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조화속의 생명들

특집-한 해를 맺는다

2008-01-03     김팔봉

 추석 명절이 지난 뒤로 하루 동안 기온이 10도 이상 차이가 생기더니 어느덧 가을이 깊어져서 울안의 나무잎이 어떤것은 붉게 물들었고, 어떤 것은 벌써 앙상하게 가지만 남았다. 만물이 잠자는 듯한 겨울이 가까왔나보다.

 그런데 뜰앞에 있는 나무들이 이렇게 힘없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집 하수구를 만드느라고 경사가 四十도나 될 만큼 절벽같이 쌓아올린 석축담의 돌틈에는 그 동안 내가 못 보았던 쑥갓 잎사귀같이 생긴 키가 큰 야생초가 이쪽 저쪽 벼랑에 우뚝우뚝 기운좋게 서 있는게 아닌가. 누가 돌틈에다 구멍을 뚫고서 심을 수도 없을 만큼 가파르게 경사진 석축담 돌 위에 저절로 탄생한 이 야생초의 생명을 발견하고서 나는 새삼스럽게 무궁한 생명력에 놀랬다. 이것은 도저히 인공으로 ㅡ 기술과 정성을 다하더라도 ㅡ 이룩할 수 없는 조화가 아닌가.

 앞뜰에는 나무들이 힘 없이 시들어 가는데, 하수구 옆의 돌멩이 위에는 야생초가 씩씩하게 우뚝 서 있으나 그러나, 이것도 역시 얼음이 얼고 흰눈이 쏟아지기 전에 자취를 감추렸다. 그리고 돌 위에 태어났던 저 풀이 내년에도 저 자리에 태어날른지 그것도 알 수 없지 않은가. 왜 그러냐 하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저 돌멩이 위에 저런 풀이 생겨난일이 없었으니 내년에 저것이 되살아 나리라고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알 수 있는 일은 얼음 얼고 눈 내리기 전에 돌멩이 위의 야생초는 없어지리라는 것뿐이다.

 나는  언젠가 가끔 나가던 다방에서 그 집주인 마담으로부터
「선생님, 사람이 왜 늙을까요?」
 돌연히 이 같은 물음을 받고서 잠시 어리둥절 했던 일이 지금 생각난다. 그때 나는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다가
「글쎄… 세상에 태어났다가 일찍 죽지 않으면 늙어가지고 죽도록 만들어진 것이 인생이니까, 그런 조화 속에서 저절로 늙는거지….」

 이렇게 말했다. 이같은 대답을 듣고서 마담은 나의 대답이 싱겁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이 이상 대답할 지식이 없다.

최근 몇해 동안 내가 단골로 정해놓고서 가끔 들르는 다방은 나이 많은 친구들이 열댓명 가량 출입하는 곳인데, 이곳에는 七十세 안팎부터 九一세에 이르는 노인들이 거의 날마다 한번씩은 드나드는 터이어서, 항상 보이던 얼굴이 두 달 이상 나타나지 않는 날이면 이곳에 모이는 친구들은 그 결석자의 안부를 서로 묻는 형편이다. 왜 그러냐 하면 과거 수년간 자주 나오던 친구로서 두 달이상 안 나오던 친구는 모조리 세상을 하직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에도 최근 二년 동안에 저승으로 떠나간 이 다방의 친구가 일곱명이나 되니 말이다.

 얼마 전에는 내가 존경하는 그전 국회의원 모씨가 어느날 힘없는 목소리로 자기의 앞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아, 내가 오늘 아침에는 좀 이상했단 말야. 아침상을 받고 앉아서 밥을 먹으려고 하다가 문득 내가 세수를 했던가… 안했던가… 안했다면 세수를 하고나서 먹어야지…하고서, 생각을 해낼려고 곰곰히 되새겨 보았는데도, 대체 기억이 희미해서 세수를 한 것도 같고… 않한 것도 같고 해서 판단이 안 된단 말야. 그래 시계를 보니 아홉시 반이 지났기에, 그냥 세수 한걸로 치고서 밥을 먹고서 양복으로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와버렸지. …나오면서 생각해봐도 기억이 희미해서 세수 했는지 않했는지 생각 안나거든…이거 정신이 이렇게 희미해 가지고서야 앞이 얼마 안 남았을거 아닌가베…」이런 말을 하기에, 나는 속으론 수긍하면서도, 그의 서운해 하는 마음을 달래기나 하는 것처럼

「별 말씀을… 그렇게 생각 마십시오. 젊은 사람도 혹간 그럴 때가 있답니다. 선생은 아직도 십년은 넉넉히 수명을 보전하실겁니다.」이렇게 위안을 드렸다. 그리고서 그날 꽤 오랜 시간을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는데, 그 후 내가 두 주일 가량 다방엘 못 나가고 있다가 어느날 나가서 다른 친구한테 그 모씨가 요사이 잘나오느냐고 물었더니, 그분이 통 안 보인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궁금했지만 집도 모르고 해서 그냥 지냈더니, 얼마 후에 들으니까 그분이 八五세를 마지막으로 자기 육신의 생명을 낙엽처럼 떨어버리고 영원히 갔다는 것이다. 한 달포 전에, 아침에 자기가 세수를 했던가 안 했던가 생각이 안 나더라는 이야기를 나한테 했을때, 그는 이미 그 때 자기의 생명을 예견했던 것이 아닌가.

 지금 이해가 다 가기를 재촉하는 낙엽을 보면서…석축담 돌멩이 위에 저절로 생겨나가지고 우뚝 서 있는 야생초를 보면서…한달 전에 자기의 앞날을 예상하던 모씨를 생각하면서… 나는 모든 인간의 생명이 크나 큰 조화 속에 시작도 끝도 모르는 가운데 돌아가고 있음을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