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이타행을 통한 불법의 구현을

[특집] 오늘의 불교 어떠해야 하는가

2008-01-01     홍정식

이타행을 통한 불법의 구현을

  부처님이 가르치신 진리는 고금을 일관하는 변함없는 것이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에서 오늘의 사회를 지도할 이념도 추출될 것이고, 현대의 세계상황에서의 불교의 역할도 제시될 것이다. 또 우리 불자(佛子)들이 해야 할 사명도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의 근본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각(覺)의 내용이 될 것이고 그 각의 내용은 다름아닌 「연기의 진리」다.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의 진리」인 것이다. 연기법의 진리란 원시경전에 자주 보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이며 또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말씀인데 이것이 무슨 소리냐? 너와 나의 관계가 어설픈 상관관계가 아니고 아주 밀착되어있는 존재여서 내가 살 적에 네가 살 수 있고 네가 살 적에 내가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서로 남을 아끼고 남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속에서 자기의 삶을 찾는 것이 연기의 본질인 것이다.

  요즘 자연보호의 문제가 자꾸 대두되는데 이제까지는 인간이 자기의 쾌락만을 위하여 자연을 학대하였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즐거움이 궁극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이제와선 자연을 보호하자고들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까진 자연의 고마움을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덕으로 살아간다는 상관관계를 망각했던 것이다. 현대의 공해문제만 해도 그렇다. 나만이 잘 살고 나만이 이익을 보고 다른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을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자기 중심적인 생각인 것이다. 이외에도 오늘의 세계에는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들도 한마디로 말하면 연기법의 구현이 없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법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의 정신상황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다. 요즘 흔히 이기주의라 하는데 서양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우리 나라에도 요새 이기주의사상이 많이 흘러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후반의 현대가 안고 있는 여러 세계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으로 해서 자원문제, 인구문제, 공해문제, 전쟁문제 등 여러가지가 생긴다. 이것들이 다 따지고 보면 연기법의 진리를 체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러한 정신들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문제도 결국 「연기법」으로 해결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사명은 그 누구에게보다 우리 불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불자들이야말로 올바른 사회지도이념을 제시하고 실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도의 사명도 고금이 일관된 것이지 현대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첫째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로 받들며 스스로 행동하는 인간이 되어야 하겠고 둘째로는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만의 것으로 갖고있지 말고 널리 세상에 퍼뜨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살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 불교도의 고금을 일관하는 변함없는 사명이라 생각한다.

  또 불교에서는 구체적인 실천 덕목도 많이 제시되어있다. 그 덕목에는 8정도라든가 6바라밀, 4섭법 등이 있지만 모두 그 밑바닥엔 부처님의 깨달으신 각(覺)의 내용이 바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8정도라고 해서 현대의 실천덕목이 안되는 것이 아니며 그 내용이 6바라밀과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4섭법이나 6바라밀에서 얘기하는 대승불교의 실천덕목과 소승불교에서 얘기하는 8정도와의 차이는 다만 이타(利他)의 문제 즉 자기 외의 사람에 대한 문제를 강조하는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8정도라고 해서 이타정신이 결여된 것이 아니고 4섭법 만이 이타정신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실천하고 어느만큼 강하게 생활 신조로서 지니고 살라고 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나는 항상 6바라밀의 첫째 품목이 「보시」인 것을 관심있게 본다. 「지혜」나 「선정」등이 우리 불교에선 아주 중요한 것인데 왜 「보시」라고 하는 것이 맨 앞에 나왔는가? 결국 「보시」란 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남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승보살도의 6바라밀은 그러한 애타적인 관계에 특히 강점을 두어서 설해진 실천덕목임을 알 수 있다.

「나만의 교단이 아니다. 많은 인연에 의한 것이다.」라는 현존재가 수많은 시간 및 공간적 요인들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 즉 우리 종단도 연기의 진리위에 있다는 것이 투철하게 자각될 때는 즉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