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동승 (紅日洞昇)

겁외가 (劫外歌 ) (3)

2007-12-26     경봉스님

   법이 이러한데  무엇을 말하고  다시 듣는다 하랴.
   말에 있지 않고 듣는데 있지 않고 아는데 있지 않으니
   종사의 법을 들으려면 마땅히 종사가 법좌에 오르기 전에
   입도 열기 전에 알아야 참으로 듣는 것이다.
   산은 산 물은 물

   법문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 가운데 있고,  종사가 법좌에 오르기 전에 법문이 있고,  법문 듣는 사람이 자리에 앉기 전에 있고, 종사가 무엇을 말하려는가 하는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 있는 것이다.  이 도리를 바로 알면 되는데 그것을 모르니 부득이 해서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게 되고 들어야 하는데 교가에서 경을 보고 말하는 것과 선가에서 조사 종풍을 드날리는 선리적인 법문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白雲消散(백운소산)하고   紅日東昇(홍일동승)하니  
    仰面看天(앙면간천)하고    低頭觀地(저두관지)하야  
    東西南北을 一任觀光이어라.

   흰 구름 모두 흩어지고 날이 따뜻해지니
   작년에 눈이 오고 얼었던 얼음도
   봄바람이 불고 비가 오니 다 녹아 버린다.
   붉은 해가 동녘에서 솟아올라
   얼굴은 우러러 하늘을 보고 또 머리를 낮추어 땅을 보고
   동서남북을 임의대로 맡기니 마음대로 볼지어다.

     누구든지 산을 볼 때에 산이 푸르고 물을 볼 때에 물이 푸르게 흘러 내려가지만 수행이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양을 해야 이 말이 통하지,  자기 심리를 닦지 않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귀에다 담아 놓으면 금강쇳덩이를 머금은 것과 같아서 이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말에 계합하게 된다. 그러니 이제 산을 봐도 산이 산 아니요 물 또한 물이 아니라 산이 곧 물이오  물이 곧 산이더니 한층 더 나아가서는 산은 이 산이요 물은 이 물이니 이 또한 오묘한 도리인 것이다.

  자성을 밝혀라

   천경만론을  봐도 내 자성자리를 닦아 견성 성불해서  중생 교화를 하라는  말뿐이다.  우리가 이 몸을 애지중지  하지만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생리적으로 따져 봐도 부모님의 물건이지 내 물건이 아니다.  참으로 [나]라고 할 수 었는 것은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그 자리가 곧 나의 이 몸을 원전하고 다니는  운전수요 나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이것을 모르는 것은 흡사 남의 집에 하룻밤을 자도 주인을 안 찾아보면 무례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몇 십년을 끌고 다녀도 주인공을 못 찾아보고 또 설사 찾으려 해도 힘드는 것이다.  석가여래께서도 왕위를  버리고 설산에 들어가 이 자리 하나 밝혔다.  여러분이 먹고 입고 주하는  의식주 세 가지 일에 날마다 노력하는 24시간 가운데 아홉시간 일하고 다섯 시간 놀고 여섯 시간 잠자고 네 시간이 남아 있으니 다만 한 시간이라도 내 주인공 찾는 여기에 전력 해야 한다.  그런데  앉아서 자성자리를 찾고 있지만 마음은 서울로  쫓아가고 대구로,  부산으로 갔다 오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나간 일,  현재 일,  미래 일이 생각키워서 그 망상도적이 들어 앉아 있으니 집안에 도적이 들어 있으면 주인이 방에 들어다기도 무섭고 겁이 나서 밖으로 쫓겨 나가듯이 망상 이것이 앞을 가리면 다른것 생각하는 것이 순일하지 못하다.  즉  화두가 일념으로 되지 않는다.  이것을 순일하게 하려면 자꾸 수련을 하고 닦아나가서 그 분주한 마음이 가라앉아야 한다. 아주 탁한 구정물을 가만히 놓아 두면 맑개 가라앉듯이 이 마음자리가 본래 고요한 자리지만, 자기가 흔들리고 물을 흔들어 구정물을 일으키듯이 그렇게 마음자리를 흔들어 일으켜 놓은 것이다. 지극히 고요한 데 들어가보라. 들어가려 해도 안된다. 망상 이놈이 앞을 가려 주인노릇을 하니 도무지 그렇게 안 된다. 안 되지만 오래하면 그런 마음이 다 쉬어져서 쉬고 쉬는 거기서 해야 한다.  여러분이 걱정을 아니 하려해도 어느 틈엔지 걱정이 생겨서 내 보내려 해도 안 나가고 언제 들어와서 가슴을 치고 머리를 친다. 그래가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게 되는 것이다.  내가 늘 말하기를 이 사바세계에 우리가 나왔는데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바탕 멋들어지게 하고 가자는 말이 그런 까닭이다. 늘 근심걱정만 하고 살 바에야 무엇하러 어머님으로부터 나오기는 나왔느냐 말이다.  좀 근심스럽고 걱정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다 털어 버리고 우리 인생이 살아봐야 기껏 백년 더 사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늘 쾌활하고 낙관적인,  활기찬 생활을 해야 한다.  근심걱정은 물질 아니면 사람에 관한 것 외에는 없는데 설사 좀 근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불타의 그 초월한 정신에 계합하여 인생의 노선과 인생관을 확립해야 한다.  이제껏 생활해 온 모든 사고방식과 생활관념에 잘못이 있으면 모두 비워버리고 바르고 참되고 활발한 산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선이 의미하는 것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인데 참선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다.   선은 선이라 하면 선이 아니요 법을  법이라 하면 법이 아니요 부처를 부처라 하면 부처가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불이나 법이나 또 이 전부가 일체 명과 상이 끊어졌다. 여분의 몸을 다니는 것이 혹 마음이다, 혹 정신이다 하지만 어디 마음이라고 쓰여져 있나.  일체 이름과 모양이 떨어진 자리다.  눈을 감고 가만히 소소영영한 자리를 반조해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무슨 마음이 어디 있으며 불과 법이 어디 있나, 일체 명상이 뚝 떨어졌다.  진리 그 자리 여러분이 불교에 들어보면 그 진리를 한마디 들어야 한다.  그 법문을 듣고 다만 하루에 반 시간이라도 돌이켜 반조를 해봐야 한다.  선을 禪耶(선야)라 하기도 하고 靜慮(정려)라 생각을 고요히 해서  분주한 생각을 쉬고 고요한데 들어가야 나올 것이 어디 있나,  본래 고요한 자리지 또 棄惡(기악)이라 악한 것을 버리는 것인데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악한 생각을 가지고는 선을 못한다. 또 正受(정수)라 바로 받아들인다는 말인데 이 마음이 지극히 묘한데 들어갈수록 눈으로 어떤 경계를 보거나 귀로 소리를  듣거나 보고 듣는데 바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이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탁하거나 마음속에 하찮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보고 듣는  것을 바로 못 받아들인다. 그러니 이 자리는 지극히 닦으면 바로 받아들여진다.  듣는 것도 바로 듣고 보는 것도 바로 보고 모든 일이 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부처님의 바른 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남을 속임이 없어야 하는데 내 자성을 속이지 않고 남도 속이지 않고이렇게 하는 것이 정수이다.  참선은 많은 말을 해서는 안 되고 적어도 요긴한 말 그것을 들어야 하고 눈만 꿈적거려도 알고 손만 들어 보여도 안다.

          공안의 시초 [무]

   천 칠백 가지 공안이 있는데 그 가운데 조주 無字가 있다.   누가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없다] 하였다. 일체중생 곤충이라도 꼼작거리는 것은 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했는가?  이것을  의심하는 것이 무자 화두이다. 조주스님은 아주 참으로 멋지게 생활을 하신 분으로 수행을 사십년 하고 행각을 사십년 하면서 선지식을 찾아 법담을 나누기도 하고 중생교화를 사십년 하셨다. 그런데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예주땅에서 조주스님은 달정(達淨)이라는 스님과 토굴을 짓고 함께 공부를 하였는데 생사고락을함께 하던 달정스님은 그만 죽고 그 후에 조주스님은 공부를 이루었다. 조주스님은 도반 달정스님이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자기가 도를 깨쳐줄  텐데 일찍 죽은 것이 애석해서 달정스님이 도로 사람으로 태어나서 오기를 기다렸는데 마침 문언이라는 스님이 되어 왔다.   전생인연으로 도반이었던 조주스님을 찾아 온 것이다.  문언이 조주스님에게 법을 물으러 들어가는데 그때 도량에 개가 한마리 있어서 문언이 묻기를 게에게도 부처의 성품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없다] 하는데서 활연히 깨달았다. 조주의 무자가 그것이다.

         화두 참구하는 법

   화두라는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지만 조사가 중하근기를 위해서 바로 일러준 것인데 천 칠백가지  공안가운데 하나만 들고 참구하면 화두가 타파되어서 나의 이 본성을 아는 시절이 온다. 앉으나 누우나 생각 생각이 끊임없이 해서 도닦는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물이 흘러가듯 해야 한다. 앉으나 누우나 항상 자기의 그 알려고 하는 화두를 눈앞에 대하기를 사람을 서로 대한 것과 같이 해서 잠시라도 중단되면 안된다. 금강과 같은 그런 큰 용기와 뜻을 세워서 죽나 사나 하는 그런 심정으로 공부를 해서 한 생각이 만년과 같이 해서 내마음이 광명을 돌이켜 비춘다. 살피고 다시 관하여 마음 가운데 하찮은 생각이 있나 없나 살펴서 망상이 붙으려 해도 붙을 수가 없어야 한다.  파리가 오만 군데 다 붙지만 불이 훨훨 타는데는 못 붙듯이 망상의 파리도 듣는데 붙고 보는데 붙고 일상생활 붙지 않는데가 없이 붙어서 사람의 애를  먹이지마는 지혜의 불이 훨훨타는데는 붙으려해도 붙을 수가 없다. 공부를 하려고 앉아 있으면 혼침에 빠져 잠이 오거나 이 생각 저 생각 산란심이 오게 마련인데 이곳을 오래 닦아 조복 받으면 자연히 쉬어진다.  쉬고 쉬어서 홀연히 어떤 경지를 보거나 어떤 소리를 들으면 활연히 의정덩어리가 타락될 때 자기의 불성을 아는 것이다.

          십지보살의 수행

   화엄경 십지품은 십지보살이 처음 큰 원력을 발해서 마음을 청정케 하는 법문이다.   십지보살이 대원을 발해서 이 마음을 얻는데 첫째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니 석가여래도 중생을 위해서 나셨다.  둘째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마음이니 부드럽고 착하고 화해야 한다.  마음이 화하면 기운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면 집안이 화하고 집안이 화하면 사회가 화하고 사회가 화하면 국가가 화하니 화한 가운데  무엇이든지 이룩된다.  셋째는 남을 수순하여 주는 마음이니 남의 뜻을 들어 줄 것도 있고 안들어 줄 것도 있는데 대강 들어 줄 만한 것은 들어 주는 것이 좋다.   넷째는 적정심(寂靜心)인데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일을 하고 바쁘게 설치고 해도 마음은 고요하고 태연부동해서 고요하고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   다섯째는 조복심(調伏心)이니 나쁜 마음이 생기든지  가령 남을 속인다든지 하는 마음을 항복받고 꺾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는 적멸심(寂滅心)인데 이것도 고요한 것이다.  일곱째는 겸화심(謙和心)이니 겸손하고 하심하는 것이다. 벼도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도가 높을수록 겸손하고 사람도 훌륭할수록 하심이 되어야 한다.   여덟째는  윤택심(潤澤心)이니 마음이 초조하고 속에서 불이 일게 하지말고 윤택스럽게 해서 남까지 윤택하게 한다.   아홉째는 부동심인데 하늘에 별이 많지만은 하늘 중심에 정반성(定盤星)이라는  별은 동하지 않는다. 내가 부동심에 가 있어야 남의 초조한 마음을 없애준다.    열째는 부탁심(不濁心)이니 물도 탁하면 밑이 안보인다.  물이 탁하지 않아야 물밑이 환하게 들여다 보인다.  처음 십지에 들어가는  보살들이  이러한  열가지 큰 원력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耳中出氣(이중출기)하니 暗裡穿針(암리천침)로다.

   어두운 가운데 바늘을 꿰니 귀안에서 기운이 나온다.

   (손을 들어 기운이 허공으로 올라가는 형용을 하며) [이런 기운이 나와!  이런 기운이 나와! ] (할 一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