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주의와 현대사상

특집/보현보살의 신앙

2007-12-24     관리자

  보현사상의 연원은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에 있을 것이고 보현행원품의 사상은 화엄경의 교리에 근거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현사상은 중중무진법계연기설(重重無盡法界緣起說)을 벗어날 수는 없다. 중중무진법계연기설은 무진업설이다. 업설에 따르면 이 세상에 있는 것 치고서는 작업의 인(因)이 아닌 것이 없고 작업의 과(果)가 아닌 것이 없다. 특히 무진업설에 의하면 작업의 인과관계에는 끝이 없다. 만약 인과관계로서 이 세상을 설명한다면 그 설명의 체계는 무한하다. 이 세상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또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그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윤회과정(輪廻過程)은 무한하다. 그 윤회과정을 개(個)로 보던지 전(全)으로 보던지 또 종(縱)으로 보던지 횡(橫)으로 보던지 모두 일관된 인과관계로 무한하게 연속되어 있고 연관되어 있다.

그런 뜻에서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고 육상원융(六相圓融)과 십현연기(十玄緣起)가 곧 그런 뜻이다. 동력적으로 볼 때애는 강약 대소를 막론하고 어떤 하나의 움직임은 반드시 무한한 함수적 변동을 우주적으로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동시에 그러한 우주적 변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일(一)은 다(多)에로 확충되고 다(多)는 일(一)에로 집약된다. 무엇이던지 얼마던지 다른 것들에로 변하고 옮아가고 닮아간다. 무지법계에서는 정지는 없고 변동만이 있다. 그 무한한 변동을 윤리적 인격적 측면으로 본다면 선(善)과 악(惡)과의 두가지 방향에로의 무한한 발전적 변동과 퇴보적 변동이 있다. 그런데 선의 방향에로의 무한한 변동을 인격적으로 일으키는 작업 과정이 곧 보현의 행원이다. 그런 뜻에서 보현의 원과 행과 공덕은 무궁무진하다. 보현의 십종광대행원(十種廣大行願)은 곧 중중무진법계연기의 행이고 원이고 공덕이다.

그 어느 한 원도 행도 공덕도 한이 없다. 그 어느 한 원도 행도 공덕도 한이 없는 까닭은 중생계 내지 그 업장과 번뇌가 무궁무진한 데에 있다. 무궁무진한 중생계 내지 그 업장과 번뇌에 대치하여서 비로소 보현의 무궁무진한 원과 행과 공덕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곧 화검법계연기설에서의 유무상즉(有無相卽)과 유력무력상입(有力無力相入)의 원리와 윤리적 적용이다. 중생계가 무한하고 중생의 업장이 무한하고 중생의 번뇌가 무한하기 때문에 중생계를 다하고 그 업장과 번뇌를 소멸시키고 안락으 얻게 하려는 보현의 원과 행과 공덕도 무한할 수 밖에 없다.

십종광대행원의 십(十)은 시방(十防)의 십이나 마찬가지로 전(全)과 무한을 뜻한다. 무한한 행원과 그 공덕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적 열가지일 뿐이다. 그래서 그 하나 하나의 행원의 끝에는 반드시 <중생계 내지 번뇌 무유진(無有盡)고로 아차예경도(....찬탄등도)무유궁진하여 염염상속하여 무유간단하며 신어의업에 무유피염이니라>라는 부연하는 말이 붙여져 있다. 무한한 중생계의 업장과 번뇌의 현존적(現存的)인 긍정 위에서라야만 비로소 보현의 무한하게 광대무변한 성자적(聖者的) 행원이 가능하다고 보는 거기에 현대가 보현사상에서 배울 점이 있다.

  현대는 한 말로 한다면 자연적으로는 과학시대이고 사회적으로는 민주시대이다. 과학은 실증주의에 입각하고 있고 민주는 평등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실증주의는 조건부적 유의 긍정에서 시작되고 평등주의는 모든 개(個)들의 평등적 가치의 긍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조건부적 유론(有論)인 과학도 또 평등적 가치론인 민주론도 화엄법계연기설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의 근거를 유(有)로써 증명하고 해석하는 과학적 실증적 원리는 그것이 곧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의 원리에 내포되고 모든 개(個)들의 평등적 가치를 인정하는 민주적 원리는 그것이 곧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의 무차별의 원리에 내포된다. 한말로 하자면 현상계의 설명으로서는 화엄법계연기설도 자연과학도 모두 유론이고 사회적 건설의 측면으로는 심불급중생무차별론도 민주론도 모두 평등론이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이나 민주론이 화엄법계연기설에서 배울 점이 있는 까닭은 화엄법계연기설이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유론이고 평등론인데에 있다.

  실증주의에서의 자연과학서적 원리는 모든 현상은 귀납적으로 추정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인정하는 점에서 이사무애의 원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또 현대의 정치적 민주주의에서의 평등론은 개인들의 인권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점에서 중생과 부처님이 무차별하다는 원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화엄법계연기설에서는 수파불이(水波不二)라는 이사무애 뿐만 아니라 산시수수시산(山是水水是山)하는 사시무애의 원리도 인정하고 또 개개의 인권을 존종하는 중생과 부처님과 마음과의 평등을 인정한다.

사사무애의 이정은 곧 물과 피와 불이 또 떡과 사람과 돌이 보다 차원이 높은 어떤 동질적인 요소와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형성되고 지배되고 있음을 인정함이고 또 심불급중생의 무차별의 인정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개인들 사이에서만의 평등이 아니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과 마음 속의 정신적 가치들과의 사이에서의 평등을 인정함이다. 다시 말하자면 가령 목숨, 자비, 지혜, 사랑, 인의(仁義), 인욕(忍辱) 등의 정신적 가치들과 나무, 쇠, 돌, 흙, 돈 등의 물질적인 것들이 모두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어떤 동질적인 요소와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형성되고 지배된다고 인정하는 것이 곧 화엄법계연기설이다. 따라서 화엄법계연기설에 따르면 자연률과 도덕률과의 사이에 일정한 인과관계가 있으며 그런 뜻에서 자연률도 도덕률도 아니면서 그 둘을 그 안에 내포하는 어떤 제3의 원리를 인정하게 된다. 자연과학적 인과율만으로는 무에서 유가 나올 수도 없고 떡이라는 생각이 떡이 될 수도 없고 외씨에서 참외가 나올 수도 없지만 그러나 그러한 제3의 원리에 의한다면 그런 일들이 가능하다.

불지(佛智)로써 한다면 일념지간(一念之間)에 무시이래의 무한한 업장과 번뇌도 소멸될 수도 있고 지성으로 염불하면 석녀도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효성으로 찾으면 설중빙판에서도 죽순이 싹튼다. 이는 곧 정신적 도덕률이 물질적 자연률을 지배할 수가 있음을 암시하여 주는 가르침이고 만약 불교가 그러한 가르침이 아니였다면 수천년래의 그 역사적 존재가치도 찾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만이 평등적 가치가 아니고 사람과 자연과 생물과 무생물과의 사이에서의 평등적 가치도 암시하여 주는 가르침이 곧 화엄법계연기설에서의 가르침이다.

그렇게 차원이 높은 인과업보의 사상에 근거한 개인적 인격적 수행과 사회적 국가적 건설의 무한한 발전적 실천과정이 곧 보현의 행원이다. 인간들 사이에서만도 자연현상들 사이에서만도 아니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전(全)으로 일관하는 인과업보의 원리에 근거한 개인적 인격의 완성과 국가적 사회의 완성을 향하는 무한한 작업과정이 곧 보현행원이고 그러한 사상이 곧 보현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질일변도이고 이기(利己)일변도의 경향이 있는 현대사상은 그러므로 보현행원사상에서 배울점이 있다. 화엄법계연기설과 보현행원에 의하면 산천초목도 부모처럼 생각해야 하고 영원하게 이타(利他)를 위하여 수고하면서도 피로와 권태를 느끼지 말고 간단이 없이 정진 노력해야 하는데 근내화 작업도 그 이상 더 자연과 인간을 애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