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반야심경 강의 17

2008-01-01     관리자

   관세음보살은 자신의 자재도리를 설명하는데 먼저 마하반야바라밀다를 행하며 실천적 실지를 보여준다.,마하반야바라밀다에 선 관세음보살은 관찰의 눈을 「바라밀다」일점에 머물게 하고 여기서 두 방면으로 관찰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거두는 말

   이상에서 반야심경의 구조와 대체적인 의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고를 마치면서 이제까지의 요지를 약간 정리해 보고자 한다.  

   ①   심경의 특성

   반야심경은 부처님의 대자비 위신력을 힘입어 관세음보살이 자신이 도달한 경계,즉 마하반야바라밀을 설명함으로써 일체 중생을 근본적으로 해탈시키는 큰 법을 설한 것이었다.   특히 여기에서 관세음보살은 자신이 증득하고 자신이 수행하며 자재구사하는 대지혜를 명석하고 세밀하게 밝혀줌으로써 범부들을 일시에 관세음보살의 자재한 경계를 엿보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크옵신 자비와 곡진하신 자비방편에 거듭거듭 머리숙여진다.   동시에 관세음보살이 자신의 경계를 남김없이 열어 보임에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욱 관세음보살의 대자비에 젖게하며 또한 친근감을 보태준다 하겠다.   반야심경은 겨코 이론이 아니다  타인의 사상설명이 아니다.  관세음보살이 체험하고 쓰고 있는 실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이를 증명한 것이다.  관세음보사이 체험하고 쓰고 있는 실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이를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법을 알 때 즉시에 관세음보살의 관자재 자비묘용의 경계를 쓰게되는 것이니 심경이야말로 최상의 진리행을 완성시키는 최고의 요전이라 할 것이다. 

  ②   심경 요의

   관세음보살은 자신의 자재도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 먼저 마하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실천적인 실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말과 이론을 초월한 진리 실재로서 관세음보살은 이 마하반야바라밀다라는 진리실재에 머물러서 그로부터 현존하는 일체 진리를 사실적으로 설명해 나아가고 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에선 관세음보살은 관찰의 눈을 「바라밀다」일점에 머물게 하고 여기서 두 방면으로 관찰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그 첫째는 범부들이 보고 느끼는 현상과 감각과 가치세계에 대한 관찰이다.  이에 대하여는 중생이 보는 바 그 모두는 망견으로서 바라밀다 실지 본분에서 보면 아예 없는 것임을 설파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도 없다.   인간형체를 구성하는 육체도 없다.  인간 감각과 의식과 인식을 규정하는 일체 정신적 요소는 없는 것이다.   인식의 대상이 되는 바깥 일체 경계도 없는 것이며, 인식 주관도 없는 것이며, 인식 에서 얻어진 알음알이도 없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인간의 번뇌망상 내지 무명이라 하는 근본 무지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도 없고 노사도 없고 필경 범부가 인식하는 인생 전체는 무임을 밝혀준다.  이러할 때 어디메에 얻을 것이 있으며 잃을 것이 있을 것인가.  정이다, 사다 하는 분별 전도도 없게 된다.  거기에 다시 무슨 공포가 있을 것인가.  이리하여 인간을 한정하고 구속하고 부자유스럽게 하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억압하고 있는 인간계의 속박현상을 남김없이 타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이 제시하는 반야바라밀다는 실로 영겁불멸의 인간해방의 원리의 설파다.  인간의 유한. 구속. 한정사태를 일체 타파해버리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반야바라밀다의 관찰은 반야바라밀다 자체에 향하고 있다.  위에 보아온 바와 같이 일체의 현상 경계가 무일 때 반야바라밀다 자체는 어떤 것이었던가를 설명한다.  이곳은 사실이 있을 뿐이다.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할 말이 없는 것이다.  설명할 자체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할 수 없는 바라밀다 자체에 대하여 관세음보살은 그의 공능을 약간의 말로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커서 일체 대소의 양을 넘어섰고 일체에 막힘없이 통하여 걸림이 없으며, 상대를 넘어선 절대적 가치로서 그와 더불어 상하를 논할 다른 아무런 가치존재도 없으며 더불어 비등할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이와 같이 크고 막힘없이 통하고 절대의 가치며 무상의 존재이면서 거기에는 일체 완전. 원만. 자재. 성취.무안.영원이 넉넉히 있을 뿐이다.  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은 바라밀다가 가지는 비할 데 없이 수승한 공덕과 위력과 역능을 「진실」이라는 한마디로 설명한다.   이로 보건대 반야심경의 진리는 필경 반야바라밀다며 바라밀다는 바로 「진실 한자」를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이 입각한 진리 당처를 보는 것이며, 관세음보살이 수용하는 법을 보는 것이며, 일체중생생의 불멸의 본면목을 보는 것이며, 일체 중생이해탈을 성취할 대도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반야바라밀다며 진실 한자다

   ③  심경의 삼요

   이상의 반야심경의 가르침에 의할진대 우리는 말할 수 업이 많은 교훈을 거기서 배운다.   그 낱낱을 다 들어 설명할 재간도 지면도 없으나 대강 두드러진 요점 몇몇만 들어 살피기로 한다.   그 첫째는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심경에서는 범부가 인식하는 일체 존재 일체 현상을 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거기에 어찌 물리적 장애가 있을 것이며 가치적 장애가 있을 것인가.  허공에서 멋대로 활개치듯 아무런 걸림이 없는 것이 진리이며 바라밀다의 인간실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구속받고 다른 사람을 온갖 명목을 세워 조건지우고 구속하는가.  가치와 명분의 이름 밑에 얼마나 자신의 자유가 구속되고 있는가.  그리고 잃을까 겁내고, 헤어질까 겁내고, 허물어질까 겁내고, 죽을까 겁내는 등 얼마나 많은 공포 불안의 장막 속에서 허둥대는가.  중생들의 꺼꾸러진 지견도 그 모두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말씀하신다. 

「일체가 없는고로 얻을 바가 없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자는 바라밀다에 의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공포가 없고 대열반. 대안락. 대해탈지에 이른다.」 둘째는 무구다.  허물이 없다는 말이다.  허물은 가치와 존재에서 파생한다.  가치가 없을 때 허물이 있을 수 없고 일체 존재가 없을 때 가치를 논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잘잘못과, 얻고 잃음과, 죄악과, 공덕과, 다시 참회와 과보가 무엇을 인하여 있을 것인가.  반야바라밀다에는 이러한 사람의 마음땅을 물들이고 때묻히고 속박하고 평가할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가 아니다.  본래로 무구인 것이다.  무구이기 때문에 본래로 청정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참모습이며 마음의 실상이며 생명의 본 면목이다. 

그런데도 범부들은 묘한 가치 기준을 세워놓고는 얼마나 많이 사람들을 옳다 그르다. 잘했다 잘못했다, 선하다, 악하다, 등 제멋대로 때를 묻히고 굴려왔던가.  또한 청렴결백이라는 잣대로 자신의 마음 깊이깊이에 죄악의 검은 물감을 풀어왔던가.  원래로 무구청정한 인간 본성은 끝없이 맑고 끝없이 깨끗하다.  때묻을 수도 없고 죄지을 수 없는 것이 인간 생명의 본연 면목인 것이다.  

세째로 인간권능의 현발이다.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일체에 걸림없고 일체에 때묻지 않은 무애 무구의 세계는 반야바라밀다가 들어내보인 진리실상의 경계다.  이러한 대해탈의 도는 어떤 공간에 설치한 거대한 그림이거나 아니면 신비한 사상이거나 놀라운 교법체계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관세음보살이 직접 쓰고 있는 구체적인 실지다.  다시 말하면 무애. 무구가 관세음보살에 있어 주체적이며 능동적으로 구사되고, 그러할 때 관세음보살은  원만 자재라는 절대적 완전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관세음보살의 본래면목과 그 위덕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일체 중생의 본래면목과 그가 지니고 있는 공덕과 능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거듭 말하면 반야바라밀다에 비춰진 인간실상은 인간이 바로 바라밀다다.  인간은 바라밀다가 가지는 온갖 공덕과 역능을 자기것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라밀다인 인간은 경의 말씀과 같이 걸림이 없으며 공포가 없다. 진실 원만하다.  그 무엇도 그를 능하가는 자 없고 그와 대립하는 자가 없고 그와 짝하는 자가 없다.  일체에 막힘없이 확 통한다.  그러하거늘 범부들은 인간을 어떻게 보아왔던가. 

과연 인간을 진리의 주체자로 보았던가.  그러하거늘 범부들은 인간을 어떻게 보아왔던가.  과연 인간을 진리의 주체자로 보았던가.  불보살의 위덕을 가지는 자라고 보았던가.  청정무구자로 보았던가.  대개는 인간을 육체적 물질적 조건하의 존재로 보았다.  그는 유한자며 허물어져 없어질 자며 왜소한자로 보았다.  어리석고 무력하고 죄짓고 울고 헤매는 가여운 존재로 보았다.  양심이 있다는 자는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고 또한 사람에게 죄인 죄인하여 참회를 요구했다. 

그들은 바라밀다로 살면서 바라밀다를 몰랐던 것이다.  지견이 전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경이 가르치는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인간 존재를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존경받을 자다.  불보살의 성품과 공덕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존경받아야 하며 무상가치로 대우되어야 하며 그가 지니는 절대가치가 자유로이 발휘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부처님께 예경하듯이 모든 사람에게 예경하여야 한다.  다음에 모든 사람은 찬양받을 자다.  그의 생명 참모습은 모든 아름다운 것, 모든 착한것, 모든 가치있는 것, 그 모두를 간직하고 있다.  그는 그를 쓰는 자다.  그가 쓰는 것은 그것 뿐이다.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망견이다. 

우리는 진정 인간의 절대적인 생명 가치를 긍정하고 찬양하여야 하겠다.  모든 사람의 절대 가치를 긍정하고 찬양하고 자기 생명에 흐르고 있는 절대가치를 긍정하고 발휘하여야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느 때나 충만감과 감사가 함께 하는 것이며 끊임없는 창조를 현출한다.  네째로 우리는 항상 부지런하여야겠다.  바라밀다로 갖추어진 우리 생명의 고귀한 덕성은 이것이 구체적인 활동상이었다.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것 이것이 바라밀인 우리의 실상 생명이다.  끊임없이 진실 한자를 행동하여아 한다. 

거기에는 오온의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일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정진하지 아니할 때 오온의 뜬구름은 자성의 태양을 가리게 마련이다.  항상 자신을 돌이켜 구석구석 바라밀 광명을 비춰야한다.  일체 업장 죄업 등이 부지할 수 없게 되고 바라밀의 빛나는 생명이 빛날 뿐이다.  여기에 이르면 죄업이며 오온이 본래 없음을 알게 된다.  끝으로 반야법등을 전하는 것이다.  바라밀은 이것이 끝없는 밝음이며 생명이며 충만이며 성취며 완성이다.  여기에는 피아가 없다.  일체를 일시에 밝히며 일체를 일시에 성취시킨다.  이것이 바라밀법등이다.  만약 다른 사람을 밝게 해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등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밝히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도 어두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라밀행자는 항상 바라밀법등을 이웃에게 전해 주는 것으로 자신 생명의 충만도를 더해가야 한다.  여기에서 전법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전법이 최상의 공덕이며 전법이 최상의 정진이며 전법이 최상의 보은이며 전법이 정토성취의지름길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④  맺는 말

   마하반야바라밀을 바로 알자.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자.  마하반야바라밀에서 일체 장애와 재앙이 즉시 소멸되며 일체 불보살의 위신력이 자신에게 충만한다.  일체 불보살과의 거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곳에 불보살의 위덕과 은혜는 넘쳐나고 일체소망은 성취된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생각하며 나의 생명의 바라밀 실상을 관하자.  환희와 용기는 넘쳐나고 끝없는 조화와 창조는 힘있게 펼쳐진다.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생각하자.  바라밀 실상이 현전하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환희하며 용기를 내 태양보다 밝고 저물 줄 모르는 진리의 태양을 부처님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게 되며 쓰게 된다.  이 도리를 우리의 세존 석가보니 부처님은 관세음보살로 하여금 말씀하시게 하신것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