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촬요연의] 오조 홍인대사 술 최상승론 (3)

[禪典 撮要 演義] 五祖 弘忍大師 述 最上乘論 (3)

2008-01-03     석주스님

     과거 현재 미래에 부처님은 한량없이 많으나
     그중에 眞心을 지키지 않고 성불한 佛은 하나도 없다.
     마음을 한곳으로만 지으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마땅히 도에 들려는 자는 명심하라.

     答曰.  涅槃者 體是寂滅  無爲安寧 (답왈)       (열반자  체시적멸  무위안녕 ). 
     我心 旣是眞心  妄想측斷  妄想斷故      (아심  기시진심  망상측단   망상단고)
     則具正念  正念具故  寂照智生               (칙구정념  정념구고  적조지생)     
     寂照智生故 窮達法性  窮達法性故        (적조지생고  궁달법성  궁달법성고)    
     則得涅槃 故知守本眞心  是涅槃之根本. (칙득열반  고지수본진심   시열반지근본)

     [13]   입도入道의 문門  

   문) 어찌하여 근본 참마음을 지키는 것이 입도의 요문이 되는가?
        (問曰 何知守本眞心 是入道之要門)

   답)  손톱으로 땅에 불보살의 형상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혹은 절을 짓고 탑을 쌓고 수행인을 공양하고 경전을 출판하며 외로운 이를 돕고 널리 자비보시를 행하며 진리의 법을 펴서 정법사회를 이루어 내지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위없는 큰 도를 이루게 하는 등] 한량 없는 공덕을 쌓게 하는 것은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이 다못 지혜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여 장차 수승한 지혜와 밝은 덕성과 큰 복을 얻게하며,  또한 불을 뵈올 인연을 짓도록 하기 위함이다.

   [대개 중생은 스스로 겁약하여 작은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모른다.  보리(覺)를 이루고 성불한다 하면 이것은 공상적인 일이거나 특정한 사람이나 성인만의 경계라고 생각하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큰 지혜와 무량 공덕을 갖추었다 하면 그것은 큰수행을 한 대보살의 경지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는 [ 나는 중생이다.]하고 自屈한다. 이런 중생에게는 오직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며 계수로 측정되는 유위공덕만이 흥미가 있고 구미가 당긴다.  이러한 有爲功業을 닦으면 有爲福報를 얻는 것이다. 유위라 함은 [함이 있는 행위다.] 한 생각이 있고,  한 행위가 있고,  한 결과가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위에는 과보가 따른다. 크게 밝은 행,  보시 공덕에는 큰 과보가 따른다.  그러나 이것은 [함이 있는 ] 功界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아무리 수승한 복보를 누리더라도 이것은  마침내 끝이 있고 허무러지는 복덕이다.  함이 있는 행은 그것이 비록 착한 행이라 하더라도 무위의 본분행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소망이나 허망한 현상이나 감각 밖에는 한치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중생들은 이 밖에 무엇을 논한다면 허망하다고 하고 그것은 곧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라 국집한다.  그러므로 이들을 인도하는 데는 불가불 방편이 없을 수 없다. 이곳이 三乘敎法이 벌어진 연유이다.

   밝은 마음,  착한 행을 하면 수승한 복덕을 받는다.  비록 유한이며 상대적인 복덕일망정 그것은 그들을 달래어 마침내 청정무위의 본지를 알게 하는 호방편이다.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비록 손톱으로 땅에 불보살이나 탑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온갖 선공덕을 닦을 것을 권하시며 인도하신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멀고 먼 길을 도는 길임은 어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불하려면 무량공덕행을 3아승지겁 동안 닦아야 한다는 말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빨리 성불하기를 바라는 자라면 마땅히 바로 이 근본 참마음을 지킬 것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 무량제불이 계신다. 현재 또한 무량제불이 출생하신다. 미래 또한 무량제불이 성불하신다 그러나 단 한 부처님도 참마음을 지키지 아니하고 성불할 수 있었던 부처님이 있다 하면 이는 큰 잘못이다.  그러므로 유교경에 이르기를 [마음을 한 곳으로 오로지 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하셨으니 이로써 근본 참마음을 지키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要門임을 아는 것이다.

   答曰,  乃至擧一  手瓜畵佛形像  或造恒沙功德者     (  내지거일   수과화불형상   혹조항사공덕자 )
   則是佛爲敎導無智慧衆生  作當來勝報之業     (칙시불위교도무지혜중생  작당래승보지업)
   及見佛之因.   若願自早成佛者 會是守本眞心. (급견불지인. 야원자조성불자 회시수본진심) 
   三世諸佛  無量無辨  若有一人  不守眞心          (삼세제불   무량무변  야유일인   부시진심)
   得成佛者  無有是處.  故經云.  制心一處          (득성불자   무유시처.  고경운.    제심일처)
   無事不辯   故知守本眞心   是入道之要門         (무사부변   고지수본진심    시입도지요문)

 

 [14]  일체경전의  근본

   문)  참마음을 지키는 것이 12부 경전의 근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門曰   何知守本眞心是十二部經之宗)

   답)  부처님께서는 여러 경전에서 사람의 하는 행의 악한 일 착한 일을 가려 말씀하시고 그에 따른 죄와 복도 말씀하시면서 나쁜 과보를 받거나 좋은 과보를 받게 되는 차별 인연을 낱낱이 말씀하셨다.  거기서는 높은 산 깊은 물 넓은 땅과 그밖에 여러가지 나무나 풀 등 잡물을 들어서 한량없는 신통변화를 나투시기도 하신다. 이것은 부처님이 다못 지혜없는 중생들의 가지가지 욕심과 가지가지 마음씀씀에 따라서 그를 교화하고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저들의 마음의 취향을 따라서 그를 교화하여 마침내 성불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깊은 定가운데서 지혜로 분별하여 마음을 쓰면 범부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신기한 작용이 나온다.  이것이 신통이다.  원근 차별없이 보는 천안통,  무량 다생의 유전상속의 형태를 숙명통,  원근에 걸림없이 듣는 천이통,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아는 타심통,  몸을 자재하게 변화시키는 신경통,  일체 생각의 출입이 없는 누진통 등을 육신통이라 한다.  이런 통력은 마음을 닦아 삼매의 힘을 이룬 사람이라면 심천의 차이는 있어도 다소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외도도 오통까지는 얻어진다.  그러나 누진통은 불보살만이 구사하는 경계다.  이것은 번뇌망념이 말끔히 탕진된 데서 오는 묘력이기 때문이다.

   신통은 청정자성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환몽이다. 그러기에 정법을 공부하는 도인은 아예 관심이 없다.  만약 관심을 두면 환몽을 좇는 결과가 되고  도업은 이룰 수 없게 된다.  오직 범부 외도들이나 이에 관심한다.  실로 본분지에서는 마음 작용 일체가 신통인 것이며 우리의 생활전부가 묘용의 전개인 것이니 모름지기 본분 도리를  밝히는 대도를 향하여 우리의 노력은 기울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성인은 결코 신통을 남용하지 않으셨다.  오직 사뜩한 중생의 기근을 따라 그를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통 방광을 나투신다.  그래서 사악한 마음,  삿된 소견을 돌이켜서 성불의 대도에 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미 불성이 본래로 갖추어 있으며 중생이 되었다 하여 조금도 더럽힌 바 없이 부처님과 터럭끝만큼의 차이도 없는  청정을 유지하고 있는것이다.  다만 그것이 구름에 덮힌 해와 같이 망념에 덮었뿐인 것을 사무쳐 알았을진대 다만 훤출히 근본 참마음을 지킬 것이니 여기에는 본성에 덮였던 망념의 구름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 이것은 망념의 구름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본래 없는 것을 미망 착각으로 인하여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그에 마음이 빼앗기어 본성의 밝고 청정한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제 근본 진심을 지킬 때 여기에는 없어질 망념의 구름이 없다.  구름이 걷히면 명랑하게 태양이 드러나듯이] 여기에서 우리 본성의 태양이라 할 慧日이 나타난다.  [자성의 무량공덕이 훤출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다시 많은  학문을 배우거나 재주를 배우려고 헛된 곳으로 마음을 쓰랴.  이것은 도리어 망녕을 더하는 것이며 허망한 경계에 집착하고 그에 빠져드는 것이니 생사고를 자초하는 결과가된다. 일체 이론이나 지식과 세간의 과거의  일이나 현재나 미래에 관한 일체 일 들은 그것이 아무리 화려한 것이라 하더라도 필경 망념 소재이니 생사의 소재 밖에 딴 것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 티끌이 되는 일체 망념을 멀리 하여야 하니 비유컨대 거울을 닦음에 티끌이나 흠이 다하면 밝음이 저절로 나타나느니라.  그러므로 번뇌있는 마음으로 배운 것은 필경에 번뇌와 함께 사라질 티끌이니 생사를 벗어나는 도리와는 아무 상관 없느니라.

   만약 능히 일체 망념에서 훤출히 벗어나 청정 본성이 낭연한 정념을 잃지 않을 것이며 함이 없는 마음으로 배우는 것,   이것이 참으로 배우는 것이니라. 비록 말로는 참으로 배운다고 말하나 참도리에서는 실로 배움이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번뇌를 벗어나 수행하는 나나 마땅히 이룰 열반 피안도 모두가 한결같이 空이니 이것은 둘이 아니며 또한 하나도 아니다 이 까닭에 배움이 없다 하는 것이다.

   진리가 원래로 공하였으나 밝게 근본 진심을 지키면 망념이 나지 아니하고 아소심이 없어진다. 이까닭에 열반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법을 설함이없음을 아느자,  이 사람이 참으로 具足多聞이라]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일체 법을 말씀하시는 것은 중생에 여러 차별의 성질과 생활과 습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 인연으로 된 중생심 등 망념을 제거하여 활달 훤출한 참 성품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설법은 중생심의 幻垢를 없앨 뿐,  실로는 환구가 다한 참성품 자체를 말씀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부처님의 참 설법은 참성품 자체의 말씀이다.  이것은 분별심으로 알수 없다.  소득심으로 알수 없다.  이러한 아소심이 없는 참마음에서 비로소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참설법은 가린 것이거나 막힌것이 아니고 시방에 확 통하여 있다.  언제나 무량 항하사 법문이 우뢰처럼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참도리—   본분에서 말하면 일찌기 한법도 설한 바가 없으니 만약 부처님이 법을 설했다 하면 불을 모르는 자요 불을 비방하는 자라 하는 것이다.

   참으로 부처님의 참설법은 설함 없이 설하고 들음 없이 듣는 것이다. 이 들음 없이 듣는자—  이것이 무량항하사 법문을 일시에 듣는 것이니 어찌 부처님의 목소리를 따라 알아듣고 기억하는 다문에 비할까보냐.  실로 부처님이 일찌기 한 법도 설한 바 없음을 아는 자가 부처님의 법을 통재로 안 사람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구족다문이니 부처님의 일체 설법 무량 법문이 그 가운데 모두 갖춘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진심을 지키는 것,  이것이 12부경의 근본임을 알수 있다.

    答曰  如來    於一切經中 說一切罪福  一切因緣果報  或引一切山河大地草本等  種種雜物  起無量無邊       譬喩.   或現無量神通種種變化者   只是佛  爲敎導無智慧衆生  有種種欲心   心行萬差  是故  如來隨其心門 引入一乘  我旣體知衆生佛性  本來淸淨  如雲底日 但了然守本眞心  妄念雲盡  慧日卽現 何須更  多學知見    取生死苦   一切義理   及三世之事   譬如  磨鏡진盡  明自然現  則今於無明心中   學得者  終是不堪  若能了然  不失正念  無爲心中  學得者 此是眞學  雖言眞學  竟無所學  何以故  我及涅槃  一皆空故 更無 二無 一故 無所學  法性雖空  要須了然  守本眞心 妄念不生  我所心滅  故涅槃經云   知佛不說法者   是明具足  多聞  故知守本眞心  是十二部經之宗   

 

[15]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조祖

   문)  근본 참마음을 지키는 것을 어째서 삼세제불의  조종이라 하는가?
         (問曰  何知守本眞心  是三世諸佛之祖)

   답)  [부처님은 깨친 어른이다.  몽환에서 깨었으며 참성품을 깨쳤으며 무상의 진리를 깨쳤다.   참성품 무상의 진리라 하지만 이것이 따로 독립적 존재로 있는 것을 안다거나 잡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에서 얻는 것이며  마음을 깨닫는데서 본래의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진리다.  과거의 성인도 마음에서 진리를 이루시어 부처님이 되셨고 오늘의 수행인도 마음을 깨쳐 성인이 되는 것이며 미래의 범부들도 역시 이 도리를  통하여 성불한다.   그러므로  삼세제불이 모두가 마음성품 중에서 나온다 하는 것이니 먼저 참마음을 지키면 망념이 나지 아니하고 [ 망념이 나지 않으때 나와 나의 것이라는 소유심이나 내가 아닌 다른 것이라는 대립심이 나지 않는다. 나를 세울 때 나 아님이 생기고 동시에 그와 대립상대의 관계가 된다.  이럴수록 나 자신은 진리 당처에서 멀리 망령된 나(妄我)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나와 나의 것을 두는 마음,  이것이 아소심이지만 아소심은 근본적으로   참자기를  잊고 망념을 인정하며 망념에 끄달린 결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소심이 없어진 다음에야 성불하게 된다.

   (아소심에 대하여  [내가 터럭 끝만큼이라도 다른 이보다 낫다 하는 생각이 있거나 내지 내가 능히 이와 같다 하고 인정하면 곧 이것이 아소심이라 열반에 이르는데 병통이 된다.]고 오조는 말씀한다) 이로써 근본 참마음을 지키는 것이 삼세제불의 조종인 것을 알 수 있다.

   答曰  三世諸佛 皆從心性中生  先守眞心  妄念不生   我所心滅  後得成佛  故知守本眞心  是三世諸佛之祖

 

  [16]  부촉付囑

   위에서 말해온 4종 문답에 관련하여 이것을 상세히 말하자면 한이 없다.

   내 이제 그대들에게 꼭 바라는 것은 각자의 본심이 곧  불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이 까닭에 은근히 그대에게 권하노니 천가지 경,  만 가지 논이 설하는 바는 근본 참마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도의 요점 이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일체 설법과 역대 조사의 기변이 이것을 말씀하셨다.] 내 이제 힘써 이말 저말을 들어 말한 것은 법화경에 보이는 바,  놀이에 팔려 집이 불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아이들을  집밖으로 구해내고 그에게 보배로 장식된 白牛大車를 주는 것이며,  또한 가난하여 하루 하루를 품팔이 노동으로 생계를 잇는 벗에게 좋은 음식을 주고 다시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 구슬을 주는 것이며,  또한 일체 병고를 없이할 뿐 아니라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신묘한 약을 주는 것인데 그대가 스스로 이것을 받지 아니하고 이약을 먹지 않는다면 너의 궁핍과 고난을 나인들 어찌 할 것인가.  다행히 내가 이른 도리를 깊이 깨달아 망념이 나지 아니하고 아소심이 없어진다면 [이것은 마치 구름에 덮였다가 구름이 걷힘에 밝은 햇빛이 일시에 나타나듯이]  일체 공덕이 저절로 원만하게 되어 밖으로 얻으려 하여 도리어 생사고를 취하는 일이 없게 되느니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항상 바른 생각(正念)으로 스스로를 살펴서 현재의 즐거움에 애착하여 기나긴 미래의 고통을 심지 마라.  [현재의 즐거움이란 풀끝의 이슬이다.  해가 채 퍼지기 전에 아침 바람에 떨어진다.  칼끝에 묻은 꿀이다. 한 입맛감도 못되는 것을  이것을 먹으려다가 혀를 잘린다.  즐거움이란 도시 감각에의 탐닉이며  추구인데  이런 감각에의 추구는 자신의 본성을 잊고 밖으로 내어닫는 결과가 된다.  참 자기를 등지고 허망하고 거짓된 환상을 좇으며 그 속에 자신을 세우고 행복과 안전을 구하고자 하는 의식상태는 더욱 더 자신을 불안과 고통 속으로 몰고 간다.  자기 상실에서 오는 공허한 심성,  자극과 감정에만 매달려서 자기를 인정할 밖에 없는 황량한 정신,  참된 행복에의 길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불안한 인간상— ,  이런 것들로 해서 인간고는 꼬리를 물고 찾아든다.  현재의 감각적 즐거움에 애착한다는 것은 이와같이 허망하다. 자기도 속고 남도 속는 것이니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노력하고 노력하라.  이몸은 끊임 없이 변하고 죽음을 향하여 내닫는 무상인 몸이지만 [ 한편 한량 없는 공덕을 지을 수 있는 몸인  것이니 겉모양인 형상이나 감정이나 감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깊이 본성을  살리는  공부를 지어가야 한다.]   모두가 함께  성불하는 원인이 되는 공부를 지어가 [ 이현세를 알차고 보람있게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삼세를 헛되이 보내는 것이며 소중한 공부의 기회를 잃는 것이 된다. 깊이 살펴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