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밀] 7.행복과 창조에의 길

바라밀

2007-12-26     광덕 스님

1) 새 것을 향하여 전진하는 자세

사람들은 새로운 것은 좋아한다. 묵은 것 이라고 하면 모두들 버리고 새로운 것만을 찾아 헤맨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것이 올 때 묵은 것에 대한 향수도 떠나지 않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묵은 것에 집착하는 것이 발전을 저해한다든가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것이 또한 전통을 잃는다고 말은 한다. 하지만 만약 인생에게 춘하추동의 계절적 변화나 인간사회의 변동이 없다면 거기에 인간의 삶의 보람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막막하고 단조한 생활의 연속이,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쓰디쓴 잔을 앞에 놓은 평화일 수 밖에 없으리라.

아름답게 싹터 올라오는 봄, 신록의 아름다움은 말할 수 없이 향기롭다. 이 아름다운 신록이 언제까지 가는 것일까? 만약 겨울까지 가져와서 이듬해 봄으로 넘어 온다면 그것은 四時의 계절이 없는 계절이다. 신록의 향기로움을 모르는 그런 계절일지 모른다. 오히려 여름과 가을을 지나 묵은 것을 다 털어버린 봄에 이르러서 향기로운 싹도 아름다운 신록도 우리 마음속에 찾아 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묵은 것을 딛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자연과 같이 우리들 자신 속에서도 묵은 것은 부단히 버려가며 아낌없이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창조의 힘이 불가불 아쉬운 것이다.

사람의 생명속에 들어있는 힘과 지헤와 자비는 언제나 새롭게 자기의 전개를 요구한다. 묵은 것에 집착하여 퇴장시키는 것을 원치않는다. 있는대로 힘껏 내어쓰고 그 질서대로 아름답게 모두를 발휘할 때 우리는 생명의 충족감을 느끼고 다시 다음 날에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게 한다. 만약 하루하루의 진보에 대해서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마음자세, 묵은 것에 대한 집착은 바로 새것이 오는 것을 막는 것이 된다. 우리는 생명력을 통해서 흘러오는 부처님의 무한공덕을 받아야 한다. 묵은 것으로 중간에서 막아서 이 우리에게 흘러오는 공덕을 막을 수 없다. 우리의 본성은 바다와도 같은 부처님의 공덕바다와 통해 있기 때문에 그와 통하는 생명의 파이프를 막지 않고 또한 막히지 않게 하고 속에 때끼지 않게 해둘 때 거기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부처님의 공덕이 흘러 들어오고 새로운 생명력은 충만한 모양으로 우리앞에 닥아선다. 우리는 부처님의 참된 존재가 우리들 생명속에- 생생히 살아있고, 부처님의 참뜻이 우리들의 의지속에 살아있는 것을 알아야겠다. 그리고 부처님의 공덕이 우리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방법과 뜻을 실천하는 것을 배워, 진리와 우리의 생활이 정상한 관계로 연결시킬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부처님은 완전하시며 부처님은 무한하시며 부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것은 어느때나 우리들 생명력의 샘줄을 통해서 새롭게 우리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들쯘 희망을 찾아 헤매지 말자. 자기 깊음을 믿고 나의 생명력과 지헤와 자비의 힘을 바른 길속에서 아낌없이 바닥까지 내어 쓸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2) 진리와 직결한 마음

앞서 우리의 생활이 진리와 직결될 때 거기에는 놀라운 성공이 기대된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와 정상적인 연결관계를 갖는 것일까? 실로는 내가 곧 진리인 까닭에 연결관계를 갖는다고 하여 나와 진리를 대립관계에 두는 것은 마땅한 표현이 못된다는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바르게 말해서 우리는 육체인 듯 하지만 육체가 아니다. 물질조건에서 이루어진 나인 듯 하지마는 물질조건이나 그 관계적 소산도 아니다. 나라고 하는 생명은 이것이 부처님의 본성이며 불성이다. 이점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잊어서는 안된다. 길을 걸어가되 내가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육체인 내가 아니다. 여기에는 불성이 - 여래의 본성이 부처님의 대공덕이 가는 것이다. 일을 하고 있어도 이것은 육체범부가 하는 것이 아니다. 불자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생각을 갖는 것으로 진리와 일체가 되는 것이며 진리와 올바른 연결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자기를 육체로 보지않고 자기가 하는 일을 불자가 하고있는 일로 생각할 때 자신이나 일에 대한 자세가 사뭇 달라진다. 맑은마음 위에 바른 자세 위에 부처님의 위력과 큰 지혜는 흘러 들어오고 큰 자비는 함께 그 일에 나타나는 것이다. 육체적 조건에 따라서 일이 좌우된다고 하거나 환경조건에 따라서 일이 되어 진다고 한다면 일도 되지 아니하고 피로도 빨리온다. 주체적인 자기가 설사 있다하더라도 물질적인 참 나가 아닌 거짓을 자기라고 알고있기 때문이다. 내가 움직이되 부처님의 본성이 움직이며 육체가 아닌 불성이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 피로가 오지않으며, 맑은 마음위에 큰 지혜와 힘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3) 진리의 질서에 조화하자

다음에 진리질서에 조화한 생활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대개 우리 생활에서 가지가지 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나 마찰이 생기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진리와 조화되지 아니하고 진리의 성스러운 질서와 조화되지 아니하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진리의 성스러운 질서에 조화하지 않는한 거기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가 꼬리를 물고 나오게 마련이다. 문제를 해결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나오고 병 하나를 고쳤다고 생각하면 또 하나의 병이 나타나 마치 흐르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힘써 가다가도 곧 밀려와 마침내는 바위나 폭류 속에 파묻혀서 배와 사람이 다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성스러운 질서를 바르게 알고 우리의 마음을 그 질서에 맞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마치 흐르는 물에 배를 띄운 것처럼 그 물줄기를 따라 바르게 배를 조정해야 하겠다.

4) 진리의 목소리를 듣자

우리들이 소망한다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기 쉽다. 그렇지만 물질을 먼저 구해서는 안된다. 물질은 마음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먼저 구하여야 할까? 아니다. 마음이란 것도 물질의 글림자인 것이다. 우리들은 육체와 감각과 물질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 그림자가 자기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이라 하지만 그 마음은 바로 물질의 그림자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원각경에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은 사대색신을 육체로 삼고 육경에 인연된 그림자를 마음을 삼는다”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참된 도리를 구한다는 것이 이러한 그림자여서는 아니된다. 그림자 이전에 실물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흔히 마음이라 하지마는 이 마음에도 몇가지 단계가 있다. 육체적 요구를 나타내는 단계가 있는가하면 보다 깊은 습성의 표현인 마음도 있다. 또는 보다 깊은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그 모두가 실로는 꿈이며 환과 같은 것이지마는 범부에게는 그것이 있는 것처럼 작용한다. 그중에서도 육체적이며 묵은 습성이며 내지 그릇된 영적 파동을 표현하는 마음에 따라 간다면 그것은 바로 커다란 불행을 따라 가는 것이 된다. 불행이 나타난다. 마군을 따라가면 집안 망하고 사람 망한다고 하지마는 이야말로 마음속에0 가지가지 형태로 깃든 마군인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마음속의 마을 몰라내고 마에게 주처를 제공하지 말자. 그러자면 참으로 밝은 본성의 빛이 드러나도록 그릇된 마음을 소탕하여야 한다. 그릇된 마음을 소탕한다 하지만 실로는 그릇된 마음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만 하지 않으면 곧 소탕하는 것이 된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고 참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대개 물질적 욕구를 앞에 놓고 그를 추구하다 보면 거기에는 일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 된다. 왜냐하면 물질적 요구라 하는 것이 실로는 그림자를 쫓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허망한 것인데 그것을 이루었다고 보는데 불과하다. 우리는 모름지기 모든 마음 모든 물질적인 것을 툭 털어버리고 텅빈 맑고 맑은 마음이 되어 진리인 법성과 일체가 되어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한다. 법성과 하나가 될 때 부처님과 하나가 되고 중생과 하나가 되어 이럴 때 부처님도 없고 중생도 없고 법성도 없는 참으로 밝은 큰 마음이 된다. 이러할 때 참으로 살아있는 자기표현이 무엇이며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가 거기서 결론이 나오며 동시에 그에 필요한 모든 공급과 조건은 갖추어지게 마련이다. 먼저 진리를 앞세우고 먼저 진리의 질서를 앞세울 때 거기에는 진리가 가지는 무한공덕과 진리가 가지는 무한위력이 현실화하고 물질화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5) 자타가 하나인 세계

앞서 진리의 질서에 조화하자는 것을 말했지만 기실 진리 질서에의 조화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웃과의 사랑과 조화가 중요하다. 남을 해친다고 하는 것은 곧 자기를 해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에게 화를 냈다한다면 그것은 곧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된다. 스스로의 마음이 좋을 리 없다. 언짢은 기분은 바로 자기 혈액속 독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는 육체적인 병의 원인도 되고 노쇠의 원인도 된다. 몸가운데 흐르는 피속에 독소가 섞이는 이러한 일이 겹칠수록 더욱더욱 병과 노쇠는 더하는 것이니 이렇게까지 해서 자주자주 이웃에게 화를 내야할까? 그뿐만이 아니다.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은 육체의 해를 줄뿐만 아니라 정신에 많은 상처를 스스로 입는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렇다고 화가 나는 것을 마음속에 참으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참으로 화가 날 때 화가 나지 말아야 하며 마음속에 진정 이웃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가장 괴로워 하는 것은 미움받는 그 사람보다 미워하는 자기 자신이다. 나쁜짓을 하는 사람이니 미워해도 좋다고 할지 모르나 미워한다고 정의가 바로 서는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잘못한 부분만 보고는 나 자신속에 불만과 미움을 터트리고 있다면 결국 얻는 것이란 자기도 다치고 남도 상처를 입는 것이다. 내가 다치고 남이 상처를 입을 때 어떻게해서 정의가 회복된다는 것일까? 원망이나 미움이나 성냄이나 질투 악구 그밖에 상대방의 사적생활의 폭로 등은 결국 상대방을 해치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이 마음속에 일어났을 때는 먼저 자기자신을 다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쁜짓을 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자기자신이 다치고 자기자신이 괴로워 하고 병들고 노쇠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나빤 짓을 한데 대해서 그것을 지워버릴만한 자비가 필요한 것이다. 육조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마라. 남의 허물을 보면 곧 자기 허물은 그보다 크다.”하였던 것은 깊이 간직할 말이다.

6) 참 인격을 존경해 주자

앞서도 말했지만 현 세게에서 무엇이든 이루어 지라는 것은 생각의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 나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은 나쁘다. 나쁜놈이다.”하고 생각한다면 결국 그 사람은 더욱 나뻐질 수 밖에 없다. 어린아이에게 “공부를 못한다. 머리가 나쁘다.게으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런말을 거듭한다면 결국 그러한 말과 상념의 힘은 그 아이를 더욱 공부에 뒤지게 할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한대로 되어 진다는 마음의 법칙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정의감에 의해 그를 바로 잡아주려고 화도 내고 욕도 한다고 할지 모르나 실로는 욕을 하고 화를 낸다고 그 사람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나쁘다고 보고 나쁘다고 인정하고 그것을 추궁하고 그 사람 마음속에 정의감이 나오라고 촉구한다고 해서 바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생각과 말 때문에 잘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보다도 오히려 그 사람은 “원래 착한 사림이며 원래 어진이며 원래 정의감이 충만한 사람이다” 보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의 완전한 인간상을 존경해 줄 때 그 사람은 보다 빨리 바로 될수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해서 사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귀아프도록 설교하는데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참된 인격을 존중해 주는데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을위해 준다고 그사람의 약점을 추궁하하며, 약점을 고치도록 자주 말한다는 것이 사랑인 듯 하지만 사랑이 아니다. 참으로 사람의 인격을 몰라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비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겉보기에는 불안정하고 못마땅하게 보이더라도 그 사람에게 있는 참된 인격과 선을 발견해서 그를 존중하고 대접해 주는데 있는 것을 명념할 일이다.

그리고 한가지 다시 명념할 것은 우리 주변에 나타나는 상태가 그것이 결코 밖에 오는 것이거간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우리들 자신의 마음의 그림자인 것을 알 때 그에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위 환경을 좋게 하자면 먼저 자기 마음 자기 생각을 바로 하는 길밖에 최선의 길은 없다. 나의 마음에 성내는 마음 교만한 마음 있을 때 밖으로 자기를 거슬리고 자기 마음을 괴롭게 하는 사태는 앞에 나타난다. 내 마음에 평탄과 자비가 차 있을 때 그런 경계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면을 좋게 하려면 먼저 내 마음을 고쳐야 한다. 그리고 나타난 환경이 나의 수행 자료임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