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제문을 짓다] 인도와 불교

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

2008-01-03     서돈각

편집자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요,석가세존의 성지(城地)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불교도로서는 한번은 꼭 순례하고 싶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여름예 서반아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개최한 국제법학회 제57차 세계대회에서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도를 들리게 되었는데 이것도 불연일 것이다. 인도 정부의 호의로 그 대행기관인 ICCR의 안내를 받아, 비록 일주일이라는 단기간이었으나 인도의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었고, 부처님 발자취의 주요한 부분을 순례할 수 있었다. 한국사람들 중에는 인도를 5억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나, 경제적으로 곤란하고 문화적으로도 후진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인도는 개개인의 국민소득 수준은 낮을런지는 모르나,듣던 바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아주 곤란한 처지는 아니었고, 수입품보다 자기들의 생산품을 애용할려 하는 민족적 자주성이 역연하였으며, 매우 부지런한 사람들로 보였다. 종교는 역시 그 고유의 민족 종교인 힌두교도가 가장 많았으며, 다음으로는 역사적으로 지배를 받은 일이 있는 회교도가 많은 것이었다.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요, 석가세존의 성지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불교도로서는 한번은 꼭 순례하고 싶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여름에 서반아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개최한 국제법학회 제 五七차 세계대회에서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도를 들리게 되었는데 이것도 불연(佛緣)일 것이다. 인도 정부의 호의로 그 대행기관인 ICCR의 안내를 받아, 비록 일주일이라는 단기간이었으나 인도의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었고, 부처님 발자취의 주요한 부분을 순례할 수 있었다.

 한국사람들 중에는 인도를 五억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나, 경제적으로는 곤란하고 문화적으로도 후진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인도는 개개인의 국민소득 수준은 낮을런지 모르나, 듣던 바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아주 곤란한 처지는 아니었고, 수입품보다 자기들의 생산품을 애용할려 하는 민족적 자주성이 역연(歷然)하였으며, 매우 부지런한 사람들로 보였다. 종교는 역시 그 고유의 민족 종교인 힌두교도가 가장 많았으며, 다음으로는 역사적으로 지배를 받은 일이 있는 회교도가 많은 것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퇴하고 그 유적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인도의 불교도의 수는 800만이나 된다고 한다. 20세기 회교도에 의하여 지배받던 시대에 힌두교와 더불어 불교가 거의 파괴되었으나 힌두교는 민족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어서 곧 소생되었고, 불교는 늦으나마 지금 소생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고, 오히려 힌두교 안에서 살면서 힌두교에 변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원래 힌두교는 계급 중심의 종교이었으나, 지금은 평등사상을 부르짖게 되었고, 그 계율에 있어서도 육식금지(肉食禁止)등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힌두교도 자신들도 불교를 적시(敵視)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한 종파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ICCR의 주선에 의하여 바나라스(Banaras)지방에서 안내를 맡아준 차크라볼티氏는 전에 칼캇타대학의 교수이었다고 하며, 독실한 힌두교도이었다. 이 분은 불교사원이나 불교성지를 순례할 때 이 사람과 같이 참배하고 기도 올리는 것이었다.

 뉴 · 데리(New Delhi)에서는 네루대학교를 방문하여 부총장을 비롯하여 동양학 관계교수들과 의견을 나눌 기회가 있었고, 바나라스시에서는 바나라스 · 힌두대학교를 방문하였는데, 대학의 규모와 활기에 찬 학생들의 얼굴에서, 이 나라가 얼마나 교육에 치중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동국대학교의 서경수 교수가 네루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와 있어서 반가왔고 성지순례를 같이 하였다.

 성지로서 처음 발을 디딘 곳이 바나라스 근교에 있는 녹야원(Sarnath)이었다. 옛 절터는 폐허가 되어 있으나 초전법륜의 곳에 우뚝 솟은 큰 탑은 이곳에 오는 신도로 하여금 저절로 환희심이 솟게 하는 것이었다. 세존께서 우계(雨季)에 四개월만 안거하신 곳, 아쇼카 왕의 기둥의 일부가 그냥 남아있다. 살나트 박물관에는 이곳에서 출토한 불교유물이 꽉 차 있는데 어느 하나 걸작이 아닌 것이 없다. 다음에 나란다(Nalanda)대학에 이르렀는데, 오랜 인도의 불교사를 말하는듯 그 광막(廣漠)한 넒은 자리에 四개의 사원의 유적이 있고, 옛 선사들의 공부하던 터를 보아 그 정진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인 현장스님께서 이곳에서 공부하셨는데 그 기록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지금 남아있는 것보다 몆 배나 더 컸었다고 한다. 十二세기 회교도에 의하여 폐허화 된 곳이지만, 지금은 인도정부에 의하여 잘 관리되어서 순례자에게 감명을 안겨주고, 이곳 박물관에도 출토한 불상등에 의하여 옛모습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좀 더 가서 왕사성(Rajgir)에 이르렀는데, 무엇 보다도 영가산이 솟아, 법화경을 비롯하여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환희심을 금할 길이 없었다. 죽림정사(竹林精舍) 빈비사라왕의 유폐처(幽閉處)등 우리들로서 잊을 수 없는 곳이 많았다. 세존께서 성도하신 부다가야에 이르러 보리수 아래의 금강좌(金剛座)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는 그 감회를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니련선하(尼蓮禪河)도 바로 그 뒤에 흐르고 있다.

 이러한 성지에는 불교가 전수되었던 여러 나라의 사원을 볼 수 있었다. 녹야원에서는 스리랑카(Ceylon)의 사원, 서장인의 사원을 보았고, 영축산에는 일본사(日本寺)라하여 일본사람이 세운 탑절이 다보산정(多寶山頂)에 서 있지 않던가. 성도지(成道地)인 부다가야에는 태국사(泰國寺), 중국사(中國寺), 서장사, 일본사등 많이 볼 수 있었다. 불교전래의 역사로보나, 한국문화에 미친 영향으로 보아, 마땅히 있어야 할 한국사(韓國寺)는 하나도 볼 수 없던 것은 섭섭하기도 하고,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우리나라도 승단을 위시한 사부대중이 화합하여 힘을 합친다면 부처님의 성지들에 한국사(寺)를 건립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