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역사 사회 의식을 갖자

[특집] 오늘의 불교 어떠해야 하는가

2008-01-03     공관 스님

歷史. 社會 의식을 갖자.

  이 우주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치며 부처님이 태어나신 날이 초파일이다.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하신 불타의 탄신일을 맞으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 불교도들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자.

  이 우주에 생멸하는 모든 존재들은 이유없이 생성 파멸되진 않는다. 어떤 문화, 종교도 생성하면 멸망해 나가는 것이 역사성이다. 그러나 우리 불교도들은 너무나 사회, 역사의식을 망각하고 지내온 것 같다. 역사 사회의식을 갖지 못한 교단이나 국가는 정체되거나 멸망해 갈 것이다. 이 인류사엔 수 많은 문화 종교가 생성 괴멸되어 갔다. 우리 불교도 그렇지 않으란 법이 없다. 사회,역사적으로 필요치 않을 때 불교도 자취없이 인류사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석가의 출현, 성도 이 자체가 뚜렷한 역사, 사회의식의 발현인 것이다.

  대의 흐름까지 바꾸어 간다. 「모든 생명체는 모두 불성을 가졌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생명체 본질은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깨달은 사람이나, 신이나, 인간이나, 개에 까지 불성을 가졌으니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불성(佛性)은 청정(淸淨)하고 평등(平等)하고 자유(自由)로운 생명체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인간끼리의 차별을 둔 카스트제도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는 사회구현의 사자후인 것이며 인간해방의 메시지인 것이다. 신을 빙자한 인권유린의 제도는 철저히 본질적으로 부정하신 붇다야말로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간인 것이다. 그는 가장 본질적으로 인간구현의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모두 사회의식의 발현이 아닌 것이 없으니 당시 힌두이즘의 계급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신 분이다. 「누가 묻거든 대답하라. 사문 석가의 제자라고.」하신 말씀은 노예든 귀족이든 불제자가 되었을 때 평등하다는 말씀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사회에서 노예니 귀족이니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불타의 생명체 본질파악은 당시 인도사회에서 혁명적인 사상이며 사회 개혁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종교적 질곡, 기만에 찬 당시의 사회적 제도, 자연의 위협, 사상의 카테고리, 나아가 개개인의 습관성까지 넘어선 진실로 대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인류구현의 축음자(祝音者)인 것이다. 그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깨달은 자의 생애였지 「신」은 아니었다. 그는 신을 부정했다. 그의 위대성은 열반경 한 구절에서 더욱 빛난다. 「나는 승가 (Samga)의 일원일 뿐이지 승가를 이끌어 가는 자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인류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오늘에도 민중에게 군림하는 왕이나 독재자들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일찍이 불타는 승가의 민주적 운영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불교도 인간의식과 영합하여, 또 역사적, 사회적 상황의 변천에 따라 많이 수정 발전해왔다. 원시 불교에서 부파불교로 또 대승불교로의 발전은 시대상황에 따라 변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이 변형이 시대를 따르긴 하지만 그 시대의 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발전되어 왔던 것이지 불타의 근본사상이 변형된 것은 아니다. 풍토와 기후, 인습이 다른 민족, 국가에 불교전파는 외형적으로 많은 변형을 가져오곤했다. 중국에서의 선의 발달은 중국인의 사유로 불교를 수용, 발전시킨 좋은 본보기다. 많은 계율이 풍토 인습의 차이 때무에 무시될 수 밖에 없엇던 것은 당연하다. 나아가 승려들의 생활까지 불타 당시와는 많은 변형을 가져왔다. 또 하나는 신흥세력 내지 전통 정치세력의 정치이념으로도 불교가 기여하곤 했으니 중국의 남북조시대 선종의 발달, 우리 고려 초기의 선종의 발달 등이다. 삼국통일의 부작용인 백제, 고구려인의 통일신라에 대한 반발을 원효는 깊은 생명력의 고찰로써 화쟁사상 즉 일심사상을 실행함으로써 당시의 사회적 부조화를 딛고 찬란한 민족문화의 창달과 민족일체감을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경전 전부가 석가 친설(親設)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시대 상황에 따라 불교는 발달, 변모되어 왔던 것이다. 가섭의 주도하에 열렸던 제 1결집도 부처님이 돌아 가신 후 교단내에서 불설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위해 결행되었으니 모두 사회의 요구때문이었다. 이후 사회적 배경을 무시한 보수, 전통, 형식적인 상좌부는 소승에 머물렀으나 진보, 창의, 내용적인 대중부는 대승불교로서 매우 발달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이기 속에 사는 우리 불교도들은 역사 사회의식을 높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한국불교가 어떤 것을 싣고 어떤 방법으로 어디를 갈 것인가 라는 절박한 당면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있으리라 본다. 고도경제성장을 지향하는 오늘의 한국에 민족문화, 종교에 지대한 공헌을 해 온 불교가 무엇을 민족국가에 기여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과거 파쟁의 질곡(일본식 민주주의의 잔재 등)에서 헤어나 교단의 정비, 인재의 배출, 민족 정신문화의 역할 등 이 교단 자체의 요구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 그리고 시대적인 당위성의 큰 요구의 물결로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 사회의식을 외면할 때 한국 불교의 앞날은 매우 부정적이 될 것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고불이나 탑처럼 골동품화되어 관광객이나 유치하는 답보적인 종교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우리 주변에 눈을 돌려보자. 현란한 사이키 조명아래 요란한 고고를 부르짖는 방향잃은 젊은이들.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늘어나는 외래 종교 내지 신흥종교, 알 수 없는 현 우리들의 사유방식, 고도성장의 그늘에 하루 세끼의 밥을 해결치 못해 허덕이는 공원들과 이웃 자주 일어나는 살인행위, 삭막해지는 거리의 인심들, 늘어나는 점장이집과 작명가. 그리고 무당절등이 오늘의 한국에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러한 제문제가 정신문화의 황폐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 불교도들은 절실히 느껴야 할 것이다. 바로 우리들의 문제며 일인 것이다. 제 1결집, 제 2결집, 시대적 요구에 따라 발전된 경전들이 나왔듯이 오늘 한국 불교도 전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결집이 절실히 요구된다. 출가사문들이 이루는 한국불교교단도 항상 역사, 사회의 날카로운 눈이 함께 한다는 것을 다시 인식해야 할 것이다. 흐름과 함께 하면서 흐름 자체를 바꾸도록 우리들은 불퇴전의 원력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