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것은 우리 한국불교의 실천의식이 회향될 직전에 『법성게』를 다라니처럼 주송(呪誦)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는 그 생명이 실현에 있고 실천의 母體는 의식에 있다는 것은 우리는 잘 알고 있는 일이다.

 한가지 부언해둘 것은 신라말부터 고려초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의 경전관이 일대전환을 보여 불입문자(不入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기치를 드높이 들고 구산선문이 형성되나, 의상계의 화엄과 관계가 있었던 산파(山派)가 적지 않았고 해동조계종의 선구자인 지눌(知訥)은 그의 저술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에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僧法界圖)』를  점(漸). 돈(頓). 원(圓). 해오(解悟)보다도 『증오(證悟)』라 봤던 것은 글자 그대로 탁견(卓見)이라할 수 있겠다.

  2, 신  앙 (信  仰)

 의상은 신라화엄의 초조였다. 그리고 그 학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 그의 신앙의 형태는 어떠했던가를 살펴 보자. 그의 신앙은 엄정융화(嚴淨融和)의 신앙이었다. 그의 신앙을 살표보면 획심적이면서도 종합적이요 실천적이다. 의상에 있어서 관음신앙은 협시신앙(脇侍信仰)이었기에 미타신앙(彌陀信仰)과 본원에서는 하나이다.

 부석사는 문무왕十六년에 조정의 협력을 얻어 의상이 창건한 신라화엄의 최초 도량(道場)이다. 그런데 부석사의 본전이 무량수전(국보十八호)이고  주불이 비로자나불이 아닌 아미타불(국보四十五호)이란 점에 우리는 의문을 품게된다. 화엄근본도량이면 본전이 대적광전이나  비로전이어야하고, 주불은 비로자나불이어야 되겠는데, 하는 이유때문이다.

 이 문제는 화엄계경전과 정토계경전의 성립사적 연구와 부석사 가람설치계획을 현존 유구(遺構)부터 살펴보면 의심이라기 보다 과연하는 수긍이 가게된다. 이 유구(遺構)는 봉황중복(鳳凰中腹)을 돋우어 암석으로 축탄(築坦)하여 사기(寺基)를 조성하고 있는데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계단식 개기(開基)이다. 개기당시 축탄을 크게 삼단으로 했고 단계와 단계사이가 층계식으로 되어 있었는듯하다. 필자는 의상이 『법성도』를 제작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아마도 가람을 설계할때 경전적인 배려가 있지 않았나 해서 수차 부석사를 예방했었다. 구체적인 실례를 다 열거하지 못하나 구품정사사상(九品淨士思想)을 신라의 봉황산에 옮겨 화엄의 근본도량을 개창했다고 사유(思惟)된다. 즉 『관무량수경』의 사상이 부석사가람설계도의 원형이라고 보아서 무방한 무량수전앞 안양루위에서 경내를 조감(鳥瞰)하면서 삼배.九품사상을 상기해 보면 무량수전 자리가 上品上生地이고 경내의 頂上이 된다. 『관무량수경』 九품신앙을 지상에 옮기는데는 봉황산이어야만 할 이유가 부석사를 예방하고 경전의 내용을 상기하면 누구고 납득이 갈 것이다.

 즉 봉황산만이 적지라는 이유가 선묘화룡설화(善妙化龍說話)에 구체성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부석사의 부석.선묘정등 선묘설화가 일본의 『화엄조사회권(華嚴祖師繪卷)』의 기원이리라 보아진다. 그리고 고구려계의 출신인 찬녕(贊寧)이 『송고승전(宋高僧傳)』을 찬술(撰述)할 때 이 설화의 구전(口傳)을 자료로 해서, 원효. 의상전을 기술하였다고 보아진다.

 그러면 다시 화엄경과 무량수경이 무슨 연유로 혼동되느냐의 의문이 남게 된다. 의상의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도 미타신앙적인 내용이며 그 은사(恩師)이었던 지엄(智儼)의 유계(遺/誡)에 왕생사상이 있다. 그리고 의상 자신도 정토삼부경중의 하나인 『소미타경(小彌陀經)』의기(義記)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의상의 신앙은 엄정융화적(嚴淨融和的)이었다고 인정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화엄부 二十八부 二百三十二권에 한결같이 미타와의 연관이 있으며, 『관무량수경』의 「득백법명문환희지(得百法明門歡喜地)」는 화엄십지품이 그 원거(原據)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서 좋을 것이다. 六十화엄의 경우 문수보살은 선재동자를 남순(南詢)시킨다. 그 제일차(第一次)에 만나는 선지식 공덕운 비구는 염불삼매공덕을 상세히 말해준다. 선재동자는 법을 듣고 환희한다. 八十화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즉 六十一종의 염불 삼매를 들고 있다. 화엄경은 염불삼매를 수처(隨處)에서 강조한다. 특히 고려의 균여의 향가인 『십종원왕가(十種願往歌)』의 내용도 엄정융화적이다. 그리고 균여가 의상의 계승자라는 점에 흥미가 있다. 다시 四十화엄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회향을 미타로 한다. 아마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일체중생을 이익케한다는 보현보살의 게송은 주목해서 좋을 것이다.

 四十화엄의 四十권의 부분은,  六十. 八十화엄에는 없는 부분이 증가되어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화엄경전에서 맨뒤에 번역된 부분에 미타정토 신앙이 증입(增入)되어 화엄경의 이상 세계인 화엄찰해(華嚴刹海)에 증입(證入)토록 한데, 크게 의의를 지닌다. 중국 화엄의 사조(四祖)인 징관(澄觀)이 四十화엄의 이 부분을 주석하는데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이 동일하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의상이 화엄사상을 전하는데, 『관무량수경』의 정토왕생신앙을 증입(增入)하여 부석사의 가람설개를 했었다는 것은 의상이 실천면을 얼마나 중시했었는가를 알 수 있고, 미타신앙과 화엄신앙을 연결시켜, 누구고 쉽게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배려했다함은 의상의 독자적인 창안이라고는 못하더라도 탁견이라 높이 평해서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의상의 신앙과 사상은 삼본(三本)화엄경이 완성된 경전성립사적인 배경이 의상의 화엄사상의 탁월한 안목과 그의 실천에 있어서 바름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보아진다. 왜냐하면 대화엄경을 설하는데, 비로자나불을 대신한 주역을 맡는 보현보살은 비로자나불을 찬탄하고, 연화장세계를 찬미하지마는,  최후에는 비로자나불과 함께 선재동자 앞에서 나투시어 극락세계 왕생하기를 권하면서, 동시에 자기 신앙을 고백한다. 그리고 나서 대화엄의 막이 내리기 때문이다. 

  3, 사상(思想)과 행리(行履)

 의상의 사상은 법계도(法界圖)에 잘 집약(集約)되어 있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이기에 내용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나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한가지만을 적어두기로 한다. 법계도는 비로자나불(法身佛)의 대선정(大禪定), 다시 말해서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관도적(觀道的)인 면을 도시(圖示)한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이 법계도를 통하여 의상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입파(立破)가 무애하고 개합(開合)이 자재한 화엄사상을 파악하고, 총화적인 입장에서 (大和. 中和. 小和가 아닌) 불교를 불교답게 받아들이는, 근원과 원리를 드러낼 수 있게 한데 있다 하겠다. 그리고 한가지 지적해 둬야 하는 것은 파식망상필부득(파息妄想必不得)의 구는 법성게의 三十구 중에서도, 가장 주의를 요하는 구이다. 법성게란 법성의 자리에서 해인삼매의 경지를 노래한 것이므로 진(眞). 망(妄) 이원적인 것에 매이지 않는 법성적 해석으로 보아야 하겠는데, 일본의 신수대장경과 속장경은 불식망상필부득(不息妄想必不得)으로 보아서 오독(誤讀)되고 있음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파는 불가하다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을 살피면 될 것이다.

 의상이 사문(沙門)으로서 어떤 분이었는가를 다른 고승들과 비교해 가면서 생각해 보자. 즉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여 대화엄의 법문을 선양하였을 때 당시 문무왕이 전장노복(田壯奴僕)을 하사하려고 했었다 한다. 그때 의상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절했었다. 『아법(我法)은 평등해서 고하가 없고 귀천이 동발(同撥)입니다. 열반경에는 팔부정(八不淨)을 경계하시었는데 무슨 전장노복이 필요하겠습니까?. 빈도(貧道)는 법계를 위가(爲家)하고 우경(盂耕)으로 자족합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중국의 법장이 측천무후의 우우(優遇)를 감수한 것과 대비해 보면 사문으로서 의상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그리고 당시 문무왕이 축성을 거듭하여 민중의 노역이 과중함을 보고 왕의 국방책을 시정했었던 것을 보면 의상은 삼엄(森嚴)한 계행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민생문제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 진정(眞定)이 모상(母喪)을 당하여 비통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四十九일간이나 대화엄경의 청연(請筵)을 열어 제자를 위안시키고, 그의 모친을 제도했다고 한다. 이때의 기록이 추동기(錐洞記)라고 전해진다. 이 문제는 중국의 천태학의 大成者 지자(智者)가 혜사(慧思)와 같이 육근청정위(六根淸淨位)에 오르지 못한 것은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시간을 허비한데 있다고 탄식한 것과 비교해 보면 너무도 대조적이다. 그리고 능엄경을 보면 아란존자가 마등가녀(摩登家女)의 유횩에 빠질번 했다하는데, 의상은 중국의 미녀 선묘의 애절한 구애를 받고 정법으로 교화 선도하여 선묘 女神은 오늘날까지도 화엄수호의 신으로 숭앙을 받는 것을 보면, 아란존자보다도 수승한 점이 있다고 보아진다.

 오늘의 현실은 어렵다고 보면 어렵고 희망적이라면 무한한 가능이 충만한 한국불교를 생각해 볼 때, 중국의 법장(法藏)이 여래가 입멸(入滅)하신 뒤에 의상스님만이 정법을 구현하신다고 한 말처럼, 승가상이 선명해져야, 대중이 따라갈 것이 아닌가, 의상들의 출현을 고대(苦待)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