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절단(切斷)과 열반(涅槃)

초대설법 아짠 마하 부와의 수행법문- 열한 번째 법회(3)

2008-01-07     관리자


이 글은 태국을 대표하는 위빠사나 대선사, 아짠 마하 부와가 영국을 초청방문하여(1974년 6월) 설한 법문과 질의 응답들을 수록한 수행법문집, 『The Dhamma Teaching of Acariya Maha Boowa in London』 중, 열한 번째 법회의 질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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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_ 열반(涅槃)을 향한 염원(念願)도 수행에 장애가 되는지요?
답 _ 존재의 본성인 삼법인(三法印: 無常곉�無我)과 궁극적 해탈에 대해 깨우쳤다면 열반을 향한 계(戒)겵�定)곀�慧)의 수행에 전념하면 되지, 굳이 열반의 성취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열반에 대한 염원도 욕망이므로 당연히 수행에 지장이 됩니다.
열반에 대한 염원은 단지 ‘열반’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대한 갈망일 뿐이지, 실제로 체득한 지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직 ‘현재’의 대상에만 마음챙김하여 알아차림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은 범인(凡人)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대상이 다섯 감각기관(五根: 눈겺�귀겴�몸)과 접촉하게 되면 순식간에 ‘바왕가(bhavaga)’가 일어나 두세 차례 진동하다 사라집니다. 바왕가는 일반적으로 ‘잠재의식’으로 불리는 ‘최소 단위’의 마음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생명연속체, 생성의 원인겵맛玲鴉� 유분(有分)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바왕가의 진동에 이어, 5근(五根)의 대상인 5경(五境)에 상응하는 감각작용인 5식(五識: 眼識곸쇈�鼻識곟索�身識)이 일어났다 사라지면서 6식의 의식(意識)으로 이어져, 대상을 감지하고 받아들여 살핀 후에 형상을 떠올려 결정(determining)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과정은 순식간에 진행되므로 일반 범인들은 미처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제6식인 의식에 이르기까지의 이러한 인식작용은 선(善)도 악(惡)도 아닌, 단지 중성(中性)인 기능적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다음 단계부터는 범인과 수행자가 각기 다른 길을 따르게 되어 차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범인의 경우는, 대상이 실제로 인식될 때까지 그 대상의 개념이나 명칭에 관한 의식의 흐름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대상에 집착하게 되므로 탐겵�치가 야기되기 마련입니다. 이 과정에서 선겲퓽�분별심이 (업이 생성되기 시작하는) ‘자와나(javana, impulsion)’의 단계에서 일어납니다.
‘자와나’는 ‘바왕가’에 속한 일련의 마음과정으로, 자극겴館컥�흐름, 또는 인식작용의 마음의 속도를 이르는 속행(速行) 등을 뜻합니다. 이 자와나는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일 수도 있고, 단지 기능적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 탐겵�치의 존재 여부에 따라 각기 다른 자와나가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마음에 탐겵�치가 발붙일 수 없으므로 도덕적인 자와나(善業)가 생성되기 마련입니다.
수행자는 대상에 접하는 순간 마음챙김을 통해 즉시 알아차려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을 끊어버립니다. 대상의 모양, 상태, 명칭 등의 특성들을 차단시켜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거나 듣는 것은 단지 보이고 들릴 뿐이어서, 의식의 흐름은 자와나를 야기하지 않고 결정(決定)의 순간에 끊어져버리므로 업의 자와나가 생성될 여지가 근절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식의 흐름이 절단되면 몸과 마음을 구분하여 그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게 됨으로써 삼법인의 특성이 드러나게 되며, 대상에 대한 호(好)겫蘆?�탐겵�치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인과(因果)의 특성을 알아차려 악업(惡業)이 저절로 근절됩니다.
도덕적 의식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윤회로 나아가는 의식과, (번뇌에서 벗어난) 열반으로 나아가는 의식의 두 유형으로 분류됩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마음챙김을 통해 열반을 향한 도덕적 의식을 심화시켜 업의 흐름을 끊어버릴 수 있으므로, 감각적 대상이 6근을 침범해도 의식은 단지 ‘바라볼 뿐’인 초기단계에서 정지해버리므로 악업이 싹틀 수 없는 것입니다.
이같이 수행하다보면 일시적인 적멸(寂滅)을 체험할 수도 있지만, 그 체험에 집착하지 말고 계속 반복해서 수행을 지속시켜나가야 비로소 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의 갈망 같은 쓸데없는 집착에 휘둘리지 말고 그저 열반의 길을 따라 전심전력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문 _ 법(法)을 진리(眞理)라고도 하고, 때로는 마음의 모든 대상(對象)이라고도 하니,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답_법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됩니다. 즉, 진리, 붓다의 가르침, 깨달음, 실재(實在), 중도(中道) 등을 뜻하거나, 마음의 외적겞뼈�대상(對象)들 모두를 이르기도 합니다. 후자(後者)의 경우에는 6근(六根)이 6경(六境)의 경계에 접하는 것 모두를 법으로 간주합니다.쪹
수행에서 언급되는 법은 대부분 이 ‘마음의 대상’으로서의 법을 이릅니다. 경장(經藏)에서는 이 법을 ‘궁극적 진리’와 ‘관념적 진리’로 구분하여, 전자(前者)는 실재나 본성을, 후자(後者)는 관념, 개념, 모양 등을 뜻합니다. 그러나 아비담마(남방불교의 論藏)에서는 법을 그 자체의 본성을 지켜 불변하며 모든 인식과 행위의 궤범이 되는 궁극적 진리로 규정합니다.
이외에도, 법을 좀 더 세밀히 분류하여, 인과(因果), 연기(緣起), 무아(無我), 현상, 우주적 질서, 도덕, 가르침, 분석적 지식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법은 진리로서 홀로 존재하지만, 또한 눈길 닿는 어디든 도처에서 생동하고 있으므로 삼법인을 명료하게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매순간의 체험 모두가 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이르려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정신적겧걍珦�현상들에 마음을 집중시켜 그 실체를 명확하게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소멸하므로 본질적 가치를 지닐 수 없으며, 오직 법만이 삼라만상의 진정한 본질임을 깨우치게 되면 붓다의 정법(正法)인 마음의 균형(中道)을 터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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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註: 법의 빨리어 표기는, 진리를 뜻할 때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고(Dhamma), 마음의 대상을 뜻할 때는 소문자로 표기하거나(dhamma) 알아차림의 대상이 무수하므로 복수로 표기하기도(dhammas) 하는 것이 근래의 보편적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