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소리 · 땅의 소리] 자비의 역사를 일으켜야

2008-01-03     김용구

 불교는 한국인의 고향과 같다。
 오랜 세월 속에 불교는 이 땅에서 풍토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불교가 불문에 귀의한 신심 만의 안식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을 둘러싸고 있는 풍물이 되게 한다。

 우리는 모두 불교적 풍경 속에서 나서 산다。한국인 치고 절에 가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승려는 우리에게 낯익은 모습이다。산에 가면 절에서 맞아주고 도시의 거리를 가다가도 지나는 스님을 흔히 만나게 된다。모든한국인이 일상에 얼마나 불교의 말을 입에 담고있는가。

 인연、무상、사유、지혜、일체、진실…따위。
 또、찰나、과거、현재、미래、해탈、의식、분별…등 우리는 알면서 또는 모르면서 얼마나 불교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가。

 그뿐 아니다、역사、미술、건축、학문 등 온갖 창조활동에서、우리가 얼마나 깊은 불교적 영감의 조형만들었는가。

 불교는 우리 둘레 이르는 곳마다 있으면서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면서 우리가 반드시 우리의 풍경 속에서 불교를 생생하게 만나고 있는가。없는가。

 불교는 나의 먼 어렴풋한 기억의 원초부터 남아있다。새절、오래 된 건물、향내、탁발승…。
 지각이 난 뒤에 내가 불교를 다시 만난 것은 이상하게도 서양에서였다。

 예류살렘、성 베드로、노트르담、웨스트민스터 아베이 등 성지와 사원을 찾았을 적이었다。
 서양의 성역들의 한가운데서 내가 발견한것은 어쩔수 없는 거리감이었다。그것은 낯익은 장엄이 아니라 낯선 장중함이었다。거기서 나는 나에게 익숙하고 친화감으로 감싸 주는 또 다른 성역이 무언인가를 생각했다。

 고국에 돌아 온 뒤부터、나는 새로운 눈으로 불교사찰을 찾고 있다、。
 통도사、불국사、해인사、전등사、법주사…。발길이 닿는대로 이르는 곳 마다 나는 절을 찾는다。수덕사、정혜사、갑사、신륵사、백담사、자재암、직지사、금산사、흥국사、봉은사…。

 이 걸음 아프올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서양에서 동양으로 되돌아 오는 길에서 나는 서양이 낳은 길잡이를 만났다。
 불교를 찾는 미로에서 나를 도와준 첫 길잡이는 철학자 야스퍼스였다。

「불타와 같은 인생행로가 가능했던것、그리고 그것이 실지로 행해진 것、아시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거기서 불교적 생활이 지금도 이루어진다는 것ㅡ이것은 하나의 위대한 사실이다。」

 야스퍼스는 쇼펜하우어처럼 고뇌의 종교에 빠지지는 않았다。내가 서양의 정신적 조형을 보고 거리감을 느꼇듯이、그도 불교에 대한 거리감을 숨기지 않는다。하지만 나의 서툰 회의의 길가에서 그는 그럴 수 없이 좋은 스승이었다。갖는 정신력의 무엇인가를 밝히며 그는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과 하나가 되는 보편적 연민의 정、환희의 정으로서의 불교적 사랑이요、저비폭력의 태도이다。아시아에는 도처에서 무섭도록 꺼릴 일들이 일어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지만 자비의 빛은 누리에 충만해 있다。불교는 폭력도  이교도의 박해도 종교재판도 마녀재판도 십자군도 동반하지 않은 유일한 세계종교이다。」

 무엇 보다 용수(龍樹)보살에게로 나를 인도해 준 것을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대승불교의 길을 닦아 8종의 조사라 불리는 인도사상가 말이다. 용수를 알고 얼마 뒤의 일。서울에서 지금은 없어진 어둑침침한 중국서사 한 구석에서 「중론(中論)」한 권을 찾아든 때의 감격을 잊을수 없다。청목(靑目)이 풀이한 용수의 주저「중론」의 한역판。

 그로부터 10년이 되도록 나는 「중론」을 놓지 못하고 있다。그것은 반야의 영역을 가리키는 푯말이다。

 여기서 나의 여로는 구마라습을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고구려 출신의 승랑(僧郞)을 만나게 된다。이 물줄기에서 「삼론현의(三論玄義)」가 나오고 삼론종을 이루어 한반도에 흘러 들었다。그러니까 나는 아직 한국불교 이전의 먼 상류를 따라 산책하고 있는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야경」 그중에서도 「금강반야파라밀경」에서부터 「중론」을 거쳐 수없는 골짝을 따라 「삼론현의」에 이르는 외곬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나는 이강가에서 무엇보다 사유의 줄기찬 율동에 마음이 끌리고 있다。뒤에 이 땅에서 빛나는 사유상(思維像)의 시대를 꽃피운 밑바탕의 활력。

 그 정신의 강렬한 움직임에 나는 한 없이 이끌리고 있다。

 현대가 잃어 버리고 있는 위대한 부정의 정신력과 그 탄탄한 근거를 이줄기에서 찾을 수 있다。부정의 또 부정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여 그것을 쌓아 올리려는 사유력의 운동은 장엄 그것이다。

 내가 아는 불교는 그런 생동력으로 고통에 절은 중생의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
 이러한 견지에 선다면 역사적으로 충실한 삶、자비의 역사성、역사적 고뇌에 대하여 불교가 무관심으로 안심할 수 있을까。
 불교는 위대한 부정의 운동이다。
 그것은 중생제도의 원동력이요 첫 계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