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의 학인 시절]우리 스님 석전 박한영 스님

노사의 학인(學人) 시절 :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스님

2007-12-21     운성

     [16] 불법 중흥에 바친 생애

   우리 스님은 1870년 고종 7년 8월에 탄생하셨다. 출가하신 것은 19세이고, 21세에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강을 하시던 환응(幻應) 스님에게 사교(四敎)를 배웠고 이어 선암사 강원으로 옮겨 거기서 대교를 마치셨다. 이후 귀암사, 백양사, 법주사, 화엄사 그밖에 여러 곳에서 강을 하셨고 합방 이후에는 그 당시 일본 조동종과 연합하려는 이혜광 일파에 반대하여 오성월, 한용운 스님과 더불어 임제종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 후 해동불교지를 발간하며 한편에 고등 불교 강숙에 숙사가 되시고 개운사 강원을 개설하였다. 1931년에 불교전문학교 교장이 되시고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불교 조계종 제1세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입적하신 것은 1948년 2월 29일 정읍 내장사에서이다.
   이렇게 화상의 생애를 돌이켜 보니 나라가 흔들리다가 마침내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기자 우리 스님은 불교 중흥, 교육 진흥, 교화 확충에 몸 바쳤다. 그리고 나라를 되찾자 종정에 취임하시고 3년 만에 열반에 드셨다.
   우리 스님 석전 스님에 대하여는 최근세 불교의 선구자로서 학자들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불광도 지난 80년 5월부터 5회에 걸쳐 <석전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동국대학 목정배 교수에 의해 다루고 있음을 본다.
   우리 스님의 교학적 깊이나 사상적 측면에 대하여는 그 많은 논고에 의하여 학자들이 다룰 것이기에 나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7회에 걸쳐 우리 스님의 일상생활 풍모를 두서없이 회고하여 보았지만 아직도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 온다.
   그래서 몇 가지를 이야기를 좀 더 나열해 보고자 한다.

     [17] 건강의 비결

   우리 스님은 키는 보통 키, 목소리가 단단 깐깐한 편이었다. 평생을 시계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다. 생활도 단순하셨지만 성격도 단순하셨고 천진스러웠다. 조금도 가식을 모르는 무심 그대로였다. 그러기에 아주 건강하셨다. 그렇게 평화로우시고 단순하시고 맑게 사시고 규칙적으로 생활하시므로 건강하셨을 게다. 건강법이 또 있었는데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서는 역시 환구(幻軀)는 환상(幻相)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님께서는 70을 넘기면서부터 신경통을 호소하셨다. 그래도 잘 견디셨는데 백내장이 생긴 뒤에는 어려우셨던 모양이다.
   서울 운동장 곁에 경성 병원이라는 병원을 열고 있는 일본사람이 있었다.
   그는 우리 스님이 눈병이 나고 그나마도 백내장으로 진단되었는데 9일이면 완치한다고 장담을 했다. 스님은 하는 수 없이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9일을 지나 20일이 되어도 의사는 퇴원을 허락하지 않는다. 노령이므로 회복이 늦어지는 것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스님으로서는 그것이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스님이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 있기를 20일이 되니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또한 스님은 성질이 급하신 편이기도 하였다.
   마침내,
  『나이도 이 만큼 늙었고 눈도 하나면 된다.』
하시고 그냥 퇴원하셨다.
   안쓰러운 노릇이다. 그때 치료를 잘못하여 결국 한쪽 눈이 실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쪽 눈으로 계속 책을 보셨으니 돌이켜 생각하면 시봉이라 하는 우리가 너무나 어리석고 무능하여 스님을 잘못 모신 것이 천번만번 후회가 된다.

     [18] 장서 간 곳이 어딘고?

   우리 스님은 줄잡아 약 4만권의 책을 모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만큼 책을 아끼고 책을 구하는 데는 남다른 성의를 기울이셨다. 아무리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라 하더라도 필요한 책이라면 사놓고 보았다.
   그만한 책을 모으신 것은 독자 여러분이 짐작하듯이 결코 장서를 위해서가 아니다. 당신의 연구를 위해서 갖추어진 것이며 부처님 법 공부하자면 필요하기 때문에 모은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은 당신의 사유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불법을 공부할 사람들을 위해서 모은 것이며 그렇게 활용되기를 바라셨다.
   그 책은 당신 생전에 몇 군데 기증한 것으로 보아 이해 할 수 있다.
   해방 후 봉은사 주지를 하는 황주지에게 봉은사 도서관 장서로 기증한 것이 약 6천 권이다.
   그런데 황주지는 그 책을 받아서 개원사에 있던 자기 사택에 쌓아 두었다가 그냥 저 봉은사 사건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니 봉은사 도서관도 되지 않았고 책은 흩어지고 고서점으로 돌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 동국대학에는 약 4천권의 장서를 기증한 것으로 안다. 우리 스님의 본사인 귀암사에는 2만여 권이 있다. 거기에는 상해에서 구해온 기본도 청조 실학파에 관계되는 귀한 서적들도 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런데 그 모두 지금은 없다. 6·25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같이도 아끼시고 공들여 모으시고 불법과 후곤(後昆)을 위하여 이룩하신 장서가 이제는 간 곳이 없다. 생각할수록 허전하고 책에 싸여 책에 묻혀 계시던 우리 스님의 모습과 함께 애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생각할수록 가슴 저린 것은 구암사에 모셨던 영각의 소실이다. 거기에는 우리 스님 영 외에 백파(白坡) 스님의 영, 스님이 아끼셨던 추사의 족자가 20여 개 있었고 추사의 병풍, 옹방장의 달마, 그 밖의 그림, 고희동씨와 이당의 그림, 그밖에 우리 스님이 생전에 아끼시던 서화를 함께 보장하였었는데 그만 6·25에 피해를 보고 말았다.
   고인은 가고 그 자취도 가고, 사모하는 이 마음만이 눈앞에 생생할 뿐이다. 당신이 아끼시던 그리고 생애를 기울여 추구하신 한국 불교의 성장 속에 당신의 모습을 보려 해도 역시 적막한 감정 씻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오늘의 나에게 있어 스님은 가시고 스님의 뜻만 지금 여기 머물러 계심을 우러를 뿐이다.
   스님의 문집은 육당 최남선씨가 모은 시가 중심인데 선생이 중국에서 인쇄해 왔었다. 한정된 출판이라서 아주 희귀본이다.

     [19] 전강(傳講)

   선사(禪師)가 제자에게 법을 전하여 법을 잇게 하는 것을 사법(嗣法)이라고 한다. 교학을 전공하는 강주(講主)도 강을 전하여 강통(講統)을 계승하게 하니 이것을 전강(傳講)이라 한다.
   기록은 보면, 조사들의 사법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고 그 형식은 잡을 수 없이 전광석화(電光石火)이며 또 때로는 게송을 지어주고 의발을 전할 때도 있다. 때로는 시간과 장소를 달리 하는 뒷사람이 조사의 법을 추앙하여 원사(遠嗣)하는 것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강통을 전하는 전강도 한 가지만은 아니다. 우리 노스님이 우리 스님 석전 스님에게 전강할 때는 이렇게 하였다 한다.
   대중이 강당에 모였다. 우리 스님을 법상에 오르게 하시더니 노스님은 제자인 우리 스님에게 죽비(竹篦)를 바치고 법상 아래 엎드려 절을 하였다.
   강을 전한다 하니 우리의 상식으로는 법사가 법상에 오르고 법을 받는 제자가 법상 아래 엎드려서 강통을 이어 받는 의식을 함직도 한데 우리 스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전강은 강통을 잇게 하는 것이며 강주의 법을 계승하는 것이며 동시에 대중을 법으로 가르치고 통솔하는 강주의 지위를 전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사가 법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제자가 그 자리에 오르고 법과 강통과 통설의 상징인 주장자를 잡게 하는 것이다.
   불법을 가르치는 강원의 강사는 이렇게 해서 탄생되는 것이다. 경학에 밝다 하여 제 풀로 강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선강사의 전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강을 받은 사람은 대게 몇 가지 전수물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것은 강본(講本)경이며 경전의 사기(私記)이다. 경전의 사기는 경전에 대한 주석과 참고 기록들인데 경전 연구에는 필수적인 것이다.
   사기는 강주가 대대로 전승하여 내려오는 것이 일반이고 강본경은 선강주가 주(註)를 단 강의용 경전이다. 말하자면 이것으로 강사가 권의를 세우고 밑천을 삼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을 강 보따리라고 불러 온다. 강 보따리는 반드시 뒷사람에게 전해 주어야 하고 결코 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정 말기, 전쟁은 날로 가열상을 더하고 국내의 장정이라는 장정은 모두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징병은 일본 군대에 들어가 중국대륙이고 태평양으로 떠나가는 것이고, 징용은 노무자가 되어 일본이나 북해도나 또는 사할린이나 남양군도 전쟁터로 끌려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대원강원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학인이 이산하게 되니 결국 강원도 문을 닫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