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우리는 모두 깨달아 있다-보현행원과 제 수행과의 차잇점(강의)

2007-01-12     관리자

[깨달음]우리는 모두 깨달아 있다-보현행원과 제 수행과의 차잇점(강의)





우리는 본래 깨달아 잇다!
이 이야기는 흔히 대승불교 사상으로 아는데,
그렇지만 본래 성불은 대승불교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기 불교에서도 수기 사상 등에서 이미 본래 성불 사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 깨달아 있다, 우리는 이미 완전한 존재다!
이러한 사실(진리)을 머리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하는데
사용되는 모든 방법을 불교에서는 '수행'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 방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형태로 전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수행은,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에 따라
몇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진리와 바로 직접 대면하는 방법이
간화선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선종(염불선 포함)입니다.





그 반면, 나머지 수행은 거의 모두
진리에 접근하는 '과정 상의 문제점'을 하나 하나 제거하며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죄가 많으면 진리를 바로 보기 어려우므로
죄를 먼저 소멸하자는 입장이 절, 진언, 참법 등과 같은 참회 수행입니다.





또 중생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환경이 좋은 다른 국토에 다시 태어나
그 곳에서 전문적으로 공부하여 진리를 이루자는 것은
염불로 대표되는 정토 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내 주위의 일부터 하나 하나 깨어가며
점차적으로 진리를 찾아나가는 방법이 위빠사나, 사념처 수행입니다.





이처럼 선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재래의 정통 수행법은,
중생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진리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을
제거해 나가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오류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즉, 진리로 가기 위한 본래 목적은 잊어 버리고,
과정 상의 방해물 제거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진리는 보지 못하고 방해물만 보기 때문에
업장 타령(?)이 나오고 현실은 충실히 살지 못하며
왕생 정토만 애타게 갈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선종 역시 진리만 보고 끝나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미 부처다! 이 세상은 이미 성불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알기만 하면 뭣합니까? 외치기만 하면 무엇합니까?



우리가 이미 부처고 세상이 이미 성불되어 있다면
당장 지금 이 자리, '나'에서부터 부처의 삶, 부처의 세계가 전개되어야지,
본래 성불 주장으로만 끝나서는 개미 한 마리 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증명되지 못하는, 주장으로만 끝나는 진리는 죽은 진리입니다.
부처 선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깨달음도 수준(?)에 따라 분류를 하기도 합니다.
가령 기신론 같은 데서는 완전히 진리를 만나면 구경각,
비슷하게 만나면 상사각, 진리를 만나기 시작하면 시각,
아예 진리를 모르고 살면 불각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불각이든 구경각이든, 진리 자체를 이고 있는 것은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본인이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 모르냐에 따라
깨달음의 종류가 나눠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진리와 진리에 가는 과정을 말하는 가운데 우리는 돈오와 점오를 말하기도 합니다.




돈오돈수는 우리가 만약 금덩어리라면,
그것을 인식하든 못하든 금덩어리임에 틀림없으므로,
알든 모르든 흙이 묻어 있든 더럽든 깨끗하든
금덩어리 그 자체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돈오점수는,
금덩어리인 것은 알았으나 아직은 오염 때문에
금노릇을 재대로 하기 어려우니 정화를 시켜 나가며
그래서 금이 어느 정도 들어나면
그 때 점차적으로 금 노릇을 하자는 말씀입니다.




이론 상으로는 돈오점수가 훨씬 논리에 맞습니다.
그런데 왜 돈오돈수의 주장이 나왔을까요?
그것은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돈오돈수는 관점이 '금' 그 자체에 맞춰져 있습니다.
더러우나 깨끗하나 금은 금임에 틀림없으므로,
금 자체를 활용하는 방면으로 모든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금이 아직 정화가 덜 되었으므로
쓰임처에 순도 상으로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건 흙이 묻은 금이든 순도가 낮은 금이든,
금 자체의 진리 나툼 쪽으로 삶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반면 돈오점수의 입장은, 관점이 금을 정화시키는 쪽으로 맞춰집니다.
금이 맞기는 하지만 아직은 순도도 낮고 더러우므로
한참을 닦고 정화시키는 데 모든 노력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이라는 물질은 100 % 정화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본성은 100 % 정화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론 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본성의 활용 쪽으로 쓰이기보다는
본성을 찾는 쪽으로만 소모되기 쉽습니다.




비유라는 것이 완전히 일치할 수도 없지만 금의 비유를 보더라도,
비록 오염을 다 떨어냈다 하더라도,
언제 먼지가 다시 붙고 금이 오염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금은 한번 써 보지 못하고
평생을 금 닦는 데만 보내야 하는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신수 대사의 게송과 육조 혜능의 게송의 차이점입니다.




보현행원은 이러한 모든 문제점을 극복하는 가르침입니다.




진리를 직접 대면하게 할 뿐 아니라,
진리를 대면하게 되는 과정 상의 방해물 역시 저절로 사라지게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만난 후 진리의 전개가 장엄하게 일어나게 합니다.
진리의 전개-그것을 옛사람들은 꽃이 만개하는 것에 비유해
'화엄(華嚴)'이라 불렀습니다.




보현행원은 또한 돈오의 삶을 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금을 닦는데만 인생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금 덩어리 자체로 찬란히 살게 하는 것입니다.
시작은 점오로 하지만, 끝은 돈오로 귀결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보현보살마하살




普賢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