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의 순절처와 그 외 사찰들

일본 후쿠오카(福岡) 사찰기행 3

2007-12-28     관리자

셋째 날은 후쿠오카 국립박물관을 견학하고, 외국 사신을 맞았던 관청인 홍려관(鴻곱館)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박물관은 신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화려한 외관에 비해 수장된 유물은 많지 않았다. 대신 유물을 발굴하고 조사하는 최신 장비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또 박물관이면서도 관련 도서들이 가득 찬 서고 역시 도서관 수준이어서 부러움을 자아냈다. 홍려관도 한창 발굴이 진행 중인지라 현장을 살피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귀국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나흘째 되는 날. 거리가 가까운 데다 탑승 시간도 야간이어서 설레기보다는 느긋했다. 이 날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줄곧 사찰 순례로 이어졌다.
처음 찾은 곳은 용궁사(龍宮寺)였다. 규모는 작았지만 아담한 납골묘원도 있고, 3층짜리 현대식 신도회관과 작은 불전(佛殿)이 한 채 있는 곳이었다. 좁고 긴 구조라 조금은 궁색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우리로서는 도저히 심상하게 지나칠 수 없는 옛 역사의 기억이 이곳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나오는 박제상(朴堤上)의 순절처(殉節處)가 바로 이곳이라고 전해진다. 박제상은 왜국으로 끌려가 억류된 신라 눌지왕(訥祗王, ?~458)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고 자신은 신라의 신하임을, 일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느니 신라의 개돼지가 되겠다고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바로 그 순절한 곳에 세워진 사찰이 용궁사라는 것이다.
용이 되어 죽은 넋이나마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였을까? 지금은 아무 자취도 비석도 없는 한갓진 사찰이지만, 경내로 들어서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망령이 있을 만한 구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고국의 소주라도 한 병 사와 뿌릴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1,500년 세월을 적국의 흙 속에 묻혀 망각의 지층 속에 누워 지냈을 충혼(忠魂)을 생각하니, 한 민족의 역사란 것이 얼마나 질긴 끈과 연원을 가진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사찰타운을 연상케 하는 수많은 사찰
■ 용궁사에서 도로 하나를 건너 보이는 사찰이 동장밀사(東長密寺)다. 앞에도 국분밀사를 소개했는데, 두 절에 모두 밀(密)자가 들어있다. 이는 밀교사원(密敎寺院)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절은 규슈 지방을 대표하는 큰 가람 가운데 하나다. 유서 깊기로도 관세음사 못지않아 806년 중국 당(唐)나라에서 귀국한 홍법대사(弘法大師)가 해변가에 창건한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사찰 뒤편에 있는 납골묘원도 규모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석들이 빽빽이 들어선 묘원에는 고인을 찾아온 사람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경내에는 따로 옛날 후쿠오카 번주(藩主)들의 가묘(家墓)도 여럿 안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문화재도 많아 목조(木造) 천수관음좌상(千手觀音坐像)과 육각당(六角堂)이 대표적이다. 천수관음좌상은 불전 안에 모셔져 있는데, 높이가 족히 10미터는 되어 보였다. 다소 근엄한 표정으로 사바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신비로운 기운으로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좌상 앞에는 자그마한 금불상이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는데, 참배객들이 연신 종이로 불상을 문지르고 있었다. 금가루를 묻히는 것인지 기념으로 묻혀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짙은 고동색의 목조입상과 찬란한 금빛 불상이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두 불상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상징하는 듯했다.
보살입상을 두르고 있는 벽에는 동굴 형식으로 터널이 있고, 터널 벽에는 지옥도(地獄圖)가 그려져 있다. 캄캄한 통로를 지나면서 무시무시한 지옥의 끔찍한 광경을 보자니,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과 함께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 싶을 만큼 오싹한 기분도 엄습했다.
동장밀사를 나와 오른쪽으로 담을 따라 걷다가 골목으로 꺾여 조금 들어가면 나오는 사찰이 성복사(聖福寺)다. 동장밀사와는 담장 모서리가 길을 하나 두고 마주보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성복사는 공원 같은 사찰이었다. 입구 쪽을 제외하면 담도 없었다. 어느 절이나 통행을 막는 곳은 없지만, 이곳은 더욱 개방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1195년에 세워진 사찰로, 일본 최초의 선사(禪寺)다. 그런 탓인지 활짝 열려 있으면서도 한적(閑寂)한 분위기가 사찰을 감싸고 있었다. 작은 연못으로 난 다리를 건너면 산문(山門)이라 불리는 건물이 나오고 그 뒤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 출입을 막고 있어 틈으로 살펴보니, 높이가 3미터는 되어 보이는 금빛 찬란한 불상 하나와 목조 좌불상 세 개가 나란히 모셔져 있는데, 소박함과 화려함의 차이는 동장밀사와 같지만, 크기는 반대였다.
선사(禪寺)답게 사찰 안쪽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안내지도를 보니 수행공간과 묘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지도를 보니 주변이 온통 사찰이었다. 일일이 이름을 적을 수도 없을 정도로 암(庵). 원(院) 등의 사찰이 계속 이어졌다. 이곳은 마치 사찰타운인 것처럼 조성되어 있었다. 옛날 어떤 번주가 이 지역을 특별히 사찰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서 이렇게 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연이야 알 수 없지만, 불심이 깊은 일본인의 성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사찰은 만행사(萬行寺)인데, 원래 계획에 있던 곳은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유명한 신사를 갔다가 우연히 멀리 눈에 띄기에 일행과 떨어져 혼자 찾아가본 곳이다. 완전히 도심에 있어 절이라기보다는 규모가 큰 포교당 같았다. 건물도 대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었고, 주차된 자동차 역시 많았다. 길가의 소음이 그대로 들려 명상에 적합해 보이지는 않지만, 입구에서 꽃을 파는 화원이 하나 있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