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민요에 싣고......

8.15, 35년

2007-12-24     관리자

 가는 세월 잡을 수 없고, 오는 세월 막을 수 없어, 흐르는 세월 어쩔 수 없이 흘려 보내니 참으로 세월은 빠르고 또한 빠르구나! 내 나이 벌써 60이 지났으니 젊었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지나간 날을 돌이켜 보면 누구나 느껴지는 심정이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감회가 서린다.

 일제시대의 속박에서 그 울분을 민족 고유의 민요가락에 달래 보고자 향리에서는 경창대회가 명절 때면 곳곳에서 열리곤 하였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이 목소리 때문에 대회에 나가면 1등을 하곤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지금까지 민요 가락에 몸 담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전에는 경성 방송국에서 서도창(공명가, 초한가, 배따라기, 영변가, 적벽부, 관동팔경 등)을 방송하였으며 그 당시 만담가 김백소씨 일행의  단원으로 전국 순회 공연을 다니면서 민족의 한을 달래어 많은 갈채를 받았다.

 해방 후에는 나 나름대로의 무대생활을 통하여 일반에게 보급하였다가, 6.25의 쓰라린 격동기를 맞아 잠시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얼마 후, 고려영화사에서 제작한 '배뱅잇 굿'(19958년)에 주연을 맡았고, 장소팔, 백 금녀, 고 백화씨등이 출연한 '공처가'(1958년)라는 영화에 출연하여 일반에게 우리 민속 민요를 보급하는 길이 처음으로 화면을 통하여 선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배뱅잇 굿' 영화가 많은 관중의 성황으로, 레코드 판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려, 이후 '배뱅잇 굿'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어린 시절에 여러가지 경서도 소리를 배워 두었던 것을 다시 복습하여 전통적인 민속 민요를 보급하였으며, 특히 강원도 정선의 원형 '정선아리랑'을 전상봉씨와 같이 부르며 본격적인 국악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우기 내가 강원도 사람이어서 토속적인 강원도 민요에 더욱 관심이 갔다.

 지금의 국악협회 전신인 대한 국악원이 있을 때는 민요담당 책임자로서 민요를 지도하였으며, 국악협회로 명칭을 바꾼 후, 국악예술단을 조직하여 전국 순회공연과 일선장병 위문도 활발하게 진행 되었다.

 그 후, 우리 것을 되찾자는 정부(문화공보부)의 문화 예술 진흥 시책에 힘입어 국악 분야도 자못 활발하여져서 전통예술 보존은 물론 보급까지 커다란 혜택을 보게 되었다. 이 때는 국력도 늘어나, 특히 텔리비젼 방송국의 출현으로 일반과 더욱 가까와 질 수 있었으니, 해방 전후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국악계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재일동포 위문 공연은 물론 국제 문화 교류로 일본 왕래가 빈번하여지고, 또 미주 지역의 교포위문공연, 파월장병 위문 공연등 해외 나들이가 수 차례 있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아마 국악인으로는 내가 제일 많이 해외 공연을 다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제 젊음도 지나가고 무엇인가 남겨 놓고 싶은 욕망에서 1968년 민속 예술학원을 설립하여 후배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 중, 중견 국악인이 배출 되었음을 자위하는 바이다.

 또한 나의 장기인 '배뱅잇 굿'을 전수 시키는 일은 방심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배뱅잇 굿'을 현저히 부르는 사람이 없어서 아쉬우나, '배뱅잇 굿'을 부르는 사람은 박상옥, 윤평화, 김뻐꾹, 최창남, 김석만 등 그외 몇사람 있으며 특히 지관팔씨는 '배뱅잇 굿'으로 여러 번 방송이나 TV에 출연하여 그나름대로의 보급에 열성을 보여주고 있어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8.15 이후, 주변정세의 변화로 인한 비극의 국토 분단으로 지금은 갈 수 없는 서관(서도,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지방이지만, 이지방의 토속적인 민속 민요로 높이 평가 되는 이 '배뱅잇 굿'이 소멸 되지 않고 전승될 것은 확신하나 좀 더 영구보존의 힘이 되는 길을 마련하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염원이다.

 끝으로, 우리 민족 고유의 가락을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이 관심을 갖고 국악분야에 많은 진출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국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