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생명의 뜨거운 체온(布施)

특집 Ⅰ 보살은 이와같이 교화한다

2008-01-03     관리자

종교적 설득은 지식보다도 실천에 있다. 실천은 논리적 사량분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믿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샘과 같이 끊힐 줄 모른다. 이 믿음을 부처님께서는 진정한 당신의 진리라고 수없이 어디서나 말씀하시었다. 그러한 믿음을 한마디로 말하면 보시이다.

 佛敎는 어렵지 않다. 이 布施하나만이라도 지키고 행하면 불교에 들어있다. 오늘날 보시라는 어휘가 남용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보시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것이 보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보시란 世俗的으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주체와 베품을 받는 객체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보시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집착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或者는 말하기를 우리가 현상적으로 보아 베푸는 사람과 베품을 받는사람이 확실히 존재해 있는데 어찌 그러한 主 · 客이 없다고 볼수 있는가? 이것이 곧 현대인들이 불교를 비현실적이라고 批判을 하는 一面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믿음이 없는데서 입으로만 불교를 알고 싶고 불교를 애기하고 싶음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金剛經은 진정한 보시를 말씀하는 가운데 四相에 집착함이 없이 두루 베풀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위 어디에 住着함이없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주고 싶을 뿐이다. 住着이란 이것을 주면 그 보답이 얼마나 나올 것이라고 대가를 받음을 전제로하는 것을 말한다. 이세상에의 모든 대립갈등은 원망에 의해서 이다. 이 원망은 곧 준 것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는데서 일어난다. 이러한 대가를 받으려고 생각지 않는 그 마음자리가 진정한 보시이다.
그러면 그러한 보시를 할려면 주어야 할 물질이 있어야 줄 것이 아닌가? 줄 것을 갖는 것은 대가를 받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럼으로 대가를 받지 않고 주는 것은 관념이 유희와 결국 위선에 지나지 않는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한번도 그렇게 실천하지 않고 머리속에서만 주판알을 튕기는 자와 같은 생각이다. 그러는 한에 있어서는 보시가 이루어지지않고 또한 무한한 보시를 받지 못한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를 버렸을 때 내가 되살아 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보라! 촛불이 타오르는 것은 자기 몸을 태워야 되고 벼 이싹이 싹트는 것은 벼알자신이 썩어야 되는것과 같은 것이다.

 六組스님은 四相을 설명하는 가운데 我相이라함은 미혹한 사람이 나는 재보와 학벌을 가지고 좋은 문족에 속한다고 교만하여 모든 사람을 경시함을 말하고, 人相은 仁義智信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생각이 거만하고 자만심이 있어 두루 존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깨달아 行하는 인의 예지신은 너를 존경하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요, 衆生相은 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일은 다른 사람에 베푸는 행위이요, 壽者相은 경계에 대하여 取捨分別을 하는것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범부의 相을 넘어서 수행인의 四相이 있으니 그들의 아상은 마음에 나 너 하는 생각이 있어 중생을 경천히 여기고 오만한 것, 인상은 스스로 戒를 지키고 있음을 자랑하여 戒를 지키지 않고 있는 사람을 업신 여기는 것이요. 衆生相은 三惡道의 고통을 싫어하고 天上界에 태어남을 원하는 것이요. 壽者相은 마음으로 오래 살기를 애착하여 집착을 잊지 않고 부지런히 福業을 닦는 것을 말함이라고 했다.

 이러한 四相에 집착하여 베푸는 것은 진정한 보시가 아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되새겨 본다. 지금 우리 마음 속에 어떠한 도적놈이 나를 지키고 있는지 살펴보라. 이 네마리의 毒龍과 같은 도적놈이 내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한 결코 그것은 진정한 부처님의 뜻을 實踐하지 않는 것이다. 참된 보시란 不住相布施이다.

 六祖는 不住相布施의 참뜻을 보살이 施를 행할 때 마음에 바라는 바가 없으면 그 얻은 福이 시방의 허공과도 같아 비교 계량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능히 흉중의 망념과 습기 번뇌가 두루 흩어 뿌려서 四相이 완전히 끊기고 쌓인 것이 없으면 그것이 참보시이다. 그리하여 안으로 탐욕과 애욕을 제거하고 밖으로 보시를 행하여 내의가 일치하여야 된다. 남이 악을 짓는 것을 보되 그 잘못을 보지말고 자성에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을 相을 떠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시하는 말은 귀에 익도록 들어왔다. 지금 거리에는 한창 불우 이웃돕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불자는 이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法布施가 財布施보다 크다는 것만 알고 내것은 남에 게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위선의 증거이다. 마음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가름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재보시이다.
내 이웃 나보다 못사는 사람에게, 헐벗고 추움에 떨고 있는 우리 이웃에게 연탄 한장이라도 나누어 가지려는 그곳에 우리의 보시의 첫단계가 출발한다. 우리는 부처님의 고준한 法門만을 외우고 있을뿐 진정한 수행이 모자라고 않는가. 준다는 것은 곧 받는 것이다. 그러나 준다는 마음에 相이 없어야 한다. 同體大想속에 그냥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