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에 있어서 호국의 의미

특집/현대국가와 호국

2008-01-01     관리자

 [1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불교의 특징을 논할 때 호국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호국불교가 한국불교의 전체인양 인식하고 있기도 한다. 아직 한국불교의 호국성이 뚜렷이 논리적으로 체계화 되어있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보아서 한국의 불교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일관하여 국가수호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사실에서 이말은 쉽게 간주될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혹자는 한국불교가 호국불교라는 주장에 저항을 느끼고 비판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의 이에 대한 회의는 주로 종교적차원과 학문적보편성에 입각해 있다. 그들의 문제제기는 첫째, 불교 사상의 본질에 있다. 즉 불교는 자비를 구체적 실천덕목으로 삼고 있으며 더구나 불교신자가 지켜야 할 계율중에 가장 으뜸인 것이 불살생( 무릇 모든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계인데 어떻게 호국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호국이라 함은 상식적으로 국가를 수호한다는 것인데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국가의 국민으로 있을진대 타국과의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또 전쟁을 하여왔고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러한 전쟁의 결과는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때 불교신자는 침략자와 싸우고 따라서 살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마는데 이러한 점에서 볼때 불교의 본질과 호국이라는 실천목적이 이율모순이 아닌가라는 회의이다.

 둘째는 , 불교에서 말하는 호국이라 할 때 그 국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가는 통치자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는데 그 지배자가 옳은 생각을 갖지 않은 그러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사람이 지배하는 국가도 보호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호국의 의미를 통치자의 국가시책에 대한 비판도 없이 오직 맹목적 추종만 해야 되느냐는 의문에서 오는 물음이다.

 셋째는 불교가 종교인 한에 있어서 그것은 또한 학문적 보편성을 결여할 수는 없을진대 호국이라 하면 불교의 전체사상인 보편적 진리의 세계를 너무나 현실위주의 세속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됨으로 불교의 고차적인 진리가 저급화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 등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모두가 있을 수 있는 타당한 물음들이다. 또한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한국불교의 호국성을 보다 천착 할 필요는 있다.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 2 ] 나는 여기서 한국불교가 어떻게 국가수호에 이바지 해왔는가 하는 점을 역사적 사실로 논술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불교사상을 조준으로 하여 도대체 어떠한 불교의 이념이 구체적 역사적 사실로 호국에의 의지로 전개되어 왔는가를 살펴보고저 한다.

 우리는 먼저 불교의 호국의 의미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하여 불교에서 보는 호국이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살펴보자. 육조단경에는 그 마음이 청정함을 따라서 곧 불토가 청정하다(隨其心淨卽佛土淨)이라 했는데 이 말은 유마경의 말이다. 유마경에서도 중생의 무리 이것이 [보살]의 佛土니라 왜그러냐 하면 보살은 所化의 중생에 따라 불토를 취하며 調伏하는 바의 중생에 따라서 불토를 취하나니라....]

 [보살이 정토를 취함은 다 모든 중생을 요익(饒益)케하기 위함이다......중생을 성취하기 위하는고로 불국을  취하기를 원함고 불국을 허공에 취하기를 원함이 아니다] 보살행을 하는것, 이것이 곧 불국토의 이름인 것이다. 보살행은 중생을 이익함에 있고 중생을 성취시킴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마디로 心淸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역시 금강경에서도 장엄불토분에서는 그 마음을 청정하는 것이 불국의 장엄이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불교의 국가란 다름이 아니라 불국토를 의미함을 알았다. 따라서 호국이란 불국토의 수호이요 보위이요 유지인 것이다. 불교의 국가는 단지 권력집단으로서의 국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성취 나아가서 보살행을 통한 요익중생이요 중생을 성취시키는 의미로서의 호국이었다. 유마경의 내용은 정토를 이루는데는 허공에 집을 지어서는 집이 건립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이와같이 중생을 성취하기 위하여서는 불국의 건립을 원하는 것이다. 바로 현세계를 불국토화 하여야만 호법과 더불어 보살의 요익중생이 완성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불국토의 완성은 곧 보살행의 완성이었다. 이와같이 대승불교에 있어서 호국은 불국토의 완성이던 그것은 보살이 중생을 성취시키고 중생을 이익케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중생의 성취와 불국토는 둘이 아니었다. 중생이 그들의 생명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불국토가 없어서는 아니되었다. 불교의 호국은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는 수호되어야 했고 국가와 불교의 정법과는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법의 완성이 불국의 완성이요 불국의 완성이 정법의 완성이었다. 이때의 정법은 곧 보살행과 요익중생과 중생의 성취인 것이었다. 이와같은 불교의 호국관이 우리민족에 들어오면서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 민족의 호국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 보고 또 어떻게 실천되었는가를 보자.

 [ 3 ]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나라를 수호한다는 뜻에서 사원과 사탑의 건립, 법회의 근수(勤修), 반승(飯僧) 도량설시(道場設施)등 많은 불사를 진행해 왔는데 도량과 법회시에 가장 많이 이루어진 법석은 [金光明道場][仁王道場]이었다. 금광명경, 인왕경과 함께 신라시대에는 승만경도 함께 읽혀졌다. 이들의 경은 모두 나라를 수호하는 경전들이었다.  이 경들의 사상을 전부 자세히 말할 수 없으나 이 경에서 가장 요긴한 부분을 살펴서 우리는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들이 이러한 경을 읽고 외우고 남에게 말하는 과정에서 나라가 수호된다는 신념이 절대적으로 밑받침 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 어째서 이 경을 그렇게 까지 신앙으로 확신하고 있었을까?

 먼저 금광명경의 내용을 대강 살펴보면 이 경이 힘있게 말하는 부분은 법신이 언제나 십방삼세에 내재해 있다는 사상과 방법의 정당한 이론과 하늘(天)신장들이 이 경을 옹호한다는 내용이다. 법신이 언제나 있다는 사상은 [석가모니]부처님이 80에 열반하셨으나 사실은 그 신상이 돌아가셨을 뿐 여래의 수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계시고, 여래가 열반하심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설하고 계신다. 이 경에서는 바른 법이라든가 정당한 이론이라든가 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올바른 관념으로서 이것은 세간과 출세간을 통하여 십방삼세에 가득한 실현이고 힘이다. 이 법으로 제정된 나라의 법은 가장 정당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법신으로 이 세상에 가득하시다는 뜻은 원력사상으로 이세계에 나를 포함하여 원력이 가득함으로써 그리고 바로 내가 그 원력을 간절히 실천함으로써 불국토도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십방삼세에 있는 법신의 구현은 바로 나의 원력에 의하여 완성된다. 법신과 나는 본래 둘이 아니였기때문이다. 더구나 금광명경은 제3 참회품에서 [ 바른법 연설하여 중생을 이롭게하고 번뇌는 없애고 모든 고통을 덜어서 탐심, 진심, 치심을 고요케하리] 하여 나로 부터 무지에서 일어난 일체의 업장을 내가 모두 참회하여 청정한 마음으로 국토를 장엄하겠다는 사상의 맥락이 흐르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나의 일심이 청정함으로 시방세계에 충만한 부처님의 법계가 일치되어 보리의 불국토를 건립하겠다는 일대 서원과 신앙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이 경을 읽고 외우고 남에게 말하면 제천과 제신이 옹호한다고 했는데  이야말로 불국토건립과 중생의 성취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엿보인다. 그리고 불국토의 건립이나 중생의 성취가 나의 기도에 의한 心淸淨과 둘이 아님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참회는 곧 심청정이요 그것은 곧 요익중생과 보살도와 직결된 것이다. 요익중생이나 불국토 건립이 모두가 일념위에 건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일심에서 일어난 것이니 일심이 청정하면 정토가 이루어 지고 일심이 업장에 가리워 무지하게 되면 예토(穢土)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탐,진,치 삼자에 의하여 형성된 무지의 업을 청정으로 돌아오게 하면 곧 불국토의 완성인 것이었다. 본래 우리는 청정한 바로 그것이었다. 따라서 죄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있다면 그것은 客體로 실제해야 되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무지 즉 본래청정함을 깨닫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 무지는 깨달음에 의하여 곧 무한한 지혜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제천과 제신도 본래 나와 둘이 아니었고 대립되어 있는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내가 원력으로 청정한 자성에 광명을 얻으면 곧 그것은 나 이었기 때문에 호국의 힘으로서 시방삼세에 전개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승만경에도 잘 나타났다. 즉 중생은 본래부터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지마는 번뇌에 가리워 깨달음의 빛을 내지 못함으로 부지런히 그 티끌을 떨어버려야한다는 내용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인왕경에서는 끝없이 般若波羅密을 말하고 있다. 이 반야바라밀은 곧 심청정과 중생성취의 극한사상이다. 

 [ 4] 신라와 고려의 호국신앙 특히 신라에 있어서의 호국신앙의 주요경전들의 주 사상은 이와같이 요익중생의 금광명경과, 반야의 인왕경, 심청정의 승만경이었음을 살펴 볼때 그것은 대승경전의 유마경의 사상에서 나타난 호국의 이념이 우리민족의 기도적 실천적 호국이념으로 포섭되어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마경에 나타나지 않은 기도적인 면이 금광명경과 인왕경에서는 기도적 주술적 신앙이 가미됨으로 이 경을 특히 소의경전으로 하여 호국불교를 전개했다고한다. 신라인들은 불교의 호국의 의미를 어느 정도 올바르게 이해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요익중생과 중생성취의 터전으로서 국가가 건립되어야하고 그  국가는 곧 불국토이어야함을 깨달았다.

 그러한 불국토는 나의 청정심에 의하여 완성되고 따라서 불국토완성과 중생성취, 요익중생이 둘이 아니고 바로 하나이었다. 따라서 세속적인 국가에 대한 이해도 불국토완성이라는 이념의 측면에서, 애국적 실천으로 이해되었던것 같다. 그러기에 불국사라는 이름의 사찰까지 세우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망각의 얼들이 불국토완성이라는 이념으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용기가 하늘을 찌르지 않았던가 한다. 이러한 호국의 이념이 쇠퇴하면서 세속적 국가유지에 몰두하게 되고 따라서 신라의 後代에 있어서는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따라서 고려에 멸망을 자초했다고 보아지며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추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려는 호국의 이념을 오직 세속적 국가완성의 이념으로만 받아드렸으며 불교의 호국이념은 오직 기도적인 면에만 치우친 나머지 많은 불사가 형식과 의례만에 흐른 감이 없지 않었다. 그것은 호국의 이념으로서 불국토완성과 중생성취, 요익중생의 실천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오직 개인의 복만을 추구함으로 보살이 자성청정과 호국의 일치에까지 도달하지 못하였음으로 어려운 시련의 극복이 불꽃을 튀지 못하였던 것같다.

 이제 우리가 호국의 이념을 문제삼을 때 불국토 완성이라는 대서원과 함께 요익중생의 이타적 수행과 중생성취 즉 중생의 자성청정심의 발휘로서 우리의 존재의 가치를 보다 차원높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인간은 번뇌망상의 존재가 아니다. 본래 청정한 인간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이 나로부터 불국토와 예토가 분리되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는 오직 불국토뿐이다. 예토는 나의 무지에 의한 대립과 차별의 산물이다. 따라서 나의 이 서원은 곧 불국토가 완성됨이요.성숙되는 것임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한국불교의 호국이념은 불교의 본질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불국토의 완성인 요익중생 중생성취의 터전으로서 현실적인 세속의 국가관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라를 수호한다는 의미는 불국토의 성취가 바로 이 우리의 나라로부터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그것은 동시에 나와 나라가 둘이 아니었기때문에 나라의 수호에 적극적인 참여와 애국적인 행동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나라가 멸망된다면 곧 불국토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우리의 호국이념이 보다 차원높은 불국토의 완성과 호법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는데서 조국에 대한 참다운 애국이 있을 것이라고 보아진다. 요익중생, 중생성취의 불국토 의미를 다시한번 음미하고 이러한 이념을 청정한 자성을 통하여 성숙시키는 호국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