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의 생애

전통사상의 현재(5)원광대사

2008-01-01     관리자

   「진. 수날라 때 우린나라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도를 들은 사람이 적었지만 혹시 있었다 하더라도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었다.   원광 이후에는 뒤를 이어 서학하는 사람이 끊기지 않았으니 원광이 곧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 말은 고려때의 일연스님이 원광스님을 평하여 내린 간단명료하면서도 매우 적절한 평문의 한 귀절이다.   사실 원광의 생애 중 (542-627) 가장 큰 업적은 신라불교와 중국불교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광 이전에는 중국에서 직접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백제나 고구려라는 다리 하나를 거쳐야만 했다.   그런데 원광은 이 다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불교를 배워왔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아마도 신라불교는 그 면모를 일신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일연의 찬사대로 「구름을 뚫고 길을 낸」개척자로 아낌없는 찬사를 받을 만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원광스님도 그의 생애는 다른 대부분의 스님과 마찬가지로 결코 명확한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일연스님은 「감히 평정하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몇가지 설을 그대로 옮겨놓기로 하고 또는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하기 도 하였던 모양이다.   우선 그의 성씨로부터 두가지 설이 있다.   속고승전에는 「박씨」인데 고본주이전에는 「설씨」로 되어있어 전연 맞지 않는다.   박씨같으면 성골 내지 진골이겠지만 설씨 같으면 기껏해야 6두품(이 기백교수는 육두품으로 보고 있다.) 밖에 되지 못하여 사회적 신분이 크게 다라져 버린다.   어쨌든 그는 진흥왕 3년인 542년에 경주에서 태어난 것 같다.  

그가 언제 출가했는지는 역시 분명하지 못하다.   속고승전에 따르면 중국에 유학가서 승민의 제자에게 불교를 듣고 출가했다고 하지만 수이전에는 신라에 있을 때 벌써 승려가 되었으며 보다 정통한 불교를 배워오고자 유학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어느쪽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보건데 승려로서의 종교적인 열정이 험난한 중국유학을 결심케 했던 게 아니가 여겨진다.   하옇든 그는 25세 때인 567년 33세(신라진흥왕28년 중국진광대일)에 아마도 울산근처에서 배를 타고 남중국의 남경으로 건너갔던 모양이다.   --이것은 속고승전의 설이고 수이전에는 34세로 되어 있다.--

그는 아마도 여기에서 도교. 유교. 제자백가등 세속적인 모든 학문을 두루 공부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쩌면 본국에서 공부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신라의 상황으로 보아 원광과 같은 해박한 지식은 중국에서 획득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학초기에는 불교보다도 세속적 학문에 정진했었지 않았나 한다.   그의 이러한 노력 이후에 본국에 돌아와서 외교문서같은 국가의 문서를 요리할 수 있게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 중국 강소성의 남경에 있던 장엄사에서 불교공부를 시작하여 여기 저기의 좋은 강단을 두루찾아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한다.  

초기에는 성실론이나 열반경 등을 탐구하다가 차츰 사아함경을 위시하여 모든 경. 론을 두루 공부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나라땅 호구산에 은거하면서 수도에 전념하는 한편 중생들의 교화에도 힘썼다.   아마도 이러한 그의 위대한 업적이 수나라 군사들이 진나라를 공격하였을 때 유감없이 나타나서 수나라 장군을 감격시켰는 지모른다.   원광은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곧 수나라 수도로 가게 된다.   바로 589년의 일이다.   여기서 그는 섭대승론이라는 새로운 불교학에 심취하게 되는데 말하자면 그는 섭논종에 귀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광의 명성은 여기서도 크게 떨쳤다고 한다.  

10여년을 수나라 수도에서 보낸 후 그는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나이 탓도 있겠지만 본국에 가서 불교를 전도할 자신이 어지간히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의 제자였던 원안스님은 스승인 원광의 전기를 쓰면서 진평왕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를 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어쨌든 오랫동안의 (사기에는 12년간이지만 속고승전에는 33년간) 유학생활이 끝나던 600년 (사기는 601년)경에 신라로 귀국한다.   귀국 코스 역시 울산만으로 추정되는데 이 울산만은 중국 또는 일본과 통하던 국제항이었다.   후의 자장스님도 역시 이 루트로 내왕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자장이 귀국하자마자 세웠던 유래깊은 태화사도 바로 울산에 있는 것이다.   원광은 이 울산에 상륙해서 곧장 강(태화강)을 따라 올라가서 현 언양 석남사 뒷산을 넘어 아주 한적한 곳에다 수도처를 마련했지 않았나 한다.  

 그의 천성이 원래 조용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곳이 유명한 세속오계를 설한 가금갑사이다.   이 절은 절경속에 있어서 화랑들이 수도하기 좋은 장소였는데 나중에는 운문사에 합쳐진 것같지만 그 자리는 아직도알 수 있다.   원광은 여기서 중생교화에도 적극적이 아니었나 한다.   그것은 세속오계로서 신라의 젊은이들을 널리 선도하였는가 하면 점찰법을 써서 미숙한 중생들을 두루 제도하였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그 후 언젠가부터 황룡사에 거주하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의 교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같다.   아마도 가금갑사에서의 중생교화 특히 화랑도의 선도에 대한 명성때문에 와이 특청하여 황용사를 맡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황용사를 무대로 해서 크게 활약하게 된다.   수나라 사신이 참석한 백좌도장을 주관한 것 등은 그의 뛰어난 업적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신라국가의 불교화, 즉 불국토건설이라는 입장에서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던 이로서 이 면에서도 단연 개척자의 면모가 약여한 것이다.   이런 면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분이 자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전도 그리고 국가불교화에 심혈을 기울이던 원광스님은 그의 나이 대개 84세나던 해쯤에 열반한다.   바로 진평왕 말년이라 생각되어진다.   왜냐하면 속고승전에는 진평왕의 재위는 49년 밖에 없으니 아마도 49년의 오기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광의 생년은 속고승전의 99세설은 틀린 셈이 되며 수이전의 84세설이 유력해진다.   그의 유해는 명활산 서쪽인 안강(삼기산,금곡사로 일연은 추정하고 있다.)에다 장사지냈는 데 왕자의 예로 대접했다하니 원광의 위치를 짐작하게 하는 얘기이다.   하옇든 그는 불교학 뿐만아니라 일반 세속학에서도 뛰어난 고승이었지만, 점찰보로써 하층민을 적극 제도하는가 하면 세속오계같은 것으로 신라의 젊은이들을 널리 선도하고 나아가 외교문서나 백고좌법회같은 것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교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패기에 찬 삼국신라의 가장 뛰어난 고승이었다.   그래서 왕이 친히 의복이나 약, 음식등을 공양했는가 하면 심지어 삼기산의 신까지도 그를 외경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옛 기록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