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마음

테마에세이 . 평화

2007-12-25     관리자

 우리 고려가요 「동동」(動動)에

     9월 9일에 아으

     약이라 먹는 황화(黃花)

     꽃이 안에 드니

     새셔 가만하여라.

라는 가락이 드높다. 이 바깥 짝은 2가지의 풀이가 있다. 하나는 주격(主格)조사로 풀어 「꽃이 안에 드니 세서(歲序)가 만(晩)하다.」요, 다른 하나는 동명사(動名詞)로 풀어 「국화꽃이 몸 안에 드니 그 기운이 새어나서 마음이 가만하다.」로 각각 주석하고들 있다.

 그러나 격조사라면 문법적 사단이 문제이고, 동명사라면 「가만」이 아닌 「 가만」이어야 하니 음운(音韻)이 문제다.

 물론 말은 쓰기에 따라 퍼진다. 가령「고요」나 「거룩」만 해도 「고요하다」와 「거룩하다」라야 마땅한데, 아에 명사로 쓰고 있듯, 쓰면 못쓸바 아니다.

 워낙 형용사와 같은 원시어(原始語)는 흔한데 명사와 같은 실사(實辭)가 모자라는 우리말이다. 따라서 외국처럼 날로 신어(新語)를 만들어 내고 복합명사는 물론, 품사의 전화(轉化)에 손을 씀이 선결이다. 이는 15세기 초반 세종이 시도한 과감하고 창조적이고  또한 실질적인 어문(語文)의 보기로 미루어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가만」이란 말도 그렇다. 「가만」이 마음의 고요라면, 「고요」는 환경의 안온이다. 고요가 흐르는 법당에 오롯하게 결가부좌한 스님의 가만은 거룩이다. 신변의 위해(危害)를 무릅쓰고 상원암(上院庵)을 지킨 방한암(方漢岩)  스님의 가만한 모습은 열반의 거룩이다. 거기에는 법열(法悅)이 있었고 개오(開悟)가 빛났다. 서원(誓願)이 다부졌고 믿음이 생동했다.

 이 가만한 마음이 바로 평화다. 이 가만한 도사림이 평화의 비로솜이다. 알량한 가죽부대로 남을 욱박하고 엉뚱한 위세를 떨치니까 환란이 오고 반발을 산다. 남이 저가 아닌 자기의 처지인 곳에 파탄은 범접하지 못한다. 물론 말은 쉽지만 도시 어려운 일이다.

 사실 생노병사(生老病死)는 우리 인간의 업보(業報)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우리 인간의 배냇병이다. 그러나 그 기쁘고 성내고 슬프고 즐거움을 가만한 마음으로 걸러내어 가라앉히는 데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도도하다. 이 가만한 마음은 믿음의 운력이요, 보다 떳떳하게 사는 평화의 길잡이다.

 평화는 이해를 떠난 공(空)의 마음에 깃든다. 이 자비가 곧 가만한 마음의 작동이다. 딴은 나보다 남을 위하긴 어렵지만, 나도 위하고 남도 위하는 일이 바로 자애다. 남의 기쁨과 노함과 슬픔과 즐거움을 자기의 것으로 헤아릴 수 있는 가만한 마음이 자비심이다.

 그렇다고 나를 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고민이다. 내가 존재한 연후에야 남이니 말이다. 이 「나」라는 아집(我執)을 버림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의 보람표이지 현실일 수 없음이 원죄(原罪)탓이다.

 가만한 마음, 거기엔 평화가 넘실거린다. 거기에는 분란이 있을 수 없다. 선뿔리 평화를 외칠 필요조차 없다. 우격다짐으로 자기만을 세우자니 마음의 가만이 깨지고 마음의 평화가 일그러진다 이에 다다라 다시금 우러러지는 부처님의 영원한 미소다.

 가만한 마음, 마음의 평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높깊은 말이다. 남을 개개지 않는 가만한 마음, 생각사록 믿음의 안표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