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칼럼] 정토구현의 담당자

연두(年頭)에 부치는 역사의 증언

2008-01-07     남도영

  역사의 증언 앞에 오늘의 불교계는 크게 반성, 분발해야 한다. 그것은 선인(先人)의 위업을 계승하여 오늘의 민족의 어려운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승화시켜야 할 책임이 불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가 지켜온 역사는 끊임없는 시련의 극복으로 엮어져 왔다. 민족적 수난을 이겨냄에 있어 우리는 불교의 원력이 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불교처럼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민족과 국가, 그리고 민족문화를 창조하고 수호하는데 큰 힘이 된 종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불교가 개인의 생명과 자유 및 평등을 중시하며 국가를 수호코자 하는 이념을 그 교리의 근저(根底)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유마경(維摩經)의 교설(敎說) 『중생들이 병으로 고통을 받기 때문에 보살도 또한 병의 고통을 체험한다(중생병즉보살병(衆生病則菩薩病))』는 무아의 동체자비(同體慈悲)에 철저함으로써 불교인들은 민중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받아들여 체험했으며, 또한 불교인들의 호국이념이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이른 正法守護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여 - 정법과 불교적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내 물러나지 않겠다.(영사신명종불퇴(寧捨身命終不退))는 신념으로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고 용맹정진해 온 때문이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하여 진 것은 혈연의 윤리성과 제신(祭神)의 종교성이 신화에 의해 그 기능과 권위가 부여되었던 시대였다. 불교는 在來文化를 포용하고 協和함으로써 재래문화를 더욱 심화, 확대케 하여 마침내 오늘의 민족문화의 골격을 형성케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가 우리한국사에 준 영향은 민족의 화합과 주체의식을 강조하여 그들의 이상인 불국토를 현현(顯現)케 하려 하였던 것으로 이 점 그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즉 우리나라 불교에 있어서의 화합은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인간관계의 기본적 윤리로서 강조한 것인데 이를테면 「사분율(四分律)」에서 『승단의 화합을 파괴하는 것은 최악의 범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하여, 승단의 화합을 파괴하면 지옥에서 일겁동안 죄보를 받아도 구제되지 못한다』라고 한 것 등이 그것이다. 한국 불교인들은 이러한 불타의 화합정신에 있어 타민족보다 훨씬 충실해 왔다. 흔히 인도불교가 기념적(記念的)이고 중국불교가 종파적(宗派的)임에 비하여 한국불교사를 종파의 統合史요, 사상의 統一持向史라고 함은 그 연유가 여기에 있다. 원효의 和諍思想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가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에서 『많은 전적(典籍)의 부분을 통합하고 모든 유파(流派)의 근원에 돌아가 불타의 지극히 공평하신 뜻을 열어 백가(百家)의 이견을 화합코자 한다』는 화쟁사상은 그후 의천, 지눌, 휴정, 한용운 등의 법손에 의해 오늘에 이르는 동안 민족의 총화단결을 이끄는데 중요한 원리로 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주체의식을 강조한 점에 그 특색을 보이고 있다. 이는 정법, 호국사상으로서 표시되기도 하는 것인데, 정법치세(正法治世)의 국가를 외침(外侵)으로부터 수호하여 자주성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금광명경(金光明經)과 호국인왕경(護國仁王經)등의 불전이 그 사상을 나타낸 것인데 금광명경에서는『정법을 닦아 국가를 다스려라. 국가를 파괴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정법으로 가르쳐 생명과 국가를 위해야 한다.(수정치국(修正治國) 유괴국자(有壞國者) 응당정교(應當正敎) 위명급국(爲命及國) )』라고 하였다. 이는 곧 인류의 보통적이고 절대적인 평등성을 확신하며, 이 평등성의 정법이 유린되었을 때는 감연(敢然)히 파사현정(破邪顯正), 정법호국(正法護國)을 위해 법도(法刀)를 들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결국 이런 주체적 호국사상은 민족적 자존을 범하려는 외족의 침략을 바로 정법파괴(正法破壞)의 사마비행(邪魔非行)으로 본 것이다. 정법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자신과 사도는 분쇄(粉碎)해야 한다는 불교의 교리가 각 시대에 걸쳐 민중을 이끌어 국난에 대처토록 활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오늘의 조국수호에 큰 몫을 다해왔었던 것이다.

 한편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로서 보살사상이 그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점에 또 하나의 특색을 찾을 수 있다. 보살사상은 성취중생원(成就衆生願)과 정불국토원(淨佛國土願)을 품고 그 실현을 위해 정진하는 실천 불교이다. 민중을 깨우쳐 자아를 실현케 하고 이상국가를 현세에서 건설코자 한다. 한국불교가 민족사에 그토록 적극성을 발휘하여 공헌한 것은 바로 보살의 원행사상(願行思想)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특수성을 지닌 한국불교가 민족사에 끼친 몇가지 사례를 다음에 증언하여 보기로 하겠다.

 삼국시대에 있어 불교는 국가를 수호하는 사상으로서 문화의 전통과 개혁을 촉진하는 사상으로서 항상 민족을 계몽지도하여 정치, 군사, 외교, 과학, 예술 등의 찬란한 문화를 이룩 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특히 구법승(求法僧)의 활약으로 외국과의 문화교류가 촉진되어 그 폭넓은 불교문화는 마침내 민족 통일의 원리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즉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교인들이 영도하는 지도이념의 실천에서 성취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자장율사와 원광법사등의 지도가 바로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자장은 허트러진 민심을 단합시키고 사해(四海)를 평정하며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신라인의 염원을 모아 황룡사의 구층탑을 쌓았다. 황룡사 구층탑은 호국안민(護國安民)과 사해평정(四海平定)이라는 신라인의 염원을 상징하는 것이며, 일반 민중의 총화를 이끄는 정신적 지향점의 구실을 하였다.  더욱이 통일성업의 전위역군이었던 화랑들에게 이념과 방향을 제시해 준 지도자는 바로 원광이었다. 흔히 원광의 세속오계를 유교의 오륜에서 취한 것으로 아나,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화랑의 세속오계 가운데 충(忠)은 호국인왕경에, 사(思)는 사중경에, 신(信)은 아함경에 임전무퇴(臨戰無退)는 대승의 파사현정사상에 있는 것이며, 무모한 살생은 자비정신에 입각하여 살생유택(殺生有澤)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이 세속오계는 민족통일의 위업을 이룩케 하는 정신적 원동력으로서의 민족 정신사에 새로운 장(章)을 전개시켜 주었다.

 고려시대에는 북방 외적으로부터 쉴새없는 참혹한 병화을 입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끝내 좌절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였다. 오히려 고난을 딛고 세계에 유례없는 대장경을 판각했고, 승군(僧軍)인 강마군(降魔軍) 및 승장(僧將) 김윤후 등은 외적과 항전하여 조국을 지키는데 앞장섰다. 대장경은 이규보의 기고문(祈告文)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정법을 수호하고 호국안민 하려는 소원에서 완성한 민족사상일대장거(民族史上一大壯擧)한 사업이었다.  또 한편 몽고의 화난(禍難) 속에서 불타의『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自歸依法歸依)』는 정신을 받들어 승(僧) 일연(一然)이 민족주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편찬한 것은 특기할 만 한 것이다. 곧 일연은 불교적 시각을 통하여 민족사를 재평가 함으로써 민족의 정통성 및 자부심 그리고 강인한 민족정신을 강조하였으니, 이는 한국사학사상 불교가 민족의 정신사를 최초로 완성한 것이라 하겠다. 그뿐더러 불교는 민족의 생활을 지도하였다. 역승(力僧)에 의한 土木事業, 佛寶.長生庫 등에 의한 寺院經濟의 건설로서 제위보(濟危寶) 등의 사회구제사업실시, 그리고 팔관회, 연등회, 법회, 사경, 經行 등의 포교수단을 통하여 민리민복(民利民福)을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사회적인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신미(信眉).김수온(金守溫) 등의 불교 선각자들에 의해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치되어,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등의 불전이 한글로 번역 간행되고, 또한 사찰은 여러 수모(受侮) 속에서도 역승(力僧) 및 계(契)등의 자치조직에 의하여 유지수호 됨으호써 불교는 민중 속으로 깊이 보급되어 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유교국이었던 조선왕조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에서조차 승과(예전禮典) 등에 대한 규정을 명기치 않을 수 없게 한 원인이었다. 더욱이 임란과 호란을 당하자 승려들은 조국을 끝까지 지키었다. 명리를 일삼던 양반귀족과 관군들이 도성을 버리고 달아날때, 그들은 승병을 조직하여 생사일여의 신념과 용기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서산과 사명대사의 업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규(靈圭), 처영(處英)등의 금산과 행주싸움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공적이다. 특히 왕의 환속과 관직의 권유를 뿌리치고 영남에 내려가 八公, 龍起, 金烏등의 산성을 쌓았으며 선조 37년에 국서(國書)를 받들고 도일(渡日)하여 외교적 수단을 발휘 강화(講和)를 맺음으로써 전란을 마무리한 사명대사의 위업은 승병사상 일대 기념비적 사업이다. 

 最近世史에 있어 불교는 교세확장과 한편으로 일제침략에 대한 독립운동을 지도한 점에도 그 특색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곧 교세확장운동은 임란 이후 정부의 도총섭(都摠攝)제도 혹은 공명첩(空名帖)[법주사 400장, 유점사(愉岾寺) 150장, 귀주사(歸州寺) 500장 등]등의 하사(下賜)로서 사원의 대수리등이 꾸준히 전개되어 왔는데 개항이후 이동인(李東仁)을 거쳐 1902년 서울에 원흥사를 세워 전국포교조직을  근대적으로 강화함으로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1906년 불교연구회가 초등, 고등교육사업에 착수하고, 이어 불교청년회, 불교진흥회, 불교부인자선회 등이 활동함으로써 불교는 차츰 그 교세를 넓혀갔던 것이다. 한편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은 한용운, 박한영 등 불교도에 의하여 철저하게 영도되었다. 불교도들은 민족독립의 논리를 명철하게 제시하고, 민족자존의 삶을 완벽하게 추구했으며 시종 이 방향에서 일관성있게 민족을 지도하였다. 특히 한용운은 그의「조선독립의 서」에서 민족자존이야말로 인류공유의 본성이며 평세불화(平世不和)의 길임을 밝히었다. 바로 이 정신이 삼일운동의 지도 원리가 되었던 것이다.

 불교도들은  삼일운동에 총궐기하여 참가하였다. 그런데 일부 사학자 가운데는 불교의 비세속적인 특수성을 들어 이를 대단치 않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으나, 이는 오늘 그 잘못이 크게 지적되고 있다. 사실 삼일독립 운동은 처음부터 한용운 등의 불교도가 참가하여 진행된 것이며 유교측을 이에 가담시키려고 유림대표 곽제우와 교섭한 것도 그들이었다. 더욱이 독립선언서에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추가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게한 것도 그들이었다. 전국 1,000여 사찰은 이 때 한용운이 파견한 신상원. 백성욱. 심대용. 김법린 등에 의해 위로는 서산과 사명의 피를 받은 법손임을 자부하고 아래로는 한용운의 장열한 뜻을 받들어 인근 촌민을 이끌고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삼일운동 이후도 불교계에 독립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그 결과 조국은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한국사에 비쳐진 불교는 화쟁사상과 주체의식(정법호국사상 正法護國思想) 그리고 정불국토(淨佛國土)의 이상국가를 현세에서 건설하려는 이상으로서 민족과 국가, 그리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창조하는데 원동력이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증언앞에 오늘의 불교계는 크게 반성, 분발하여야 될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선인의 위업을 계승하여 오늘의 민족의 어려운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승화시켜야 할 책임이 우리 불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지눌이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서 『사람이 땅에서 넘어지면 그 넘어진 땅을 디디고 일어선다. 그 땅을 떠나 일어서려 함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인인지면도자(人因地面倒者) 인지면기(因地面起) 이지구기(離地求起) 무유시처야(無有是處也) )』라고 이른 교훈처럼 불교도는 전통과 현실을 직시하여 종단의 화합과 종립대학내의 의과대학설립, 불교방송국 및 의료시설 등으로써 포교조직을 근대화하는데 전력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불교중흥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