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현대적 해명] 인생은 도량

윤회의 현대적 해명

2007-12-18     관리자

  지금까지 장기간에 걸쳐 윤회에 관한 실증을 다각적으로 더듬어 보았다. 필자가 밝히고자 하였던 바는 우리의 참 생명은 결코 현재의 육신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육신 이전에 한량없는 세월 동안 존재하여 왔고 그리고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속하여 갈 것이다. 전생에 지은 바 대로 현생에 받으며 현세에 지은바 대로 내생에 받는다는 가장 소박한 인과법칙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의 불변의 법칙임도 함께 보아왔다. 이제 이 윤회를 주제로 한 연재를 끝 마침에 있어서 필자는 독자 제현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첫째, 인생은 자기 운명에 대하여 자기만이 책임진다는 것이다. 인생의 운명을 타율적으로 결정 지워주는 객관적 조물주로 또는 운명의 신은 존재하고 있지 않고 우리의 경험 세계는 각자가 조성하여 놓은대로 전개되어 진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면 그 각본의 작자는 바로 자기이며 그 주인공 역시 자기이다. 우리들의 일상 경험은 사실에 있어서 자신의 과거와의 만남이다. 그러한 까닭에 현재의 생활조건이 괴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 책임이 남에게 있지 아니하므로 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수 없다. 전생에 있어서의 권력의 남용이 현재의 가난과 궁핍의 원인이 되었듯이 만약 우리가 어떠한 비극적 환경에서 괴로움을 받고 있다면 과거생에서 어떤 형태로든 도덕적인 태만을 저질렀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어떠한 문제인 까닭에 자기 자신에게 그 해결의 열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주인이 자기이므로 결코 인생에 있어서 해결 불가능의 문제는 있을 수 없다. 모든 문제는 자기에게서 멋있게 풀려 나가고 마는 것이다. 남을 원망할 것도 아니지만 남에게 의지할 것도 아니며 현재의 역경에 굴복하여서도 안되고 도망칠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둘째, 인생은 그 자체가 도장이다. 인과의 법칙에 의하여 윤회전생이 되풀이 되는 동안 인생은 진리에 눈 뜨도록 교육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그런데 그 행복은 진리에 맞는 생활을 한 댓가로서만 허용되는 것이다. 진리에 어긋나는 삶이 비극을 결과짓는 것은 징벌적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진리에 거역한 죄를 보복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시정할 기회로서 제공된 것이 바로 현재의 어려움이다. 이 어려움이야말로 나의 잘못을 교정하여 주는 훈련장이다. 이 어려움에 부딪침으로서 과거의 어두움은 사라지는 것이다. 진리를 등졌던 그 잘못은 그에 꼭 맞는 시정 방법이 아니고는 바로 잡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 순간마다 무한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경험세계가 아니고는 그 미래의 창조는 해나갈 도리가 없다. 과거생에서 저질렀던 죄의 댓가도 지금 괴로움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체념하며 사는 소극적 삶이 있게 될 것이다. 인생 문제의 원숙한 해결은 바로 이런 점에서 가능해 질 것으로 본다. 진리에 입각한 해결인 까닭에 유물적이거나 미신적이 아니다. 그리고 수동적이 아니라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실로 무한대인 까닭에 한정지워질 결론이 없다. 영원한 과정이며 인생이란 실로 영원한 도장이다.

  셋째, 인생은 단막물이 아닌 영원적인 장편소설인 까닭에 단기적 목표나 그 성과로 가치를 판단하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목표가 소아적인 것일 때 우주 전체와 대립하는 결과가 되어 인생을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고 만다. 인생의 비극은 자기의 시간적인 제약을 받고 있는 육체의 노예로 잘못 알고 타인과의 대립 관계 속에서 투쟁적 삶을 해 나아감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다. 소위 생존경쟁이라고 하는 무서운 지옥은 바로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같은 소아적 가치관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큰 착각으로 진리를 등지는 것인 까닭에 어둠이 가실 날이 없다. 아무리 자기는 육체의 소멸 뒤에는 또 다른 육체를 가진 삶이 시작되어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적 연속성을 바탕으로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재능이나 성격의 개발에 대해서도 똑같고 육체적인 건강 또는 용모에 관해서도 다를 바 없다. 무엇이고 이룩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남으로부터 빼앗아와서 성취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부에 있는 무진장한 자원을 개발하므로서 성취한다. 그리고 [이미 늦었다]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고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말도 있을 수 없다.

  넷째, 모든 인류가 형제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육신으로 보아서는 각자의 부모가 따로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의 참생명력은 육신이 아닌 마음인 까닭에 그 마음은 사실은 우주의 법신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의 생명력이고 모든 법신의 분신임을 알 때 우리들은 모두 미래로부터 형제인 것이다. 형제사이에 장벽을 쌓을 때 법신(진리)에 대하여 담을 쌓는 것이다. 형제와 함께 한 몸이 될 때 법신과 나는 하나가 된다. 만약에 형제에 대하여 부채를 진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 모양대로 갚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부채가 어떠한 것인지도 잘 모르며 그 부채의 상환요구가 언제 있을 것인지도 모르는 경우 우리는 채무자로서 불안하게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혹은 갚고 싶을 때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인가? 방법은 확실히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이란 것은 나와 형제사이에 있는 울타리를 헐어버리는 것이다. 나와 형제사이에 있는 울타리가 없어질 때 사이에는 채권 채무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우리가 오랜 세월을 두고 형제들에게 진 한량없이 많은 빚을 한꺼번에 갚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 때 우리는 서로 사이에 있는 울타리를 없애는 것이다. 형제들의 이익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는 빚을 갚아가는 것이다. 형제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요. 형제의 영광이 곧 나의 삶을 빛내는 것이라 여겨지게 될 때 나에게 있는 채무는 모두 소멸되어 버린다. 삶의 목적 자체를 형제의 이익을 위해 사는 것으로 바꾸어 버릴 때 나에게 빚독촉 올 사람이 없어진다. 이런 의미에서도 앞에서 말하였듯 인생은 도장인 것이다. 이타행의 도장이다. 이타행으로서 묵은 빚은 갚아지는 것이니 인생은 사실 이타행 말고 참 값있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다섯째, 모든 행위의 주체는 마음이다. 우리는 흔히 몸과 입과 마음의 업을 지어 간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근원은 마음이다. 마음이 몸을 움직이고 마음이 말하고 마음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업을 짓는 주체이다. 겉모양으로 나타나지 아니한 행위라 하여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고 마음으로 어두운 생각을 지으면 그것이 곧 나의 앞날에 그림자를 남겨 놓는다. 그리고 몸으로는 남에게 이익한 일을 하고 입으로는 맑은 말을 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울타리 없음을 실행하지 않으면 그 이타행은 실효가 없다. 그리므로 마음을 언제나 맑게 하며 기쁘게하며 고마움에 차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모든 형제를 끊임없이 공겅하고 남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으며 남의 잘못이 보였을 경우 마음 속으로 내가 참회할지언정 그의 잘못을 마음 속에 간직할 때 그 잘못의 과보가 나에게 돌아옴이 명백한 까닭이다. 업보의 주체는 마음인 까닭에 형식에 치우친 수행은 그 얻는 결과가 적을 수밖에 없다.

  여섯째는 법신을 믿는 것이다. 법신이란 우주 전체의 진리의 몸이다. 진리란 본래 일정한 형태가 없는 것이며 없는 곳 없이 두루하여 있는 것이다. 진리는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아니하는 까닭에 소멸될 수 없다. 진리가 바로 만물을 낳고 만물을 키우고 만물을 감싸고 있다. 진리의 몸 법신에는 그러한 까닭에 무진장의 공덕이 갖춰져 있다. 우리들 개아는 이 법신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법신만의 세계에서 법신의 분신으로 살고 있다. 세계를 적으로 보았던 미몽을 깨고 법신과 하나인 참나의 본성으로 돌아갈 때 시간적 생사의 반복인 윤회에서 해방될 것이다. 법신과 하나인 까닭에 이미 일체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음이 나의 참본성이라고 믿고 법신 이외의 것인듯 보이는 모든 것을 절대 부정하자. 나와 대립되는 남, 남과 대립되는 나, 주관에 대립되는 객관 등 모두를 부정하여 이원론적 의미의 일체의 한정을 벗어난 참 나의 본성을 도로 찾을 때 애초부터 윤회가 없고 한계가 없고 어둠이 없고 파멸이 없는 무한세계의 주인공이 되리라.