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교미술 ] 6.부석사와 무량수전

한국의 불교미술

2008-01-05     황수영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 18호부석사의 본당(本堂) · 동양최고(最古)의 목조건물(木造建物)

하나의 고대사찰이 창건이후 일천 수백년을 지나면서 법등(法燈)을 지켜 왔다는 사실은 비단 그사찰뿐 아니라 나라의 경사요 국민의 다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물며 이 사원이 오늘 옛 규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내 으뜸의 문화유산을 전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층 그러하다.

 태백산 부석사는 신라 문무대왕(文武大王) 16년 서기 676년에 창건되었으니 금년이야말로 만 1300년을 맞은 가장 뜻깊은 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권7, 문무대왕 16년 춘 2월조에는 고승의상봉지창부석사(高僧意相義旨創浮石寺)라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이사찰의 창건을 위하여서는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이신 문무대왕과 신라의 가장 이름높던 의상법사 두분이 깊이 관련된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 두분은 생전에 매우 가까운 인연을 맺어서 한반도 통일에 크게 이바지 하였을뿐 아니라 국민의 교화를 위하여 또한 협력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태백산 부석사를 창건하려할 때 대왕은 누구보다도 먼저 의상법사로 하여금 이곳 국찰(國刹)에 주석케 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인적관계뿐 아니라 부석사는 나라의 중요한 땅을 골라서 건립된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될것이다. 태백산은 신라 오악(五岳)의 하나인 북악(北岳)으로 나라의 제사를 받아왔다. 그리고 부석사가 자리잡은 영주(英主)의 땅이 또한 국방과 교통에서 매우 중요하므로 신라통일 직후에 부석사같은 호국대찰이 이곳에 이룩된 것이다.

 끝으로 이부석사는 신라 화엄종(華嚴宗)의 종찰(宗刹)로서의 큰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이 부석사를 으뜸으로 삼고 이른바 전교 十찰(삼국유사 권4, 의상전교조)이 전국에서 전래한 사실은 또한 주목할 만하다. 또 고려에 이르러 원융(圓融), 충명(沖明) 두 국사를 비롯하여 고승대덕이 이곳에 주석한 사적에서 창건이래의 높은 사격(寺格)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후 사찰은 점차로 쇠퇴하였으며, 임란(壬亂)의 재화를 모면하면서 마침내 오늘에 이른 것은 참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금년에 1300년을 맞아 이곳에서는 큰 법회가 열렸고 또 이 뜻 깊은 해를 기리는 학술의 모임이 있었던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의 일이다.

 이같이 부석사는 때와 인물과 지리(地利) 삼자의 미묘한 계연을 얻어 이룩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창건이래 여러 고비를 겪으면서 오늘에 전래한 곳에는 눈에 아니 보이고 기록에 담기지 못한 가지가지의 사연이 얽혀져 있다. 또 승속(僧俗)의 꾸준한 노력이 두터운 믿음과 더불어 수호의 큰 힘을 이루어 온 것은 다시 말 할 것도 없다.

무량수전의 주존(主尊)소조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 45호)

남향한 부석사는 태백산 연봉 중에서도 봉황산(鳳凰山) 남록을 차지하여 여러 층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석단을 쌓으면서 상하의 사역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층단을 이루는 곳마다 장대석으로 계단을 마련하였는데 이들 사역과  계단의 수효를 들어서 九품 연화대 또는 108계단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같은 가람배치는 자연의 지세를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창건 당초부터 최상급 기단 위에 무량수전을 두고 그곳에 아미타불좌상을 안치하였다고 생각된다.

그후 오랜 세월에 사찰의 규모가 크게 감축됨을 따라 하단의 여러  건물과 문루(門樓)는 모두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오늘 최상단 위에서 무량수전과 그 주존불이 엄존하는 사실만은 모두 신라이래의 유구와 유법을 그대로 지켜왔기 때문이다.

 

부석사에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과 조사당이 보존된 까닭은 이 부석사 수호의 마지막 대상이 이들에 집중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비록 이들 대소 二동의 건물연대가 고려로 추정되기는 하나 그 건립된 자리나 그들이 지니는 기본양식 그리고 크기 같은 것은 모두 신라 이래의 오랜 전통과 규모와 기법을 오늘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러므로 종전과 같이 외국학자를 따라서 중국 어느 지방양식과 결부 고찰하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의 오랜 전통적 양식에 깊이 유의하여야 될 것이다. 이같은 시점에서 작금년에 걸친 경주 안압지 발굴에서 적지 않은 신라 시대의 목조건물의 부대(部材)가 발견되었고 그들과 이곳 부석사 건물과의 계보를 더듬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 무량수전은 비록 고려시대의 건물이라 하더라도 신라창건이래 같은 장소에서 그 이전의 규모와 양식을 지녀온 건물이라고 고쳐 보아야 할 것이다.

무량수전 앞의 石燈(국보 제 17호)

부석사 1천3백년을 맞이하여 부석사는 우리나라 불교미술 연구에 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려는 바이다. 이와 꼭같은 우리의 새로운 안목은 이곳 무량수전에 봉안된 독존(獨尊)상인 아미타여래좌상에 대하여서도 또한 그러하다. 이불상은 기왕에 일본학자에 의하여 잘못 석가여래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 까닭의 하나는 이곳 부석사 동쪽에서 전래하는 고려초의 원융국사비문에 이곳 법당 안에는 오직 아미타불만이 홀로 안치되어서 그 좌우에는 보처상을 두지 않았으며 또 탑을 세우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같이 탑을 아니 세우고 혹은 불상을 홀로 안치하는 것은 부석사 건립 당초에 의상스님이 전한 일승(一乘)의 심지(深旨)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상기한 비문에 따라서 고려초인 11세기에는 불상배치가 오늘과 똑 같았다는 건인데 그같은 방식은 이 비문에서 미루어 창건 당초인 신라의 방식임에 똰 의심이 없다.

그러므로 이곳 무량수전의 소조(塑造)여래좌상은 오늘 그 건물과 같이 고려시대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양식이나 크기 그리고 법당과는 달리 동향(東向)하고 있는 그 방향이나 소조라는 재료의 특색,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본존의 수인(手印)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까지 넣어서 신라의 모습을 충실하게 계승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 건물에는 화재로 말미암은 중수가 거듭 있었고 불상도 머리같은 것은 고려때 새로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여러 점에서 신라 이래의 방식을 오늘에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 경주 토함산 석굴암 본존의 명칭이 또한 문제되는 바 동양대불(大佛)인 이 석상에 대한 오랜 숙제를 풀기 위하여서는 먼저 이곳 부석사의 본존이 더욱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