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가람 터를 찾아 6 - 미륵대원

불교문화산책 96

2007-01-05     관리자

▲ 괴산 미륵리사지와 석불입상, 고려, 보물 제96호

> 미륵리 절터의 내력
미륵리 사지의 창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동각잡기(東閣雜記)』 본조선원보록에 “남은은 몰래 도망하여 미륵원(彌勒院)의 포막(圃幕)에 숨어 있었는데 추격하던 군사가 죽였고…”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부」조의 “미륵원은 주 서쪽 50리에 있다. 일명 광수(廣修)라고도 한다.”고 하여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사찰의 존속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아달라왕 기사의 “입현(立峴)은 지금 미륵대원의 동쪽에 있는 고개다.”와 조선 선조 때 편찬된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어두운 새벽에 적 수백이 나와서 미륵원 앞 들판에 진을 치자…”라고 기록하고 있어 16세기 중엽까지는 사찰이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3차에 걸친 발굴을 통해 절터의 규모와 성격이 부분적으로 밝혀졌는데 “명창(明昌) 3년, 금당에 새로 기와를 올렸는데 이를 대원사(大院寺) 주지가 주도했다.”는 기와 명문과 미륵당·미륵 대원사 명칭이 새겨진 명문이 함께 발견되어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리 사지가 위치한 곳은 서쪽으로 계립재[鷄立嶺], 동쪽으로는 문경에 이르는 하늘재[寒暄嶺]가 위치한다. 또 북으로는 덕주산성을 비롯해 사자빈신사, 덕주사가 자리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영남과 중원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요충지에는 사찰 이외에 역이나 병영시설이 설치된 ‘원(院)’을 두었는데, 발굴을 통해 드러난 사지 동쪽에 위치한 장방형 건물지를 원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 괴산 미륵리사지 오층석탑, 고려, 보물 제95호
미륵리 사지의 창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동각잡기(東閣雜記)』 본조선원보록에 “남은은 몰래 도망하여 미륵원(彌勒院)의 포막(圃幕)에 숨어 있었는데 추격하던 군사가 죽였고…”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부」조의 “미륵원은 주 서쪽 50리에 있다. 일명 광수(廣修)라고도 한다.”고 하여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사찰의 존속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아달라왕 기사의 “입현(立峴)은 지금 미륵대원의 동쪽에 있는 고개다.”와 조선 선조 때 편찬된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어두운 새벽에 적 수백이 나와서 미륵원 앞 들판에 진을 치자…”라고 기록하고 있어 16세기 중엽까지는 사찰이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3차에 걸친 발굴을 통해 절터의 규모와 성격이 부분적으로 밝혀졌는데 “명창(明昌) 3년, 금당에 새로 기와를 올렸는데 이를 대원사(大院寺) 주지가 주도했다.”는 기와 명문과 미륵당·미륵 대원사 명칭이 새겨진 명문이 함께 발견되어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리 사지가 위치한 곳은 서쪽으로 계립재[鷄立嶺], 동쪽으로는 문경에 이르는 하늘재[寒暄嶺]가 위치한다. 또 북으로는 덕주산성을 비롯해 사자빈신사, 덕주사가 자리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영남과 중원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요충지에는 사찰 이외에 역이나 병영시설이 설치된 ‘원(院)’을 두었는데, 발굴을 통해 드러난 사지 동쪽에 위치한 장방형 건물지를 원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 중원 미륵리 석등, 고려
하늘재 아래 펼쳐진 용화세상
미륵리 사지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석굴사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사진1). 석불입상 3면에 석축시설을 설치하고, 전면으로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어 목조가구로 지붕을 덮은 구조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내부 벽면에는 감실을 만들고 별도의 불상을 봉안(사진3)하였다.
사지는 동원 지역 입구 당간지주 옆으로 귀부와 석등 그리고 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동원의 서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다. 개울이 없다면 운주사의 배치를 보는 것 같은데, 금당 뒤편에서 내려다보면 미륵불 앞으로 마치 용화세계가 펼쳐진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석불은 고려 초 충주지역에서 조성된 거불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며, 5매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성하고 1매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신체는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앞으로 모은 두 손의 묘사 등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화하고 괴체화된 느낌을 강하게 준다.
금당 앞 오층석탑(사진2)의 탑신석에는 크기에 비하여 좁은 기둥을 모서리에 새겼다.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비신을 잃은 귀부는 길이 605cm, 높이 180cm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고려시대 지방양식을 반영한 단순한 형식으로, 거북의 왼쪽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2마리가 매달려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사진4). 혹여 장인이 미륵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는 민중의 바람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 석조 귀부, 고려
사역에는 2기의 석등이 남아 있는데 오층탑의 것은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팔각석등이고, 그 앞으로 간주석에 고사리문양을 조각한 고려중기 제작의 사각석등이 남아 있다(사진3).
문화재가 담보하는 역사의 편린은 지나온 시간만큼 풍부하다. 그 풍부한 기억은 문화재를 대상으로 역사를 읽어내고, 마음으로 해석하여 재구성할 때 가치를 지니게 된다. 폐사는 잊혀 진 곳이다. 그러나 죽은 공간이 아닌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와 같은 곳이다. 짧은 초겨울 햇살이 낙엽 떨어진 감나무에 둥지를 틀려고 한다. 길 떠난 만행승(漫行僧)을 기다리는 것일까, 빈 절터엔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