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메시지

용타 스님의 생활 속 수행이야기 - 마지막회

2007-12-28     관리자


작년과 금년 두 차례 전주 화엄불교대학의 요청으로 육조단경 강의를 하면서, 혜능 대사께서 천하 중생들에게 안겨주고자 하는 궁극의 메시지가 확연하게 와 닿았습니다. 특히 반가운 것은 그 궁극의 메시지가 내가 운영하는 수련회에서 수련생들에게 쥐어주고자 하는, 최종적인 주제인 돈망(頓忘)과 꼭 같다고 여겨지는 점입니다. 불광의 마지막 글로 여러 불광 독자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해볼까 합니다.
이 글을 빨리 읽지 말고 아주 천천히 읽어가면서 명상적으로 실험을 바로 해보세요. 자, 눈을 감고 ‘부처님!’ 하고 불러보십시오. 이 때 여러분의 의식은 어디에 머물렀습니까? 3천년 전 석가모니를 떠올리셨든지, 자기가 늘 가는 법당의 불상을 떠올리셨든지 등등 하셨겠지요. 다 좋습니다. 그러나 더 권장하는 답은 자기 자신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중에서도 몸보다는 마음 쪽, 마음 중에서도 더 본질적인 그 어떤 마음 쪽에 머무르면 좋습니다. 여즉시불(汝卽是佛), 즉심즉불(卽心卽佛), 심외무불(心外無佛)이요, 본성(本性), 성(性)입니다. 이것을 점두(點頭)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가 없다는 것은 불교 초입(初入) 문턱만 들어서면 다 아는 말씀입니다. ‘마음’ 하면 대체로는 압니다. 그런데 보다 본질적인 마음이라야 본성(本性)이요 성(性)입니다. 본성을 확연하게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본질적인 본성을 파지(把持)하기 위해서는 비본질적인 마음들은 제칠 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色], 귀에 들리는 것[聲], 생각되는 모든 것[法] 등 육경(六境)을 제쳐보세요. 제친다는 것은 방하(放下)를 의미하며, 주의(注意)를 두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육근(六根)도 제쳐보세요. 근(根)과 경(境)을 제쳤을 때 어떤 상태가 체험됩니까? 생각하지 않고 느껴야 합니다. 그 감(感)이 대단히 중요한 맥(脈)입니다. 관념구에 끝나느냐 아니면 활구(活句)로 넘어서느냐의 기로가 바로 그 ‘감(感)’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의 사이에 있습니다. 불교인이면 대체로 중대 선입견에 빠져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그 선입견이란, 무언가 한 소식하려면 몇 년, 몇 십년을 수행한 다음이라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구경각을 논하자면 그 생각이 맞지만, 선오(先悟)나 돈오(頓悟)를 위해서는 그 선입견은 부적절합니다.
덕이본 육조단경에서 육조 혜능대사께서 혜명 스님에게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았을 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이냐(不思善不思惡 正與?時 那箇是明上座 本來面目)?”고 묻자 혜명 스님은 단박에 ‘아하!’ 하고 그 ‘어떤 상태’를 깨닫습니다. 선오(先悟)를, 돈오(頓悟)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 ‘어떤 상태’가 본성입니다. 이 본성이 뭇 성자의 삶의 핵심이요 기초입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요,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모든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시비집착(是非執着)하면서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방하(放下)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이겠지요. 그러니 지금 바로 안팎으로 대상(對象)화 되는 모든 것을 놓아보세요. 환경, 몸, 다양한 염체, 마음 등 모든 것, 식주체(識主體)까지도 다 놓아본다면 대체로 누구나 다 놓음으로 해서 현전하는 순수의식을 체험하게 됩니다.
물론 이 체험은 생각이 아니고 느낌입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가만히 은밀하게 위에서 일러드린 대로 명상을 해보세요.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순수의식까지 제쳐보세요. 의식에 집혀지는 모든 것은 다 제치는 것입니다. 무한부정(無限不定)입니다. 즉비(卽非)입니다. 무한부정에도 불구하고 끝내 드러나기만 하는 것이 있지요. 그것이 묘유(妙有)요, 실상(實相)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묘유에도 곰팡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묘유도 제쳐보세요. 무한부정(無限不定)이라는 말을 유념해야 합니다.
무한 부정이요, 무한 즉비(卽非)입니다. 무한부정의 심리과정에 동전의 양면과 같이 동시에 현전하는 긍정, 그것이 묘유(妙有)요, 실상(實相)이요, 자신의 본성이요, 바로 자성(自性)입니다. 유념할 것은 ‘즉(卽)함’입니다. 공과 색의 즉함이지요. 공은 색에 즉하고 색은 공에 즉해야 합니다. 진공과 묘유는 서로 즉(卽)해야 합니다. 이것을 사상으로만 논의한다면 관념론에 불과합니다. 체험으로 수긍되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잘 따라잡기가 되었다면 깨달음의 불씨를 얻은 셈입니다. 이제 그 불씨를 놓치지 않도록 살살 부채질을 잘해 가시면 됩니다. 이는 제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드리는 궁극의 선물입니다.
3년간 불광지를 통해서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의 건승과 행복해탈과 무소주(無所住)한 구현을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