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寒巖) 선사를 기리며

8.15, 35년

2007-12-24     관리자

 8.15란 내게 있어서는 생활 철학마저 바로 잡아주는 계기가 되었었다. 왜정 말에 그야말로 단말마적인 시달림에 못 이겨 그해 6월 30일 날자로 학교에는 휴직원을 내고 강원도 관동땅 강릉으로 떠났다. 노모를 비롯 3남 3녀, 도합 아홉 식구가 소개차로 서울을 떠난 셈이다. 생각하면 인생이란 하루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나그네길이라, 또다시 10여일후에는 강릉에서 멀지 않은 어항겸 무연탄의 생산지인 자그마한 소도시로 향했고 분에도 맞지 않는 직장에 책임을 지고 부임을 한 것이다. 이것은 비록 소개라 하더라도 일일부작이면 불식의 이치에 따라 호구지책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인연에 따른 결과이었다.

 그 후 불과 한 달만에 우리 민족의 숙망이던 조국의 광복이 내도하고 식민정치는 36년의 종지부를 찍게 되니, 때는 바로 전국 사찰마다 쇠붙이 공출로 법석이  난 뒤가 아니었던가. 참으로 이승의 무상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직후 전국 각급 학교에서는 새 주인으로 한인을 맞아 개학을 서두르게 되자 이것 저것 한 목에 바쁜 나날이었다. 강릉읍의 친지들은 고등여학교장의 자리를 놓고 나를 기다리니 급히 돌아오라는 연락이 인편과 전화로 성화같았다. 그래서 나는 강릉여고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때는 해방 직후라 더구나 좌우의 대립과 거센 소란의 물결은 겉잡을 수가 없이 젊은 교장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말았다. 초대 한인 고등여학교장과 강릉사범학교 창설 교장으로 재직 중 나는 세 차례에 걸쳐 오대산 월정사 상원암[지금은 상원사]을 찾아 우리 근대 불교계의 행(行)의 성자로서 가장 추앙을 받아오던 한암스님을 만나 뵈올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어수선한 사회정세 속에서 온유와 천진 청순과 정결한 남녀 학생의 교육을 책임진 몸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암선사는 마지막 만나 뵐 때에야 조용히 자문이나 하듯이 "수시이의의(隨時而宜矣)일까요." 한 마디 말씀 뿐이었다. 나는 대뜸, "그것은 이른바 기회주의로 회색적이라고들 한답니다." 하였더니만 스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또다시 한마디, "그럴까요."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뒤 이것이 나에게는 선의 공안처럼 나 혼자만의 화두가 되어 얼마동안 정좌로 명상 속에 내 인생의 중대사인양 보리의 진리를 찾으려고 정진수행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불교계의 석학이요, 오랜 세월 중생 구도에 온 힘을 기울이는 한편 불교의 근원인 화엄경을 완역 출판한 뒤에 이어서 능엄경, 기신론, 반야심경, 원각경등도 이미 번역을 끝낸 탄허(呑虛)스님이 그 당시는 한암선사의 상좌로서 친히 모시던 분이라 그를 통하여 한암스님의 휘호를 두 폭이나 얻었으니 내 집의 가보가 되었다. 그 중 한 장의 내용은 '무한청풍 보보생(無限淸風 步步生)이었다. 이것을 읽는 순간 그야말로 돈오는 아니었지만 크게 개달은 바 있었다. 대각 도통한 사람은 그의 한 걸음 한걸음마다 끝없는 맑은 바람[새 물결]이 생겨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대로 '수시이의의'라는 선사의 말씀과도 연관이 되는 것이다. 굳은 신념, 깊은 신앙의 소유자는 결코 요즘 떠도는 해바라기 인생은 될 수가 없다고 하겠다. 도리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면서 적극적으로 그들 속에 들어가서 교화와 선도의 계기를  마련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내가 즐겨 쓰고 있는 호중의 하나 다운(多耘)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따라서 그 다섯 글자는 내 인생관의 정립에 끼친 수교(垂敎)의 일품이 되었고 그런 심지에서 오늘도 삶의 거리를 거닐고 있다. 그런데 6.25 피난살이 부산에서 어느날 '묘심사'던가 아주 우연하게도 그 앞을 지나다가 한암선사의 49재 행사에 동참을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나와는 크나큰 인연 상결인양 느껴졌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마냥 한암선사를 기리면서 거듭 추모 속에서 명복을 빌면서 지낸다. *      (文博. 대한삼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