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姓) 없는 사람

선의 고전/林間錄

2008-01-02     관리자

 [1] 4조와 재송도인

 4조 도신대사는 파두산에 머물러 있었다. 그 산중에 유명한 노승이 있었는데 다만 소나무를 심는 것을 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부르기를 재송도자라고 하였다. 한번은 재송도인이 4조를 찾아와서 청하였다.

 "화상의 법도를 들을 수 있겠읍니까?"

4조가 말하였다.

 "그대는 이미 늙었으니 설사 법문을 들어 얻게 되더라도 어찌 능히 널리 교화하겠오. 그대가 만약  몸을 바꾸어 다시 온다면 그때까지 기다리리라."

 이 말을 듣고 재송도인이 산에서 내려가니 개울 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한 여자를 만났다. 그에게 몸을 굽혀 인사하고 말하였다.

 "쉬어 갈 수 있겠읍니까?"

여자가 대답하였다.

 "우리 집에 어른들이 계십니다. 가서 말씀하십시오."

 "승락하신다면 가리다."

이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승은 발을 돌려 돌아갔다. 그 여자는 주(周)씨의 딸이었다. 집에 돌아가자 곧  아기를 가지니 부모가 크게 놀라고 미워하여 집에서 내어 쫓았다. 여자는 갈 곳이 없으므로 동리를 돌아다니며 품을 팔았고 밤이면 중관(공회당)에서 잤다. 달이  차서 아기를 낳으니 아들이다. 여자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하여 물에 던졌다. 다음날 다시 물가에 가서 보니 떠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물을 거슬러 올라와 있고 몸이 완전하다. 크게 놀라며 곧 아기를 건져 기르게 되었다. 아기는 성장하면서 어머니를 따라 걸식을 하였다. 읍민들은 그를 불러 성없는 아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황매 길 가에서 4조를 만났다. 4조는 그에게 물었다.

 "네 성이 무엇이냐?"

 "저는 원래 성이 없고, 말하자면 보통 성이 아닙니다."

 "네 성이 무엇이길래 그러느냐?"

 "저의 성은 불성(佛性)입니다."

 "너는 성이 없다는 말이냐?"

 "성이 공(空)하였으므로 없읍니다."

4조대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여 출가케 하였다. 그 때가 7살이다.

 사가 머물던 중관이 지금은 절이 되어 불모사라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주씨가 가장 성하다. 파두산에서 바로 건너다 보인다.

 [2] 노파와 황벽

 단제선사가 처음 낙경에 있으면서 걸식할 때였다. 마을을 다니면서 탁발소리를 지으니 한 집에서 싸리문 사이로 노파가 나타나서 말하였다.

 "분수를 모르는 자로구만."

단제선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나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도리어 책망하니 무슨 뜻이오?"

 노파는 웃으면서 문을 닫았다. 단제선사는 이를 기특하게 보고 함께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사이에 이익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지게 되니 노파가 말했다.

 "남창으로 가시오. 그리고  마조대사를 찾아 가시오."

선사가 강서에 찾아가니 마조대사는 이미  열반에 든 뒤였다. 마조의 탑이 석문에 있다는 말을 듣고 탑을 참배코자 찾아갔다. 그 때에 대지선사가 마침 탑 곁에 토굴을 짓고 있었다. 선사는 대지선사를 찾아가 멀리서 온 뜻을 말하였다.

 "조사께서 평소에 말씀하신 법문을 듣기를 원합니다."

대지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화상이 한번 '할' 하는데 3일 동안 귀를 먹었다."

이 말을 듣고 선사는 곧 혀를 토하고 크게 놀랐다. 이로조차 서로 오래 지내며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지선사는 만년에 신오의 백장산에 옮겨 지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노파가 죽은 지 사뭇 뒤다. 그런데도 대송고승전에 '노파가 단제에게 이르기를 백장을 찾아가라' 하였다 하였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3] 기록을 금하라

 운거의 불인선사가 말하였다. 운문화상의 설법은 구름과 같았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록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혹 사람이 있어 설법을 기록하는 것을 보면 꾸짖으며 내쫓았다. 말하기를,

 "너희들은 입을 움직이지 않고 도리어 내말을 기록하는구나. 뒷날에 분명히 나를 팔아먹을 것이다."고 하였다.

 오늘날 방장실내 법문 기록이 전해지는 것은 향림 명교 두시자가 종이로써 옷을 만들어 입고 그때 그때 적은 것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후세의 학자들은 대개 문자나 말 가운데서 더듬어서 무엇인가를   알려고 한다.  이는 마치 그물을 입으로 불어서 가득 채우려는 거와 같으니 어리석은 짓이 아니면 미친 짓이다. 가히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까.

 [4] 객비구 대접

 달관 예선사가 처음 동오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 때 나이는 겨우 16~7세 였는데 배를 진회에서 내려 봉선사에 들어갔다. 그 때에 그 절에는 강종(講宗)학자만이 있었다. 선사가 오는 것을 보고 그가 젊다고 하여 예절로 대하지 아니 하였다. 이에 선사는 이를 꾸젖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예언하시기를 만약 비구가 객비구가 오는 것을 싫어하면 법은 마땅히 멸할 것이다 하였는데 당신들은  이와같은  일을 하는가?"

하니 그 가운데 대답하는  자가 있었다.

 "스님이 이 절의 주인 된다면 그 때에 공경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선사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자신을 돌아보건대 여기에 머룰러 있을 여가는 없오. 그렇지만 능히 도행을 닦는 자를  바르게 하여 시방 객스님들에게 대접을 여법하게 하므로써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 밖에 없게 되었오." 하였다.

 그 때에 내한 엽공창신이 금릉의 태수였다. 그래서 선사는 글을 써서 가지고 그를 찾아갔다. 글을 보고 엽공이 말하였다.

 "스님은 지난 밤에 이곳에 왔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그 절의 내력을 잘 아십니까?"

 "지난 밤, 절의 옛 비석을 보고 알았읍니다."

그리고서 율종(律宗)사찰의 폐단을 말하면서 풍속을 해치는 여러가지 사실을 들어 힐난하였다. 엽공은 이 말을 듣고 크게 옳게 여겼다. 봉선사가 이때부터 선종사찰이 되었다.

 오중에 강사들은 그당시 선종조사들의 전법게를 들어 번역한 자가 없다고 비난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위작이라는 것이다. 참선자들은 그를 변명하였지만 바른 변명이 되지 못하여 도리어 비방을 더하게 만들고 있었다. 선사는 이를 듣고 저들을  타일렀다.

 "대개 조사의 전법게는  달마조사가 2조 혜가대사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그 사이에 무슨 번역자가 필요하였겠는가. 양 무제가 처음 달마조사를 뵈었을 때 이렇게 물었다. '어떤 것이 첫째 가는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답하기를 '성스러운 것이란 없느니라' 무제가 다시 물었다. '짐과 대하고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모르겠오' 하였는데 만약 달마조사가 중국말을 하지 못했던들 저 때에 어떻게 이렇게 문답하였을 것인가." 강사들은 이말 아래 다시는 말이 없었다.

 선사가 외도의 견해를 꺽어 항복받는 기개와 의지함이 없는 본분지혜는 어려서부터 뛰어났다. 그래서 일을 만나면 즉시 그에 응하였고 조금도 머뭇대거나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으니 이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선사는 뒷날 석문종선사의 법을 이었으니 수산성념선사의 적손이 된다.  *  (스님. 조계종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