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불교] 내가 본 일본불교와 종립학교

해외 불교

2007-12-31     이광재

  [1] 고야산 금강봉사{金剛峯寺}

  야마시나{山階] 학교장의 안내로 진언종{眞言宗} 충본산인 금강봉사를 참관하였다. 금강봉사의 내전에서 종정 대승정과 종무원장 및 각 부장스님들이 우리 일행을 반겨 주었다. 고야산은 1164년 전에 홍법{弘法} 대사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홍법대사는 일본 나라불교{奈良佛敎}가 성불의 이상을 먼 피안에 두었던 것에 대하여 자신이 수학한 불교 {眞言密敎}는 이 현실의 몸으로 성불이상을 달성하여 차안, 즉 이 현실사회에 낙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야산은 단상가람{壇上伽藍}, 금강봉사, 숙방{宿坊}의 3분야로 나뉘어 있었다.

  {1} 단상가람

  단상가람은 고야산 개창 당시의 도량인데 근본대탑, 금당, 서탑 그밖에 여러 당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근본대탑은 홍법대사가 이 탑을 진언밀교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라고 하며 현재의 탐은 45년 전 건립한 것으로 높이 160척, 넓이 13칸으로 그 위용이 대단했다. 대탑 내부는 화려하며 본존은 태장계 대일여래[胎藏界大日如來}와 금강계 사불{金剛界四佛}을 봉안하고 있다. 탑 안 16개의 기둥에는 16보살, 4모퉁이에는 8조사 상이 그려져 있어 장엄함이 이를 데 없었다. 이밖에 당무들도 모두 유서 깊은 것으로 민중의 신앙을 모으고 있고 주위의 아름드리 삼라문은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내어 연간 수 백만명의 참배자를 모으고 있는 이유를 알만 했다.

  {2} 금강봉사

  이곳은 진언종 총본산 종무소가 있는 곳으로 고야산 좌주{座主] 관장{管長}의 사원이다. 거기에는 천황가를 비롯 여러 영주들이 거처 했다는 거실이 보존되어 있는데 거기에 있는 귀중품들이 모두 고색 짙은 일품들이었다.

  {3} 내원{內院}

  이곳은 오지원[奧之院}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홍법대사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입구로부터 등롱당{燈籠堂}까지의 참도 양편에는 여러 영주들을 비롯 각 계층의 사람들이 홍법대사의 구원을 믿고 혼백의 안식처로 납골묘비를 건립한 것이 20만 기를 넘는다고 한다. 홍법대사의 묘는 내원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사 자신이 정에 들어서 당신이 머무르실 곳을 정한 곳이 바로 그곳이라 한다.

  {4} 숙방{宿坊}

  고야산에는 53개의 숙방이 있다. 우리나라 큰 절의 산내 암자와 같은 것이다. 이 숙방에는 숙박시설이 완비되어 있고 정진요리{채식} 뿐만 아니라 속가 음식이 빠짐없이 재공된다. 절이 아닌것 은 아니어서 불공과 기도도 행해지고 있다. 이곳은 관리가 세습제로써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 일행은 부동원{不動院}이라는 숙방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은 고야산 고등학교장의 자방{自坊}이었다. 교장스님은 우리 일행을 극진하게 대접하여 주었다.

  밤 사이에 많은 눈이 쌓였다. 산사의 멋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고야산은 참으로 별천지이다. 해발 850m의 고산 분지, 연이은 산봉우리와 산목의 큰 숲, 그 속에 진언밀교를 상징하는 장엄한 당탑, 참으로 신령한 기운이 서린 것을 직감하게 했다.

  [2] 동대사학원{東大寺學園}

  18일은 날씨가 고르지 못했다. 우리 일행은 고야산을 내려와 나라{奈良}로 돌아왔다. 동대사학원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비를 맞으면서 동대사 경내에 들어섰다. 학교는 경내 입구에 있었다.

  동대사 중,고등학교는 1926년 동대사에서 설립한 학교다. 종립학교로서 본격적으로 발전할 사정이 못되었으므로 학생들의 질적 향상에만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중학교는 6학급, 고등학교는 12학급으로 작은 규모의 학교다.

  이 학교는 처음,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야간근로 학생을 위하여 출발한 것으로 교육방침도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여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을 교시로 하고 있었다. 종단 도제 양성은 따로 하고 있으며 사회에 유용한 인재를 양성을 한다는 교시답게 이 학교의 대학입학율이 매우 높다고 한다.

  [3] 동대사{東大寺}

  일행은 동대사 종무직원의 안내로 대불전과 법화당을 참관하였다. 동대사는 일본 국가 대찰로서 현재,  경내 부지 20만평 동양 최대의 대불의 위용은 장관이었다. 나라불교는 일본불교의 발상지이며 문화의 요람이다. 이 절은 화엄종 대본산으로 745년에 총국분사{總國分寺}로 건립되었다.

  금당{金堂} 주불은 비로자나불이다. 대불은 높이 16,22m, 얼굴의 크기 4,5m, 귀의 크기 2,58m나 된다. 대불전은 동서 31칸 2자 2치,남부 27칸 4척 6치, 높이 26칸 4척 6치라 하니 그 위용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금하지 못하게 한다. 과연 동양 최대의 대불이다. 여러 차례의 전화{戰火}에도 대불만은 손상을 입지 않았던 것이다.

  법화당은 나라불교의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건축양식이 대륙풍으로 우리나라 건축과 닮은 점이 있었다. 이곳은 대불 조성의 기연된 일본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다. 대불은 광배{光背], 연화대 모두 청동으로 이루어졌다. 대불조성 연기문에 보이듯이 대불을 조성하게 된 뜻인즉 [화엄경의 교주 비로자나불은 그 이름과 같이 일체처에 광명을 두루 비추시고 한이 없는 큰 몸과 무량겁의 수명을 가지고 항상, 그리고 영원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시니 이 부처님의 공덕을 힘 입어 큰 이상을 이루고자 746년에 국력을 기울여 대불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대불 점안식에는 도사로 인도승 보리천나{菩리遷那}, 참석자로 천황 이하 백관이 모두 참석하였고, 이날 화엄경을 강설한 후 백제의 미마지{味摩之}가 전한 기악{가면극}도 행하였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대불 연기를 듣고 감격했다. 그리고 특별히 청하여 상단에 올라 참배하고 헌향한 후 대불을 한 바퀴 돌았다. 여기에서 전망되는 나라{奈良}의 풍경은 드문드문 솟은 5층탑 등이 불국토의 이름을 듣기에 족하였다. 그 옛날 [538년] 벡제 성왕{聖王}이 불상과 경전을 보냈던 시대에 부여 백마강을 떠난 배는 지금의 대판에 도착하여 요도가와{淀川},야마도가{大和川]를 거슬러 올라가 삼륜산{三輪山}기슭 금자궁{金刺宮}에 이른 것이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효시이다. 일본은 그때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백제의 청동문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은 여기에서 개화의 빛이 비친 것이다. 그로부터 아스가{飛鳥} 문화가 시작 되었던 것이다.  (계속)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